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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May 13. 2021

멸치와 앤초비 사이

Now, anchovy in season.


언제부터였을까. 기억 속 우리 집 부엌엔 늘 멸치가 있었다.


부엌에서 베란다 문을 열자마자 손이 닿는 선반 자리, '죽방멸치'라는 이름의 마른 멸치 상자가 놓여 있었다. 국물의 다시를 낸다면, 일단 멸치가 기본이다 보니 보리차는 떨어져도 멸치가 떨어지는 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디포리나 새우 같은 고급 다시팩이 일상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매일 마셨던 국물의 팔 할이 멸치였다. 비쩍 마른 멸치의 배를 가르고, 내장과 무엇을 빼는 건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잔심부름 중 하나. 그땐 오늘 된장국 냄비에 멸치 몇 마리를 넣는가가 그렇게도 중요해 보였다. 우리는 4인 가족이니까 네 마리는 넣어야 한다고, 엄마는 나름 이유를 붙여주셨던 것도 같다. 그렇게 바글바글 우려낸 멸치 국물은 된장 국부터 일상 속 모든 국물의 바탕이 되어왔다. 요리에 들어가면 존재감이 뚜렷한 사골육수에 비해 맑게 우려내는 멸치육수는 금방 주재료와 하나가 되는 탓에 멸치 고유의 맛을 알아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껏 밥상 속에서 만나온 멸치는 삐쩍 마른 모습이었다. 다시 멸치가 아니면, 멸치 볶음이 전부였던 세상. 남해안의 작은 항구 진해가 고향이셨던 엄마가 가끔 혼자 드시는 멸치 전 젓(멸치를 통째로 삭힌 젓갈)은 서울내기였던 내게는 강한 냄새 때문에 근처에도 가기 어려웠다. 그렇게 건조하기만 하던 멸치의 세계를 처음으로 바꿔준 것은 외국에서 수입된 깡통 속에 뼈 바른 채로 들어 있던 안초비라는 생선이었다.



진한 염장을 통해 짭짤한 맛이 주를 이루지만 젓갈처럼 짜진 않고, 특유의 감칠맛과 독특한 향이 입안을 감돌았다. 처음 생바질 잎을 가지고 페스토를 만들던 날, 간을 더하기 위해 안초비를 넣었다. 음식의 간을 맞추면서 감칠맛까지 더해주는 소위 만능 식재료를 처음 맛본 기쁨에 들떠 있었을까. 그런데, 이 앤초비가 멸치라고? 단번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생 알고 있던 멸치와 앤초비 사이에는 거대한 간격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멸치가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사월부터 유월까지, 택배로 생멸치를 받아보면 가장 먼저 그 크기에 놀란다. 다시용 마른 멸치는 아무리 커도 손가락 길이를 넘기 어렵지만, 큰 축에 드는 생멸치 길이는 얼추 손바닥만큼 길쭉해서, 처음엔 이것이 멸치인가 꽁치 새끼인가 모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멸치는 주로 남해연안에서 잡는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죽방멸치'의 '죽방'은 지역의 이름이 아니라 멸치를 잡는 특별한 도구의 이름이라고. 워낙 성질이 급한 어종이다 보니 낚시로 잡아도 금세 여기저기 긁히고 상처를 입는 탓에 남해지역의 센 물살과 지형을 활용해 '죽방렴'이라는 그물을 통해 서서히 들어온 멸치 떼의 공간을 좁혀 잡아 올리는 형식이란다. 이 전통적인 방식이 제일 상처입지 않은 멸치를 잡기에 좋아서, 죽방으로 잡은 멸치를 상등품으로 친다는 이야기다. 성질이 급해 서울까지 오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회로 먹기에 비리도록 상한다는 고등어보다 더 성질 급한 등 푸른 생선이기에, 비린내 없이 담백한 회로 즐기려면 반드시 산지로 내려가야 한다고.



매년 이맘때쯤이면, 부산의 기장지역 근처로 모든 숙소가 가득 들어차는 때가 온다. 멸치가 제철이다 보니,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생멸치로 새콤달콤한 회무침부터 얼큰한 찌게에 쌈밥까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음직한 싱싱한 멸치요리를 먹고자 전국에서 몰려오기 때문이다.



지난주 우리도 기장에 있었다. 매일 아침 생멸치가 튀는 대변항을 찾은 이유는 조금 달랐다. 올 해도 직접 앤초비를 담그기 위해서, 멸치 손질을 해주시는 어머님을 찾아뵈어야 했다. 항구 앞에 작은 천막 아래서 두 따님과 함께 멸치 손질을 하시는 어머님께는 전국에서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들었다.



지금만 먹을 수 있는 생멸치의 매력이란, 언제나 말린 육수용 멸치의 뉘앙스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항구 앞의 거의 모든 식당은 생멸치 전문식당들이었다. 모두가 초장에 싱싱하게 버무린 회무침으로 내거나, 김치를 넣고 지지는 얼큰한 조림 형태의 찌개로 생멸치를 요리하신다. 어머님의 멸치 손질을 기다리며, 식당에 앉아 오리지널 생멸치 찌개를 하나 시켰다. 얼큰한 탕에 담백한 멸치를 넣어 김치로 지져내니 특유의 옛맛이 참 좋았지만, 양념이 진하다 보니 멸치의 투명하고 담백한 맛이 가려지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인시즌의 주방에서 갓 도착한 생멸치 봉투를 열자마자, 눈 앞에 넘실대는 바다 냄새가 항구 못지않았다. 다행히 아직 비린 향기가 올라오기 전, 그저 짭조름한 내음을 넘치게 품고 있을 뿐이다. 보내주시는 멸치들은 바닷물로 헹궈 보내주시기에 따로 소금 간을 칠 필요가 없다. 앤초비를 위해 손질된 멸치 외에도 회무침용 생멸치를 몇 킬로 같이 부탁드렸다.



일단 있는 그대로 입에 넣어보니, 녹는다.



담백한 멸치 고유의 맛과 향이 부드럽게 입 속에서 스러졌다. 처음으로 '멸치'라는 생선 고유의 맛을 보는 순간이었다. 언제나 국물로 우려먹던 멸치의 참맛이 이토록 작은 살 안에 달큼하게 고여 있었다.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접시에 생멸치를 담고 질 좋은 올리브유나 생들기름을 꺼내 몇 방울 떨어트려 준다. 하귤청이나 하귤즙 같은 감귤계 열매로 간단히 마리네이드 하면 그 맛은 훨씬 더 고급스러워진다. 눈 앞에 한 접시쯤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오늘, 처음 '멸치의 맛'을 알게 된 기분이다.



생멸치 마리네이드

Anchovy Marinade


머리를 떼고, 뼈와 내장을 발라낸 생멸치

하귤즙 약간

하귤청 1~2큰술

(하귤이 없다면 신맛이 나는 감귤계 열매로 대체 가능)

생들기름 또는 올리브유 1~2큰술


1. 회무침용으로 손질된 생멸치를 구하거나, 생멸치를 산 뒤 머리를 떼고 배 쪽으로 칼집을 내서 내장을 떼어낸 뒤 가운데 뼈를 바른다.

2. 3% 정도의 소금물(바닷물과 비슷한 농도)에 씻어낸 생멸치를 물기를 털어 접시에 낸다.

3. 2에 그대로 기름만 둘러 맛을 봐도 좋지만, 

   간단한 마리네이드를 하자면 2에 하귤즙과 하귤청을 부어준 뒤 기름을 둘러 뒤적여준 뒤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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