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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Jun 14. 2019

Beaune _ identity

시간이 멈추는 도시, 그 속에 빠진 우리                  

여행경로가 정해지지 않은 여행만큼 자유로운 것은 없다.

좋게 말하면 자유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불안일 수도 있다.



자유와 불안 사이 저 너머에 밝은 프랑스의 햇빛이 비치면, 금방 낙관할 수 있다. 다 잘 될 거야 라고.


프랑스의 소도시에 방문한다는 뚜렷한 고유명사 없는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최근 벌어진 테러 때문에 리옹을 포기한 일정은 대신 부르고뉴 와인의 수도 본에서의 넉넉한 시간을 선물했다. 프랑스 와인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오늘, 어떤 도시를 마주하게 될까. 기대와 설렘이 반반 섞여 들었다.


처음 방문하는 날의 기억이란 누군가의 첫인상만큼이나 뚜렷하게 남는 법이니까.



숙소를 옮기는 날의 아침은 언제나 부산스럽다. 어젯밤까지 늘어놓고 지내던 방을 정리해 가방 안에 어떻게든 집어넣고, 심지어 그 짐을 지고 역까지 무사히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20킬로가 넘는 가방을 끌고 버스로 기차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호텔 예약 시엔 계산할 수 없었던 기막힌 행운 중 하나였다.


파리에서 Beaune이라는 도시까지는 기차로 대략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역에서 간단히 사 먹은 샌드위치가 넉넉히 소화되고 지루해서 온 몸이 뒤틀리기 직전에 역에 도착했다.



왠지 시골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시답잖은 농담을 해 가며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셋이 나란히 주차장을 통해 작은 역사를 빠져나왔다.


기차역의 역사 문을 여는 순간, 눈에 보이는 풍경이 의심스러웠다. 이 장소에 흐르고 있는 시간이 2019년이라는 사실이 이성적으로 믿기지 않았다. 



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뭐지.


꿈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유치 찬란한 중세 유럽의 시대극이었다. 불과 세 시간 전에 떠나 온 파리만 해도 수백 년 전 건물들이 수두룩한 도시가 아니던가. 하지만 고전적인 도시의 배경 때문에 현실의 시간감이 느려진다는 착각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서울이든, 런던이든, 파리든 하루를 지내는 우리의 속도감에 큰 차이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텅 빈 과거의 거리 너머에 떠도는 시원하고 축축하고 기묘한 공기 속을 일렬로 걸어 들어갔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이 텅텅 울리도록 벽돌 위를 굴러가는 캐리어 바퀴 소리만 요란한 가운데, 점점 도시의 더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눈 앞에 구글맵을 들고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길이건만, 동그란 성벽 안으로 들어설수록 박물관 속 전시장에 함부로 들어선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 골목 너머에서 갑옷 입은 기사가 말을 타고 나타나는 쪽이, 이렇게 커다란 트렁크를 질질 끌고 가는 우리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어 보였다.


다른 시공간 속에 떨어진 것만 같은 우리 이방인 세명은 잦게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그렇게 새로운 시간 속 도시의 중심 거리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에어비앤비 숙소를 찾아 들어오면서도 여전히 눈에 비치는 거리의 풍경이 실감 나지 않았다.



낯선 도시를 헤매느라 온 몸 진이 다 빠졌을까. 애써 정신을 차리자니, 배가 고팠다. 7시가 넘었는데, 점심 후에 딱히 먹은 것이 없었다. 일단 문화적 충격을 뒤로하고, 슈퍼가 문 닫기 전에 먹거리를 사야 한다는 일념으로 길을 서둘렀다. 아직도 대낮같이 훤한 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너무 큰 창고형 마트에 들어선 우리는 또 한 번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뭘 먹을 수 있을까. 빵도 한 통로 가득, 치즈와 소시지도 한 통로 가득, 피자도 냉동식품도 한 가득 온통 값싸고 좋은 식재료들이 넘쳐나건만 딱히 요리를 만들어 먹을 힘도,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일 아침 바게트에 발라먹을 치즈를 넉넉히 사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소시지와 방울토마토, 샐러드를 한 팩 샀지만, 문제는 당장 먹어야 하는 저녁식사. 으슬으슬한 기운에 조금 따뜻한 국물 같은 것을 먹고 싶었을까. 급한 대로 마트에서 만들어 파는 파에야를 사다 데워먹기로 했다. 마실 물까지 사 들고 보니 제법 양손이 무거웠지만, 빵집에 들러 남아있는 빵 한 덩이까지 집어 들고서야 숙소로 들어왔다. 이렇게 늦어진 저녁식사를 앞두고 누군가의 주방을 빌려 쓸 수 있다는 것은 에어비앤비 숙소의 가장 큰 장점인 셈. 커다란 프라이팬에 급히 사온 파에야를 올리고 불을 지폈다.




간을 맞추려고 물을 붓고, 갈릭소스를 더 넣고, 파리에서 사 두었던 콩테 치즈를 조금 갈아 올렸을까. 보글보글 국물이 졸아든 파에야는, 그날 밤 우리 모두에게 따끈하고 편안한 식사가 되었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자면 흡사 우리네 해물탕 맛이 난다고도 했다. 



그렇게 낯선 도시에서 첫날밤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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