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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Jul 13. 2020

살아가야 하는 나날을 위해 밥 짓는 부엌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

지난  월 말 코로나 사태로 체육관이 문을 닫았다. 재택근무를 하며 되도록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만 있는 상황이 빨리 끝나길 바랐는데 나의 바람과는 달리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고 있었지만 체육관은 문을 열지 못했다. 더 이상 운동을 쉴 수 없어 마스크를 쓰고 집 근처 강변 산책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책로를 걸으며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는 동안 흰 꽃잎을 흩날리던 나무에서 검붉은 버찌가 떨어지고, 몸을 키운 물고기가 강을 따라 올라와 산란을 하고, 유채꽃의 씨주머니가 갈색으로 여물고, 뾰족이 올라온 죽순이 첫 초록 마디로 자라나고, 망초꽃은 여름 햇살을 받아 작은 몽우리를 피워 내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세상은 마스크를 쓰고 낯설게 돌아가는데 시간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매일매일 애쓰며 안달복달 살아가다 문득 변함없는 시간의 모습을 바라보면 그 한결같음이 우리의 기억을 배반하지 않아 반갑기도 하고, 나는 이렇게 애를 끓이며 살고 있는데 시간은 저 혼자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흐르는 듯하여 야속하기도 하다. 나의 반가움이나 야속함 따위 아무 상관없이 시간은 다시 또 흘러 햇살을 사그라뜨리고, 어둠을 뿌리고, 그 무엇의 존재를 거두어 가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을 데우고 봄을 보내오겠지. 어김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는 또 산책로를 걸어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불편한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그 무엇의 삶은 지속되어야 하므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키친"에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되어야 하는 삶이 넌덜머리 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먹이는 일에 빠져드는 미카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가는데 "그래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미카게는 간신이 부엌에서 잠을 자고 있다. 이 세상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머니를 잃은 미카게가 또 다시 닥친 죽음을 견디며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인 잠을 자고 있는 부엌으로 유이치가 찾아온다. 유이치 역시 어머니를 잃고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렇게 같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은 조용히 죽음을 견뎌낸다. 다른 방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 죽음을 견딜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죽음은 관계의 중단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는 어떠한 관계도 유지할 수 없다.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어떤 부분은 규정된다. 나를 규정하는 한 부분이 허물어지는 것. 그것이 나와 관계된 누군가의 죽음이 나에게 주는 상실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내가 누구라고 말해주던 사람이 사라져서, 내 존재의 한 부분을 잃어버려서 황망하고 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몰라 허둥거린다. 아내를 잃은 유이치의 아버지가 여자인 "에리코"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아내를 잃고 더 이상 남편으로서 남자로서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고 싶지도 않았던 이유에서가 아닐까. 유이치의 아버지에서 어머니가 된 에리코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현명하다. 그래서 그의 성 정체성의 전환이 갑작스럽지만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유이치의 손에 이끌려와 자신의 아파트 부엌이 아닌 거실 소파에서 잠자게 된 미카게에게 에리코가 말한다. "정말 홀로서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뭘 기르는 게 좋아. 아이든가, 화분이든가. 그러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있게 되거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p.58)  유이치를 엄마로서 기르면서 '에리코 자신도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아내를 잃은 자신의 홀로서기를 시작했겠지'생각했다. 그리고 작가가 아직도 젊은 스물의 시절에 이 소설을 썼다는데 어떻게 이런 현명한 문장을 적을 수 있었을까 참으로 감탄해마지 않았다.


미카게는 에리코와 유이치와 함께 지내면서 점점 삶에 대한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 간다. 두 사람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했던 그녀의 삶에서 왜 그렇게 부엌은 편안했는지 알게 된다. 음식을 만드는 일이, 사람을 먹이는 일이 삶을 지속해야 하는 당위를 복잡한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했고 부엌은 그런 일을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미카게는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나는 이토록이나 부엌을 사랑하는 것일까. 이상한 일이다. 혼의 기억에 각인된 먼 옛날의 동경처럼 사랑스럽다. 여기에 서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무언가가 다시 돌아온다." (p.77)  "싫은 일은 썩어 날 정도로 많고, 길은 눈길 돌리고 싶은 만큼 험하"고 "사랑조차 모든 것을 구원하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음식을 하는 것은, 그 음식을 하는 공간인 부엌은 미카게에게 삶을 구원하는 곳이다. 그래서 에리코가 어이없이 죽어 삶을 지탱하기가 너무도 힘든 유이치를 먹이기 위해 추운 겨울밤 "혼자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맛있는" 돈가스를 싸들고 미카게는 유이치를 찾아간다. 그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 그의 삶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


데뷔작이 대표작인 작가가 있는 반면, 데뷔작을 기반으로 그 이후의 작품이 더 많은 박수를 받는 작가도 있다.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데뷔작을 읽고 그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은 경우도 있고, 대표작을 읽고 그 작가의 데뷔작을 읽고 싶은 작가도 있다. 그리고 데뷔작이든 대표작이든 무엇이 되었건 한 작품을 읽고 다시는 그의 다른 책을 읽고 싶지 않은 작가도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은 그녀의 데뷔작이다.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가 한 권의 책으로 1988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니 오래되었기도 하다. 첫 느낌은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설정이 작위적이다'였다. 책으로 함께 묶여 나온 세 이야기 중 특히 마지막 "달빛 그림자"는 번역의 문제 때문인지 혀 짧은 소리로 어리광을 부리는 듯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주인공 사츠키의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우라라의 존재는 신비롭다기보다는 하루아침에 집 앞에 솟아난 산처럼 이야기를 꾸며내기 위한 장치로 여겨졌다. 작가 소개를 보니 "달빛 그림자"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대학 졸업 작품이라고 한다. 문단에 나오기도 전에 쓴 글이다. 그래서 아직도 길들여지지 않은 새 것의 뻣뻣함이랄까 불편함이랄까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다른 책을 한 번은 더 읽어보고 싶다. 모래 속에 숨겨진 사금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문장은 간결하지만 긴 울림이 있다. 인생의 잠언처럼 내 마음에 와 박히는 그 문장들을 깊은 밤 식탁에 앉아 노트에 적었다.


코로나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체육관이 다시 문을 연 지금 나는 체육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이 강변 산책로를 걷고 있다. 산책 중 검고 작은 알갱이들이 한 몸인 듯 수북이 모여 바글거리며 작은 나뭇가지 주위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개미떼가 죽은 지렁이에 들러붙어 지렁이를 옮기려고 분주하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다. 죽음 앞에서 참으로 냉정한 자연의 시간 만이 존재하는 그 장면에 나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삶과 죽음, 죽음으로 잃어버리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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