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들무지개 Feb 17. 2019

누가 스페인인을 다혈질이라고 했던가!

스페인 사회의 규범 및 시민 행동으로 본 스페인인의 특징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참 독특한 느낌을 준다. 감독 특유의 인간관이나 사회관 덕분에 등장인물들도 참 톡톡 튀는 개성을 갖는다. 그의 영화 속 대표 등장인물은 여성이나 트랜스젠더, 동성애자가 있다. 세상 담담하게 모든 악을 순화하고 포용하는 여성상이나 자신의 성 정체성이 포장 없이 묘사되는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는 알모도바르 감독의 단골이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도 막장 스토리가 주를 이루지만,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막장과는 참 다르다. 울고불고 통곡하며 "네가 그랬지? 이런 나쁜 놈아!" 소리를 지르거나 귀싸대기를 한 대 갈기는 그런 전형적인 막장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알게 되는 사건의 배경을 풀며 전개해 나가는 막장 스토리 속에서 "네가 내 아들이다", "어머니가 사실은 살아 있었다" 등의 이야기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알모도바르 영화 속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이런 막장 사건을 '대단히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누구에게도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마무리하는 특징이 있다. 


영화라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스페인에 사는 필자가 만나본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다혈질'이기보다는 유머를 잃지 않는 '제삼자의 시선'을 지닌 듯하다. 막장이 되어가려고 해도 막장이 되기 전에 모든 것을 말(수다)로 표현하고 토로하는 능력이 있어 의외로 차분하다. 그래서 절절한 한국형 막장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의 특징이 될 만한 사회적 규범 및 현상 등을 한번 다뤄보았다. 


요즘의 인류상은 전 세계인이 보편적으로 같은 흐름으로 나아간다. 그 대표적인 예가 페미니즘과 동성애, 성전환자의 인권 보호 등이다. 그래서 스페인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쾌한 스페인 사람들이지만, 그들 앞에서 조심해야 할 말들이 있다. 


1. 스페인에서는 동성애자를 테마로 농담을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동성애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데 스페인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최근 15년 사이, 스페인은 참 많이도 변했다. 동성애자를 모티브로 한 농담으로 저격하거나 비하하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 스페인은 2005년 7월 3일부터 동성애자 간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하는 분위기로 변하고 있다. 확실히 한국과는 다르다. 공립학교의 '바른 시민이 되는 교육' 과정에서도 가족을 남과 남, 남과 여, 여와 여 등의 커플이 이루어 자식을 낳거나 입양하여 이룬 사람들을 '가족의 형태'로 가르치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그런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물론, 아직도 논쟁은 진행되고 있으며, 스페인에서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호모포비아(homofobia) 집단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전 국민의 89% 가 이들의 존재를 받아들여 논쟁의 차이를 줄이고,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는 상황이다. 

농담을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이라도 요즘은 정체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농담은 많이 줄어들었다. 게이, 레즈비언과 관련된 농담은 금물! 


스페인에서 펼쳐졌던 '2007년 마드리드 게이 퍼레이드'는 법 제정 이후, 세계인의 축제로 도약하여 외국인과 정치인, 유명 연예인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는 여전히 동성애자를 범죄자로 보고 종신형에 처하거나 사형 집행까지 하는 나라가 있는데, 스페인처럼 인정하는 나라도 있으니, 인간의 그 규제와 사고의 차이는 어디에 기준을 둬야 할지 모를 일이다.  


2.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 번은 발렌시아 중앙시장에서 장을 본 일이 있었다. 시민들이 북적북적 대던 그곳에는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불법 이민자들이 유럽연합을 향해 시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이 저지하면서 그들 사이에 파고들었다. 다행히 그 경찰 무리는 시에 소속된 시 경찰이었기에 아프리카 데모꾼을 추방할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혀를 차며 경찰에게 한마디 쓴소리를 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이 자신의 인권을 주장하고 드러낼 수 있게 가만히 좀 두시오!" 


