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만한 숲 속
어젯밤 급히 숙소를 구경했다.
출근길 전철 안에서 결제를 마쳤다.
그리고 종일 그곳의 생각뿐이었다.
여행이 급했다. 문장이 마구 샘솟았다. 마음이 온통 떠날 생각뿐이다. 이토록 가고 싶었던 여행을 왜 이제 알아차렸을까. 춘천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은 목요일 점심이 되겠지만, 월요일 아침부터 마음이 둥실 떠버렸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채로 앞으로 이틀을 더 버텨야 하는데, 종일 정신이 없었다.
스스로가 메마르다 못해 바위 사막의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계절에 따른 글감을 찾다가, 작년에 써 두었던 이맘때의 글을 읽는데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분명히 스스로 적은 문장임에도, 단어 사이에 보이는 그날만의 감정과 여운이 촉촉하게 배어 나왔다.
그에 비하면 방금 모니터에 적어 넣은 문장들은 버석버석 마른 돌멩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계적으로 일상을 나열할 뿐 정서는 소멸된 글들을 보면서 알아차렸다. 더 이상은 무리, 쉬어야 한다는 것을. 먼지가 폴폴 날릴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했다. 시시각각 침투해 있던 일상과 생각을 모조리 걷어내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모두 치우고, 내면을 들여다볼 시간.
막상 작정하고 보니 2박 3일은 그리 길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준비해도 막상 떠나면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한 것이 여행의 묘미였을까. 해외여행도 아니고, 전철로 갈 수 있다던 춘천인데 이렇게 첫날부터 헤멜 줄을 몰랐다. 숲 속의 스테이라는 말에 예약했던 숙소는 춘천이라는 익숙한 지명에 가깝기보다는 깊숙한 강원도의 숲 속이었고, 검색에서 말해주던 마을버스의 간격은 1시간이 넘었다. 김유정역에서 숙소까지는 차로 10분이라길래, 버스가 너무 안 오면 걸어갈까 생각했던 것은 무식한 도시 생활자의 한계였다. 거리로는 5km가 넘는데 인도도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지방의 국도를 캐리어를 끌고 걸어야 했다면, 도착도 전에 쓰러지고 싶었을 테다. 다행히 같이 점심을 먹던 동생의 도움으로 예상 가능한 모든 고생의 시나리오를 건너 무사히 차로 김유정역 근처에 도착했다. 저녁이라도 먹여 보내려 역사 근방의 음식점을 모두 돌았지만 코로나 여파에 어둑어둑한 8시에는 모두들 문을 닫고 계셨다.
결국 여행의 첫끼는 편의점에서 냉동피자와 오뎅탕, 삼각김밥으로.
캄캄한 계곡길을 10분쯤 달리자 저 멀리 숙소 불빛이 반짝였다.
적막스럽게 깊은 숲의 내음과 어둠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은 오롯이 한 사람을 위한 한 채의 집이었다. 작은 책상과 너른 창가의 침대, 작은 싱크 겸 주방과 독립된 화장실까지. 요즘은 딱 이런 방에서 살고 싶었다. 제법 높은 층고는 자그마한 면적 대비 넉넉한 공간감을 선사했고, 너른 창마다 걸린 풍경들은 아침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북 스테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라운지에는 제법 볼만한 책들이 빼곡한 서재를 구경했는데, 자그마한 책상 앞에도 몇 권의 에세이가 골라서 꽂혀 있었다. 간단히 짐을 풀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누군가의 포근한 취향과 꼼꼼한 챙김이 묻어나는 정결한 공간에서, 그렇게 오랜만에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조식으로는 근방의 유명한 집 김밥을 아침 9:30에 나눠주신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일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잠들고 말았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환한 기운에 절로 눈이 떠진 것은 어이없게도 8시쯤이었다. 커튼으로 꼭꼭 빈틈을 닫아두었지만, 워낙 큰 창가에 아침볕이 드는 위치의 침대는 커튼 너머의 아침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애써 창을 등지고 몸을 돌려 미적거려보지만, 9시에는 이미 온전한 정신이 들고 말았다. 휴가에서 늦잠이 사라졌음에도 기분이 좋은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싶기도 했다. 이미 산자락 끝까지 온전히 들어찬 강렬한 볕에 숙소를 둘러싼 푸름이 눈부셨다. 조식을 받으러 다녀오는 길에 살짝 앞마당에 나서보니, 이 숙소 앞에 깊게 패인 계곡과 그를 둘러싼 깊숙한 숲의 정경이 아래로 제법 가파르게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 점심 즈음엔 먹을 것을 공수하러 문명의 세계에 나갈 수 있으려나, 어이없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워낙 섬처럼 숲 속에 갇힌 공간이 좋아서, '자발적 고립'을 위해 찾아온 만큼, 어지간하면 오늘 하루는 여기 방 한 칸에 잠겨있고 싶다는 소망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어젯밤, 여행가방에 쟁여 둔 빵 하나와 아침으로 받은 제법 두툼한 김밥 한 줄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다행히 라운지에는 컵라면과 컵밥까지 공수가 가능했다. 아예 외출을 단념하면서, 라운지에서 몇 권의 책을 더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침대에 엎드려 읽는 '리틀포레스트' 만화책이라니. 졸리면 이대로 잠들면 그만이었다. 요즘 표현으로 딱 '개꿀'이었다.
