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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Jun 27. 2019

Beaune _ strangers.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근처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어슴프레 눈을 떴다. 몇시쯤 되었을까. 



오랜 도시 중심에는 언제부터 있었을지 모르는 종탑이 있고, 매 시각 제법 쨍한 소리를 울려 시간을 세어준다. 거리엔 좀처럼 3~4층을 넘지 않는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그 건물들의 세모난 지붕 끝에는 지난 세월의 무수한 안테나와 함께 작은 풍향계가 달려 있었다. 



커다란 창가에는 환한 아침 볕이 커튼 너머로 한 가득 들어 차기 시작하고, 이제 슬슬 일어나야 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바게트를 사러 빵집으로 달음질 치는 아침, 날씨는 눈부시고 품 속의 바게트는 아직 따뜻했다. 왜 여행지만 가면 유독 식사에 집착하게 되는 걸까. 집에선 매번 거르던 아침식사를 차리기 위해, 하루 저녁만에 익숙해진 타인의 주방에서 엊저녁 장 봐온 야채를 씻고 소세지를 데쳤다. 간단한 샐러드에 치즈를 큼직하게 올리고, 갓 나온 바게트에 꿀을 발라 먹는 여행자의 아침. 

 


우유에 시리얼을 한 컵 말아먹고 나니 눈이 조금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부엌 창을 활짝 열었다. 아직은 낯선 도시의 바람이 서늘하게 들어찬다.



한낮에는 더워질 텐데, 긴팔은 답답하고 반팔은 허전한 초여름, 프랑스의 시골 도시는 서울보다 5도는 더 서늘했다. 눈부신 햇볕을 피해 그늘 길을 따라 도시의 좁은 골목을 일렬로 걸었다. 밟고 건너는 도로 위의 벽돌들이 따끈따근하게 느껴질 무렵, 도시 중앙의 성당을 건너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았다. 


참고로 이 도시는 중심의 동그란 성벽을 기준으로 지름에 해당하는 거리를 가로질러 간다 해도 걸어서  30분이 걸리지 않는 아담한 규모를 지녔다. Beaune의 거의 모든 볼거리를 40분 만에 둘러볼 수 있다는 꼬마기차를 예약하고, 지역 행사처럼 열린다는 와인 하이킹 투어의 팜플렛을 발견했다. 포도밭 사이를 총 8km 걷고, 중간중간 스팟에 자리한 꺄브에서 10잔의 와인을 현지 부르고뉴 지역의 토속 음식과 함께 맛볼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물론 이 당시엔 포도밭에서의 8km의 하이킹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방문 목적을 달성하고도 꼬마기차의 출발까지는 아직 한 시간 가까이 남아있는 시간.

덕분에 계획에 없던 도시의 메인 관광코스, 눈 앞의 성으로 들어섰다.



본이라는 도시의 중심이 되는 기념관이자 1890년대까지 병원으로 쓰였다는 곳이었다. 이 도시를 설명하는 모든 안내문에 소개되어 있는 이 건물은 중세에 믿음 좋은 본의 성주가 자신의 재산을 받쳐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만든 병원이었다고. 당대 교황의 허가를 위해 병원 한쪽에는 아픈 환우들을 위한 작은 성당이 함께 딸려 있었고, 수녀님들이 기거하며 환자들을 돌봤다고 한다.



병원의 모든 운영은 이 병원을 세운 성주처럼, 신앙심이 좋은 귀족들의 기부로 이루어졌다. 놀라운 점은 건립 당시의 아름다운 성의 디자인과 외관이 지금까지 훼손 없이 잘 보관되어 있다는 점이고, 내부에 전시된 환자들의 침대는 중세시대에 디자인되었음에도 지금 환자들이 사용해도 편안할 만큼 잘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중세부터 보존되어온 입원실이나, 치료실, 약국에 주방까지 그 누군가의 일터와 일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을 돌아보면서 단순히 감동이라고 말하기엔 좀 더 진한 감정이 심장을 타고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재산을 들여 이 병원을 세운 성주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와인 경매가 바로 이 병원 건물 안뜰에서 이루어지고, 경매 수익금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쓰인다고 한다.


기념관을 나서자 꼬마 기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안내는 불어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 일본인 단체 관광객을 피해 영어 안내 칸을 타 보지만 벽돌 도로를 달리는 소음에, 시원하게 들어차는 바람 소리에 정작 설명은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유럽의 어느 도시마다 있는 성당과 시청을 지나 꼬불꼬불 골목만 심하게 누비던 기차는 어느 순간 동그란 성곽 밖으로 뛰쳐나갔다. 도로 양 옆에는 허리만큼 올라오는 어린 포도나무가 빼곡하게 심긴 포도밭이 저 멀리 능선까지 펼쳐졌다.



