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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Nov 22. 2019

Cafe show

생존과 낭만 사이, 그 사이의 간극에 대하여

카페라는 공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의 일상에 많은 공간들이 생겨나고 없어지지만, 꽤 오랫동안 카페만큼은 누구에게도 사랑받는 곳이 되어왔다. 물론 맥카페와 스타벅스, 그리고 스페셜티 커피를 전문으로 마실 수 있는 카페까지 그 가격의 스펙트럼이나 인테리어의 퀄리티 역시 천차만별 이건만, 카페라는 공간은 그 나름의 종류대로 다 좋아해 왔다. 집중이 어려운 시험공부도 내일 마감이 걸린 프로젝트 피티 작성도 마법에 걸린 것 마냥 카페에 앉으면 술술 풀리곤 했다. 도서관과는 또 다른 집중의 최적 장소랄까. 백색소음이라는 말이 납득 가는 적당한 타인의 대화 속에서, 아무도 없으면 늘어지기 쉬운 집과는 달리 적당한 긴장감이 스스로의 작업능률을 쉽게 올려주곤 한다. 때문에 이런 날에는 그 작업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라도 제일 비싼 커피 메뉴 역시 쉽게 마실 수 있었다. 물론 작업뿐만은 아니다. 친구들과 수다 떨기도, 딱히 갈 데 없을 때 혼자 책을 보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집 근처 단골 카페는 거실이고, 응접실이고 때론 간단한 식당이기도 하니까. 어떤 카페는 특별 디저트 때문에, 다른 곳은 사진이 잘 나오기 때문에 등등 수많은 이유를 붙여놓고 짬이 날 때마다 다니는 카페 유람만큼 재미난 구경도 드물다. 워낙 하루가 멀다 하고 신상 카페가 쏟아지는 연남동에 살다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 사람은 행복할까. 너무 궁금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고 살면 얼마나 보람차겠냐고 생각하던 대학교 4학년, 작은 실험을 감행했다. 부모님과 상의 없이, 전공과 전혀 관련 없는 영화 홍보사에 인턴을 시작한 일이었다. 고등학교부터 쉬는 날이면 극장과 영화잡지에 빠져 살던 자신에게 주는 첫 번째 기회이자 반항이었다. 제작 분야의 일부터 배울 수 없는 전공 탓에 그나마 접점을 찾은 것이 홍보일이었다. 첫 달에는 영세한 영화 홍보사에서 열정 페이를 받아도 감독님과 함께 진행되는 스탭회의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영화잡지 기자들을 상대로 진행되는 촬영장 공개나 홍보자료 배포 등 머릿속으로만 보던 일들을 돕는 짧은 즐거움은 생각보다 많은 삽질의 대가를 요구했다. 12시간 내내 홍보 댓글만 달아도 가슴이 벅차오르던 감격의 지속기간은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못했다. 금세 잔인한 현실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본질적으로 개봉하는 모든 영화 중에 성공하는 영화는 정말 소수였기에, 일을 다하고 돈을 못 받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1년이 조금 안되던 나의 인턴생활은 결국 마지막 홍보했던 영화가 망하면서 계약금의 절반을 떼이고 사무실이 문을 닫는 과정에서 함께 강제 종료되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가장 부러운 사람 들 중 하나는 카페 주인이었다. 집도 직장도 아닌 제3의 장소를 소유한 사람은 라이프스타일 역시 여유로울 것이라고, 막연히 그 공간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덧입혀 상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인시즌이라는 업체를 시작하면서도 미래의 목표 중에 우리만의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친구의 건물에서 그 꿈을 쉽게 펼쳐볼 수 있는 기회가 오자마자 시작을 서둘렀다. 지나고 보면 이때가 제일 재미있었다. 이 카페를 어떻게 꾸미고, 무엇을 서비스할까 이렇게 저렇게 마음껏 계획 세우고 꿈꾸던 시간들. 벽 색깔이 마음에 안들에 페인트만 세 번 칠해 볼 수 있었던 그 여유들. 가구를 만들기 위해 온 경기도를 누비고, 을지로에서 직접 철을 접어 설치하던 시간들. 무척 고생스러웠지만 보람찼던, 아직 카페라는 현실에 눈뜨기 직전의 상황이 가장 아름다웠을지도 모르겠다.


 

카페의 주인은 누굴까. 카운터 너머에 서서 영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카페의 주인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카페라는 공간을 차지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손님의 특권이란 걸. 주인이니까 맘 놓고 내 카페에 마음껏 있을 수 있을 거란 착각이 얼마나 어설픈 생각이었는지는 금세 알게 된다. 그렇게 편안하고 집중이 잘되던 카페라는 공간은 반드시 타인의 카페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 카페에선 아무리 손님인 척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카페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신경이 쏠려 지금 뭘 하고 있었는지, 손에 들린 책의 이름을 확인할 정신도 없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앉은 테이블 위가 깨끗한지, 바닥에 더러운 것이 떨어지진 않는지, 저 앞에 앉아 시끄럽게 떠드는 손님이 다른 테이블을 방해하진 않을지부터 시작이다. 주방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만 나도, 무슨 일이 있나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누를 길이 없고, 아침에 나온다던 스콘은 왜 아직도 안 나오는지 기다리다 쫓아 내려가고픈 기분이 되고 만다. 오늘 하루 카페라는 공간이 무난하게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소소한 일에 매여있는 자신을 보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여기는 마음대로 권리를 행사하는 곳이 아니라 의무로 매이고 마는 타인의 공간이라는 것을.


지난 2년여간의 카페 경험을 지나고 달라진 점은 카페의 이쪽과 저쪽이 모두 공감된다는 점이다. 카페를 운영하는 입장이 얼마나 바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지를 이해하다 보면, 내 커피가 좀 늦게 나오는 것 정도는 쉽게 기다려 줄 수 있게 된다. 메뉴판만 봐도, 이 카페의 주인이 얼마나 수고하는지가 느껴지기도 하고, 무언가 좀 더 쉽게 카페의 서비스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그들의 입장에 서서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단순히 카페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을 향유하는 것을 넘어서, 카운터 너머의 사람들까지 바라보게 되는 것은 특이한 시야의 확장인 셈이기도 하다. 여전히 카페 공간을 좋아하는 나는 정말 맛있는 커피와 좋은 카페 공간을 만나면 절대 사라지지 말라고 소원을 비는 버릇이 있다. 유행에 따라 쉽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카페들 속에서도 여기만큼은 계속 그 맛과 장소를 지켜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결국 오래가는 카페의 조건 중 하나는 그 공간을 운영하는 주체가 소모되거나 지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주인도 손님만큼이나 그 카페에서 살아가는 매일이 즐거울 순 없을까.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하면서 행복할 순 없을까.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계속되는 고민 속에서 6년째 카페쇼에 참여했다. 


생존과 낭만 사이. 최근 발표된 노래의 제목인데 왠지 내게는 카페와 동의어처럼 들린다면 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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