지금껏 여행을 가면, 일단 그 지역의 유명한 곳을 찍어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다양한 경험의 폭을 늘리는 것이 가장 남는 여행이라고 생각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꾸 출장과 여행이 구별되지 않는 상황이 종종 펼쳐지기도 했다. 일정에 끌려다니느라 여행 와서 더 지치는 경우도 다반사. 그래서 최근 가장 가고 싶었던 휴양지는 내방이었다. 그런데 정리되지 못한 삶의 자리는 사람을 더 피곤하게 만든다는 주변의 지혜로운 만류에 그저 가방을 쌌었다. 온전히 평화롭게 틀어박힐 곳을 찾아서, 이상적인 나만의 방을 찾아서 찾아들어온 곳이 이 숲 속이었다. Doing 보다 Being으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 쉼이 되는 그런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종일 책만 읽으면 지겹지 않을까 싶던 걱정은 기우에 가까웠다. 특히 오늘처럼 36도를 웃도는 기온에 두꺼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오후는 쾌적하고 시원한 실내에 머물기만 해도 즐거웠다. 숙소에서 들고 온 에세이가 세권, 만화책 2권에 집에서 들고 온 책이 서너 권. 생각보다 쉴 틈이 없었다. 커피와 차를 내려 마시며 찬찬히 글들을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의 가게를 시작하고 마무리 짓는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우리의 첫 카페를 떠올리기도 하고 커피 산지를 돌아다니며 콩을 사는 이야기를 통해 중남미와 아프리카를 누비는 상상을 했다. 2011년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왔던 아프리카의 기억들이 책 속의 글들과 함께 오버랩되다 보니 너무 실감 나게 읽다가 같이 흥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숲 속에서 엎드려 읽는 책 몇 권 속에 깊이 빠져들다 보니 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지만 저녁 무렵엔 심히 배고프고 피곤했다. 아침에 남겨둔 김밥과 빵을 꺼내 조촐한 저녁을 먹었다. 7월의 저녁 6시는 여전히 오후 2시같이 밝고 더웠다. 슬슬 한 대씩 차들이 숙소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2박 3일이 짧다고 느끼는 것은 딱 지금, 둘째 날 저녁 마지막 밤을 앞두고다. 이제 이 밤만 자고 나면 아침에는 이 방에서 나가야 한다. 보통 둘 이상의 여행이라면 마지막 밤을 지새우곤(?) 하겠지만, 홀로 조촐히 보내는 밤도 매력적이다. 시원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나와서 어제 체크인할 대 선물로 주셨던 아이스크림 바를 꺼내 이 밤을 기념했다. 피스타치오가 들어간 쿠키 아이스크림은 태어나서 처음 맛보았다. 피스타치오를 선호하지 않는 성향과 무관하게, 목욕 후 먹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은 기가 막혔다. 어둑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모처럼 사치스럽게 멍 때리기를 얼마나 하고 있었을까, 여섯 살 조카와 시골에 내려가 고생하는 동생의 전화가 걸려왔다. 일상의 한 복판에서 수고하는 그녀에게도 나 같은 휴가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 여행을 생각하면서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2박 3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깨닫거나 생각을 하고 또... 등등. 그렇게 일상으로부터 떨어지겠다고 다짐했지만, 비우기보다는 잔뜩 무엇이든 채워 넣으려고 고민했었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스스로의 생각보다 막상 마주하는 여행의 여운은 더 크고 넓은 편이다. 이제 30분 뒤면 체크아웃 타임, 다시 돌아가야 할 때다. 문득 일상에 지치는 어느 날, 이 방에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가볍게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