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에서 종이접기 하는 여자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한국을 떠나 외국에 살게 될 줄도 몰랐으며 어린이 전유물로만 생각했던 종이접기로 돈을 번다는 거? (어휴, 두 손 힘차게 가로저으며) 활동적인 나와는 어울리지 않은 시나리오라 여겼다. 우연과 우연이 쌓이는 순간마다 선택을 해야 했지만 바위처럼 묵직하기보다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한번 해보지 뭐, 안됨 말고."
이런 식이었다. 그렇게 한국을 떠닌지 9년 만에 술에 물탄 듯 물에 술 탄 듯 나는 종이접기 수공예 작가로 거듭나 결혼기념일 선물이나 카드 등을 팔게 되었다. 30가지 이상의 제품 중 가장 많이 나가는 건 신랑 신부의 옷 접기다. 주문을 한 고객은 결혼사진을 보내온다. 그러면 나는 갖가지 종이를 들고 그들이 입고 있는 양복과 드레스를 비슷하게 접어낸다. 스티커, 레이스 같은 걸로 꾸민다. 완성작을 액자에 담아 배송하면 임무 수행 완료. 벌써 5년 차다. 이제 초보 딱지는 뗀 것 같다.
지금은 온라인숍을 통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팔지만 처음엔 동네 장사였다. 페이스북 마켓플레이스에 "이렇게 접어드립니다!"라고 광고를 올리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만든 건 스코틀랜드 결혼식 의상이었다. 스코틀랜드 예복은 다른 나라와 확실하게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신랑의 옷이다. 그들은 치마를 입고 결혼한다.
남자도 치마를 입는 나라 스코틀랜드. 여러분도 어디선가 들어보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실크소재로 된 샤방샤방한 디자인의 긴치마는 아니다. 도톰한 재질의 무릎길이 치미다. 처음 이 나라에 도착했을 때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서 그걸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사람을 자주 마주쳤다. 어떤 길거리 공연보다 스코틀랜드스러운 풍경에 넋을 놓고 구경하곤 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던지 주변은 늘 붐볐고 앞에 놓인 기부 모금통에 얼마간의 현금을 넣고 연주자와 사진을 찍는 이도 많았다.
킬트 입고 결혼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인 이 옷의 정식 이름은 '킬트'다. 몸을 감싼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다. 치마와 함께 양복 재킷을 입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평상복이 아니라 격식을 갖춘 옷이다. 특별한 생일파티나 번즈 나이트(민족시인 로버트 번즈의 생일) 등 다양한 행사에 킬트를 입지만 가장 대표적인 건 바로 결혼식이다. 그래서 나는 킬트를 만들어야 했다.
그것의 또 하나의 특징은 치마가 모두 체크무늬라는 점이다. 이 나라에서는 그걸 '타르탄'이라 부른다. 처음 결혼식 종이접기 선물을 만들었을 때 다른 것은 종이로 접었지만 치마 부분은 오래된 나의 체크무늬 남방을 잘라서 만들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에는 가문마다 고유한 타르탄 무니가 있다는 것을. 결혼식 때는 그 무늬로 된 킬트를 입고 하는 것이다. 아이디어를 얻어 고객이 입은 것과 똑같은 타르탄 무늬를 인터넷에서 찾아 포토샵으로 별도 편집을 해 인쇄했다. 그걸 접어 킬트를 만들었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가문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은 감사인사를 반복하며 어메이징! 원더풀! 판타스틱! 러블리! 영어로 된 좋은 표현을 내 작품에 갖다 붙였다.
모든 가문이 자기만의 타르탄 무늬가 있는 것은 아니야
가문이다 타르탄 문양이 다르다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클랜'이다. 혈통으로 구성된 가문보다 좀 더 넓은 개념이다. 클랜의 기원을 알려면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스코틀랜드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으로 나뉘어 있던 시대에 하나의 클랜은 기본적으로 같은 씨족으로 구성되긴 했지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도 클랜의 멤버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특히 척박한 땅을 두고 영토 싸움을 해야 했던 스코틀랜드의 위쪽 지역인 하일랜드와 아래쪽 지역인 로우 랜드에 클랜 문화가 발달했다. 바꿔 말해 상대적으로 살기 편했던 가운데 지역에는 클랜이 생기지 않았다. 당연히 자기 집안의 타르탄도 없다. 정확히 셀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약 200개 이상의 클랜이 이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클랜마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전통과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며 정기적인 행사도 연다.
만약 클랜에 속해 있지 않은 스코틀랜드인이라면 킬트를 입을 수 없을까? 놉! 그렇지 않다. 심지어 이 나라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킬트를 입을 수 있으며 무늬 또한 원하는 디자인으로 고를 수 있다. 새로 무늬를 만들어 등록할 수도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킬트 접는 한국 여자
다양한 집안의 타르탄 무늬를 편집하고 있노라면 마치 재단사가 된 기분이 든다. 캠벨, 뷰캐넌, 맥캔지, 더글라스 등 여러 가문의 타르탄이 어떤 색깔과 어떤 무늬인지 외우게 되었다. 나에게 주문을 하는 고객이 있다는 게 들뜨고 신기하다. 뭘 잘 만드는 편은 아닌데 아무래도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기본값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미국, 영국 그 어느 나라보다 치과 치료는 대한민국의 수준이 높다. 치과 의사들의 손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 힘이 있는 덕인지 조그만 디테일을 잘 살리는 편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킬트 접는 한국 여자라니. 마치 한국에서 한복 접는 영국 여자와 같은 격으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기도 하다. 더군다나 뭘 알고 시작한 게 아니라 하면서 알아가는 중이기에 얼렁뚱땅 어설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5년 동안 반복한 덕분에 접기 실력이 늘어가는 게 눈으로 보인다. 이제 스스로를 전문가라 인정한다.
킬트는 보통 결혼식 정장에 비해 손이 많이 간다. 바지 접기보다 치마 접기가 신경을 더 많이 써야 하고 옷에 단추도 많다. 스포란이라고 부르는 주머니도 만들어야 한다. 어깨에 걸치는 숄을 구김 없이 접으려다 망해서 다시 접은 적도 많다. 킬트는 정체성과 전통문화의 상징이다.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자부심, (클랜에 한해서는) 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들어 있다. 그들이 킬트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 허투루 접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코리아 장인은 오늘도 컴퓨터로 씨줄 날줄 뽑아내(는 기분으로) 타르탄 종이를 만들어 한 줄 두 줄 주름을 잡으며 킬트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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