이제야, Beaune이 와인의 도시라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 밭들이 소위 '신의 물방울'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떼루아라는 걸까. 휴대폰을 들고 열심히 찍어보지만, 본질적으로 소 달구지만큼이나 흔들리는 꼬마기차는 인생 사진을 약속해 주지 못했다. 다만 달리는 속도에 맞춰 불어오는 포도밭의 구수한 향기들만 진하게 풍겨올 뿐. 시간 속에 갇힌 것 같은 성벽 아래에서 벗어난 포도밭의 정경들은 조금은 낯설었지만, 탁트인 시야에 금새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40분 만에 다시 시티 센터로 돌아온 기차. 주변 관광객들을 돌아보아도, 일본인 단체팀을 제외하고 동양인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나름 도시의 번화가를 따라 걸어보지만, 급하게 걷는 사람이 드물다. 대체로 유럽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느긋하게 즐기는 도시랄까. 이 미묘한 속도감의 차이가 우리에게만 느껴질까. 이 곳의 풍경 속에, 또는 여기의 사람들에게는 거꾸로 우리가 낯설어 보이는 건 아닐까 싶다.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할 무렵,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오븐에 불을 켰다. 기어이 프랑스까지 와서 현지 재료로 서울에서 즐기던 키쉬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었다. 지금까지 수십번 만들었던 레시피지만, 꼭 처음 만드는 날처럼 긴장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본고장의 식재료는 맛이 어떻게 다를지, 처음 써보는 샬롯은 무슨 맛일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스 오븐에 쓰인 숫자는 1부터 10일뿐 아예 온도가 적혀 있질 않고, 시간타이머는 보이지 않고, 설명서는 불어다. 하나부터 열까지 익숙한 여건이 하나도 없었다. 다현이가 감자와 다른 재료의 밑손질을 하는 동안, 태어나서 처음 만져보는 샬롯을 양파처럼 잘게 썰어 베이컨과 함께 볶았다. 역시 베이컨 볶는 냄새만큼은 만국 공용 일지 모른다 싶을 즈음, 속에 들어갈 야채의 기본 손질을 마쳤다. 일단 오븐 용기에 감자를 깔고, 키쉬의 속이 되는 베이컨 샬롯 볶음과 큼직한 여러 야채를 넉넉히 올린 후, 이 곳의 생크림을 넣어 만든 계란물을 가득 부었다.



숙소의 가스 오븐이 예열되는 대로 조심스레 집어넣으면 일단 완성. 계란과 크림이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가 온 주방을 가득 채울 즈음에야 겨우 마음이 놓였고, 우리의 첫번째 프렌치 키쉬가 완성되었다.


키쉬를 식히는 동안, 우리는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자리한 Cook's Atelier를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사실 'Beaune'이라는 도시를 알게 된 것도 인시즌이 시작할 무렵부터 좋아했던 이 곳 때문이었다. Cook's Atelier는 프랑스의 정서와 식문화에 반한 두 미국인 모녀가 운영하는 곳으로, 미국에서도 원래 셰프로 일했던 엄마가  중심이 되어 이 지역의 로컬 재료를 가지고 진행하는 프렌치 클래스가 유명하다. 실은 일정 때문에 이번 여름 방문에서 원데이 클래스를 놓친 것이 원통했다.(이들의 클래스는 보통 3~4개월 전에 이미 매진되는 경향이 있다.) 클래스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지금껏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 곳을 보고 싶어 이번 프랑스 여행의 목적지를 'Beaune'으로 정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가게의 큰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구리 냄비들에 넋을 놓고, 은식기들에 감탄하다가 마침 오늘의 수업을 마치고 내려온 모녀를 만날 수 있었다. 독특한 팬미팅이 즉석으로 진행되었다. 수년전부터 당신들의 요리와 사진이 좋아서 한국에서부터 보고 싶어 왔다고 전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책 위에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직접 적어 싸인을 남겨주었다. 



지역의 소규모 와이너리에서 좋은 와인만을 골라 유통한다는 이 곳에서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소개받았다. 저녁으로 식혀두었던 키쉬를 한 조각 잘라 그들이 소개해 준 와인과 함께 먹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프랑스 친구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그가 골라준 와인을 함께 마시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천천히 먹고 일어섰지만 창밖은 아직도 오후 4시 같은 하늘. 밤 10시가 되어서야 어두워지는 도시의 저녁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오후의 연속에 가깝다.



지금부터 또 무엇을 해야 할지, 낯선 여행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지방의 작은 도시 본은 대부분의 가게가 6시, 늦어도 8시면 전부 문을 닫았다. 불이 켜진 곳은 도시의 이방인들을 위한 특별한 가게들 뿐이다. 할랄 음식을 파는 식당이거나 여행자들을 위한 펍과 레스토랑 정도가 유일하다. 특히 도시 한복판 주거지역에 위치했던 숙소 주변에서는 저녁 시간엔 아예 사람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시간에 따라 조금씩 서늘해지는 바람에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들고 밤 산책을 나섰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 아래, 과거의 건물들의 지붕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면서, 윤곽은 더욱 뚜렷해지고 그림자는 길어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커다란 창을 통해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도시 속에 머무는 사람들의 흔적을 짐작하게 만들었지만, 창밖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없었다. 좁고 길게 뻗은 성벽을 따라 걷고 있노라면, 눈 앞에 고전스러운 등불이 하나씩 순차적으로 반짝이며 켜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남의 도시에서 가로등에 들어오는 불빛을 보며 박수치긴 처음이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도시의 밤은 낮에 보았던 길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분명히 길을 걷고 있었는데 눈 앞에 보이는 장면들을 흑백영화처럼 관람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이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라는 생각 끝에 도달했던 것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의 사람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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