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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Nov 06. 2024

너, 아직도 그대로라는 말

"어우야, 그대로다 그대로!"


한국에 머물던 24일 동안 이 말을 백번쯤 외친 것 같다. 이제 4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 20대의 나를 알아온 이들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그대로임'에 놀라고 환호했다. 진실 따윈 상관없었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우야, 내가 알던 사람 맞구나! 옛 모습 남아 있네!"


이런 뜻도 있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나를 보아온 당신, 그래서 나의 치기 어린 부끄러운 모습까지 공유하는 당신이 있어 든든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만나주어 감사합니다, 더 나이 들어서도 함께 할 것 같아 기대됩니다, 이런 마음들. 자기만 늙었다며 치는 손사례가 여러 차례 오가다가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해줬다. 


"내가 말이야. 장례식장에 갔는데 팔십 먹은 할아버님들께서 똑같은 소리를 하시더라고. 워메, 니는 참말로 하나도 안 늙었다잉. 그대로여! 그대로!"


다 함께 폭소를 터트렸다. 우리도 그렇게 되겠구나 어렴풋이 짐작했다. 




북촌 한옥 마을, 2024년 10월


10월 초에 갔다가 10월 마지막 날 비행기를 탔다. 15년 만에 맞는 한국의 가을이었다. 가기 전에는 빨갛고 노란 잎사귀들의 향연을 볼 수 있으려나 기대했다. 찬 바람이 불어야 단풍이 곱게 물들 텐데 그러기에는 날씨가 받쳐주질 않았다. 


10월에도 더웠다. 대부분 20도를 훌쩍 넘어섰다. 덥다고 투정을 부리지는 못했다. 모두들 올여름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앞다투어 성토했으니까. 떠나기 하루 전 덕수궁 돌담길 옆 가로수 색이 예쁘게 변하는 것만 겨우 감상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몰랐던 바는 아니지만 한국에는 음식점이 많다. 지역마다 먹자골목이 있다. 소, 돼지, 닭, 양은 물론이요, 주꾸미에 장어, 아구 등 굽고 볶고 찌고 때론 생으로 먹는 다양한 음식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광어와 우럭, 숭어와 농어, 해삼과 전복 등 각종 해산물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너무 맛있어서. 


기러기 부부가 되어 한국에 사는 남편은 가족이 올 때 데려가려고 맛집을 여럿 골라놓았다. 빈 말이라고는 못하는 남자가 어쩐 일인지 과장된 수사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집 돈가스를 먹어보면 여태 먹었던 돈가스가 다 거짓처럼 느껴질 걸?"


먹을 것만큼이나 예쁜 게 많은 한국에서 나는 그동안 고수해 온 미니멀리스트의 자세를 잃었다. 저건 사야 돼, 이런 건 한국 게 최고야. 영국에 비해 저렴한 가격, 그럼에도 높은 품질 등이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가방과 겨울 코트 등을 장만했다. 


딸은 큰 결심을 한 듯했다. 그동안 틱톡으로 봐오고 맘 속에 품었던 화장품을 <올리브 영>에 가서 모조리 찾아내었다. 저렴한 가격 그럼에도 높은 품질, 한국말로 들리는 K-마케팅. 한국은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나라다. 굳건하지 못한 나의 심지를 돌려 까기 하는 중이기도 하다.  


덕수궁 돌담길, 2024년 10월




카타르를 경유하여 20시간이 걸린 끝에 스코틀랜드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있는 나무는 노란 잎들을 반 이상 떨궈냈다. 잔디를 깎았다. 다음 날이 첫째 딸 생일이라 당근 케이크를 구웠다. 자동차 정기검진 예약이 잡혀 있어서 정비소에 가져다주었다. 6개월 전에 중고 시장에 의자를 하나 올려두었는데 마침 연락이 와서 냉큼 팔아버렸다. 


일상이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가을,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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