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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Jul 12. 2020

명쾌한 해설이 있기는 하지만 서사가 밋밋한... 소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나이가 들면서 내가 점점 꼰대가 되는 것을 내 독서가 점점 편협해지는 것을 보고 느낀다. 마흔의 중반에 있는 지금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짧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는 덜 변화무쌍하여 안정적일 수는 있지만 더 따분할 수 있다는 예측이 나 스스로를 더 측은하게 여기도록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있어서, 점점 생존의 가능성이 줄어들고 인생의 재미도 줄어드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나는 나를 성가시게 하는 어떤 것을 하기보다는 나를 즐겁게 하는 어떤 것에 집중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성가신 독서보다는 즐거운 독서에 집중한다. 그래서 도서관의 그 많은 책 중에서 나를 즐겁게 하는 책을 찾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책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자기 계발서를 잘 읽지 않는다. 나를 설득하려는 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으로 나를 가두려는 글을 읽을 때 답답함을 느낀다. 나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므로 나를 바꾸어 스스로를 성가시게 하는 그 무엇에 내 시간을 할애할 여유 따위는 없다. 그래서 나는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발전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겠지만) 늘 그 자리에서 같은 종류의 책을 읽는다. 이렇게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간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으면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가 왜 그런 처지에 처하게 되었는지, 왜 그렇게 예쁘고 순진한 얼굴의 사람이 점점 복수로 점철되는 인물로 변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해주는 여자 성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영화를 봤던 당시에도 생각했었지만, 성우의 내레이션은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는 하겠지만 이야기의 몰입에는 방해가 된다. 내가 촌스러운 사람이라서 그런지 형상화를 위해서는 메시지의 직접적인 발설보다는 에둘러서 표현하는 이미지의 나열이나 은유의 장치가 더 감동적이라 여긴다. 그래서 박찬욱의 또 다른 영화 "올드 보이"에서 최민식이 입으로 틀어넣는, 맹렬하게 살아 움직이는 낙지는 기나긴 감금의 무기력한 자포자기와 대비되어 드디어 되찾은 자유를 맘껏 기념하는 첫 식사의 은유로 무척 적절하다. 만약 그 장면에서 "친절한 금자씨"에서 처럼 성우의 목소리가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었던 대수가 드디어 감금에서 풀려나 지긋지긋한 군만두와는 달리 살아있는 자유를 느끼고자 산 낙지를 먹고 있다"라고 감독의 의도를 설명했다면 그 장면이 얼마나 찌질했겠는가?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는 소설 속 주요한 사건으로 떠오르는 문제에 대해 볼드체로 인쇄된 작가의 해설과 설명이 소설의 서사보다 더 중요하게 도드라진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성우 목소리처럼 작가가 사사건건 모든 이야기의 갈등에 대해 해설과 설명을 한다. 작가의 해설과 설명을 제외한 라비와 커스틴의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새롭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다. 연인에서 부부가 된 라비와 커스틴의 사소하지만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일반적인 삶의 문제와 갈등에 대해 작가가 노골적으로 설명하고, 그 설명은 명쾌하며 내가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내 행동의 심리적 원인까지도 밝혀내 준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어색하다. 제목에서도 낭만적 연애와 연애 이후의 낭만이 사라진 일상에 대한 드라마틱한 뭔가를 기대하게 해 놓고는, 대단치도 않은 삶의 뻔한 갈등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작가의 대단한 분석이 적어도 이 책을 읽어서 감정의 정화를 확 쏟아내기를 기대했던 나에게는 밋밋하다.  


"알쓸신잡"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소설은 감정의 테마파크라고 했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놀이공원에서 독자가 다양한 코스로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나가는 것이 소설이라고. 내가 느끼기에는 알랭 드 보통의 이 소설은 무릎을 치며 "그래! 그런 거였어!"라고 독자로 하여금 연애의 또는 연애 이후의 결혼 생활에서 오는 정서적 갈등의 원인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풀어주는 맛은 있지만 독자 스스로 감정을 정화하고 감동을 느낄만한 서사는 없는 것 같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 아이가 롤러코스트를 타고 짜릿하고 재미있고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고 어서 다른 놀이기구를 또 타려고 급히 걸어간다. 그런데 그 아이를 붙잡고 "너 재미있었지? 그런데 또 무섭기도 했지? 왜 그런 상반된 감정을 느끼냐면 말이야 이런 이유에서야"라고 하면서 친절하고 명확하게 설명을 하는 가이드가 있어서 그 가이드의 설명을 다 들어야만 다음 놀이기구를 탈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과연 그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할 수 있을까? 더 재미난 경험을 원하는 아이에게 "잠깐만 기다려서 내 말을 들어봐. 지금 네가 느끼는 건 말이야 바로 이런 거야"라고 설명한다면 그의 설명에 귀 기울일 수 있을까? '인내심을 발휘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자. 어쩌면 그의 설명이 다음번에 놀이기구를 더 재미있게 탈 수 있는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거야'하고 가이드의 설명을 끝까지 들어보는 심정으로 읽은 이 책은 작가의 설명이 나쁘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음으로써 나를 즐겁게 하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는 나에게는 서사가 부족한 느낌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처음에서 밝혔던 것처럼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지 않은 나의 편협한 독서의 감상일 뿐이다. 그러나 편협한 독서를 이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편협함을 박살 낼 도끼를 숨긴 책을 만나기를 늘 기대한다. 그 기대를 안고 도서관으로 가는 내 발걸음은 그래서 언제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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