지독히 혼자이고 싶다고? 그럴 수 있지
마이클 핀클 "숲속의 은둔자"
나를 얽어매는 모든 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때가 있다. 내 모든 삶이 엉망진창인 듯하여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을 때. 과연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지 자신이 없고, 직장에서 주변에 머무는 옹색한 자리의 나를 남들이 업신여기는 듯하고, 남편은 제 기분과 제 몸만 중요하고, 다정한 딸이기를 이미 오래전에 포기한 나는 며느리라는 타이틀도 기꺼이 던져버리고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 퇴근길 집으로 향하는 차를 다른 곳으로 몰아 이곳에서 영영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내 모든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때가 있다.
마이클 핀클의 "숲속의 은둔자" 크리스 나이트도 자신이 살던 세상에서 영영 떠나 숲으로 간다. 그러나 스무 살의 크리스 나이트가 평범한 자신의 삶을 갑자기 멈추고 숲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한 것은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딱히 문젯거리도 없었던 그의 평범한 삶은 그가 숲으로 들어가 다른 이들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평범하지 않게 되었다. 하필 그는 "세상에 존재하기를 중단하기로 결심"하면서 숲을 택했을까? 숲은 그에게 평온과 위로를 주는 동시에 불편과 괴로움도 주었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와 배고픔을 힘겹게 견디면서 그가 숲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를 바라서였다. 숲 속 고립을 선택한 크리스 나이트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자신의 야영지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들이 숲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며 나뭇가지 하나 태우지 않고 눈길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는다. "자신과 숲을 나누는 경계선이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고", 온전히 자신에게 몰입하여 고독 속에 고양된 지각은 그것을 보여줄 상대가 없었으므로 결국 자신을 정의할 필요도 없이 자신은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고 작가 마이클 핀클 앞에 앉은 크리스 나이트가 말한다.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한 채 어깨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 그토록 힘들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크리스 나이트는 세상과 단절된 숲 속 자신 만의 세상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했다.
일종의 사회적 자살과도 같은 숲 속에서의 절대적 고립을 위해 크리스 나이트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 형제와도 아무 연락을 하지 않는다. 사냥도 낚시도 경작도 하지 않았던 그는 숲 속에서 누구와의 접촉도 없이 살아가기 위해 훔치는 것을 선택한다. 필요한 것은 모두 훔쳐와 숲에서 27년을 머물렀다. 아무 흔적도 없이 별로 값나가지도 않는 물건을 도둑맞았지만 여름 오두막 주인들은 걱정 없이 보냈던 오두막에서의 시간을 침범당했다고 분노했고 아이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도둑에게 겁먹었다. 숲 속에 자발적으로 고립되어 자아가 상실되는 경지의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숲 속의 은둔자. 1000번 이상의 절도를 하면서까지 숲에서의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자유로움을 느끼며 27년을 살았다니.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을까'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작가 마이클 핀클은 감옥에 있는 크리스 나이트에게 편지를 쓴다. 그렇게 서로가 "아는 사이"가 되고 난 뒤 은둔자는 혼자이고자 하는 갈망이 얼마나 자기 존재의 완전성에 중요한지 이야기한다.
나 역시 숲을 좋아한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한다. 크리스 나이트처럼 숲에서 지내고도 싶다. 그러나 숲에서 지내더라도 찬물에 손빨래하는 것은 끔찍해서 세탁기를 돌릴 수 있으면 좋겠고 가끔은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와 그와 술잔을 기울이고도 싶다. 크리스 나이트를 조롱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그가 극단적이고 무모하였던 것 같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이 빠질 때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나를 추스리기를 원할 것이다. 다른 이의 방해 없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고요 속에서 에너지가 생긴다. 그리고 숲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고요를 제공해주는 최고의 공간이다. 누군가는 숲을 지나 산 꼭대기에서 숲을 바라보고, 또 누군가는 등산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서 숲을 즐기기도 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숲 속 나무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그 햇살 너머의 푸른 하늘을, 그리고 어딘가에서 불어와 내 뺨에 닿는 정적을 좋아한다. 습기를 품은 숲 냄새도 좋아한다. 종로 길거리 사주쟁이가 내 사주를 보고 나무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는 숲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무리를 이탈해 홀로 헤매다 생채기 난 새끼를 핥아주는 어미처럼 숲은, 숲 속의 나무는 혈육처럼 나를 위로해 준다. 괜찮다고. 누구나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고. 나는 비로소 내 두려움과 직면할 용기가 생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 두 가지를 꼽으라 하면 캠핑과 독서다." 이 문장을 읽고 작가 마이클 핀클은 '어쩜 나와 이렇게 똑같은 생각을 할까'라고 느꼈다. 게다가 그는 몬타나에 살고 있다. 몬타나는 브래드 피트가 길들일 수 없는 야성을 숨긴 앳된 얼굴로 플라잉 낚시를 하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 영화를 보고 몬타나의 아름다운 숲과 부드러운 수풀의 언덕 그리고 산을 돌아 흐르는 강을 동경하게 되었는데 작가가 그곳에 살고 있다니 부러웠다.
"숲속의 은둔자"는 숲과 숲 속의 고요함에 대한 극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발랄하고 유쾌한 숲과 숲 속의 고요를 느끼고 싶다면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추천하며 이 글을 마친다. 더불어 글이 너무 산만하여서 죄송하다는 말도 전한다. 딱 이만큼인가 보다 싶다. 나의 글재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