'불법 이민자 주제에 왜 저렇게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유럽 연합과 스페인 정부의 도움으로 구제 시설에서 지내면서 감사는 못 할망정,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할 법한데 스페인 시민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일반화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들을 지켜보던 시민의 관용적인 태도는 누구도 제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요즘 극우세력의 횡포로 알게 모르게 인종차별이 존재하지만 실제적으로 체감적 인종차별은 덜하다) 실제로 스페인에 살면서 본 사람들의 태도는 우리가 가진 선입견과는 아주 다르다. 문화 차이로 오는 인종 간의 작은 오해는 있지만, 혐오하고 미워하는 모습은 흔하지 않았다. 물론, 파시즘(fascismo)을 기초로 하는 민족 우월주의자들도 있지만, 이들은 스페인 시민들 사이에서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에 대한 호기심은 있지만, 이들을 거부하는 단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뒀으면 좋겠다. 가끔 그들이 무례하게 "치노?", 중국인이냐고 묻기도 하지만, 그들이 한국인을 경멸하여 치노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편하지 않을까 싶다.  


두 해 전, 바르셀로나 테러 사건이 있었다. 극단주의 테러조직인 이슬람 국가(IS)의 소행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며,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를 낸 유럽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테러범들은 스페인에서 자란 4명의 모로코 청년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스페인 사람들의 태도였다. '당장 이민자를 몰아내자!' 구호를 외칠 법도 한데, 그들은 평화적인 시위와 제스처로 필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물론, 현대 미디어는 테러라는 큰 사건에만 초점을 맞춰, 여론몰이와 정치적 행방에만 관심이 있기에, 그 후의 일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테러가 일어난 후, 카탈루냐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이민자를 추방하자는 구호보다는 평화를 외치며, 테러범을 배출할 수 있는 이맘(이슬람 성직자)의 설교 내용과 지역 모스크를 점검하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난 (너희들에게) 두려움이 없다! (No tengo miedo! no tinc por!)" 


테러범의 가족도 충격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세상 착한 아들이 그런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많은 희생자를 내고 사살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테러범의 가족은 뒤로 숨지 않고, 앞으로 나와 평화 행진을 함께 하며 죽은 이를 애도하고 희생자 가족에게 사죄했다. 누구도 그들에게 야유를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스페인 시민은 이슬람 국가의 위협이 두렵지 않다고 외치며 '이슬람 이민자들을 향한 증오'를 먼저 경계했다. 

그런데 더 놀라웠던 모습은 테러 사건으로 두 살배기 아들을 잃은 한 스페인 아빠가 한 행동이었다. 그는 자기처럼 아들을 잃은 이슬람 가족에게 슬픔을 전하고, 테러범 아버지를 포옹한 것이다! 


'자기 아들을 죽이게 한 놈의 아버지를 포옹하다니!'


처음에는 용서 못 할 것 같은 마음이 필자에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해보니, 두 아버지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생긴 똑같은 피해자였다. 그 모로코인 아버지도 아들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피붙이가 죽은 일은 두 사람에게 큰 슬픔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스페인 사람들의 관용과 유대관계가 어떤 수준인지 조용히 느낄 수 있었다. 


3. 스페인에서도 여성에 대한 말과 행동은 조심해야 한다.


한국은 법조계 성희롱 사건으로 미투 운동이 확산, 권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투 운동은 사회 전반에 걸쳐 곪고 곪은 권력 남용의 결과에서 나온 약자의 외침으로, 비단 성희롱뿐이겠는가, 파벌과 지역주의, 혈연, 지연 등으로 맺어진 권력을 향한 외침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이들이 어느 순간 괴물로 변한 현 시대상은 씁쓸하기만 하다. 


스페인에서도 여성에 대한 말과 행동이 많이 변해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스페인에서는 마초(macho)라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만 한다. 자칫하면 마초 주의(Machismo, 남성 우월주의)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아내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난 부엌을 넓혀주었소." 


라고 농담을 한다면, 재미있게 들릴 수는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부인에게 가사 일을 시킨다는 남성 중심의 농담이라 거북하기도 하다. 이런 농담이 이제는 많이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어떻게 옷을 입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지적하는 일도 줄어들고 있다. 개인의 자유이며 개인의 결정권이니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깐 말이다. 

필자가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룸메이트 친구였던 여성 변호사의 행동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인권 변호사이기도 했던 이 여성 변호사 룸메이트는 직장 일을 마치고 오면 소파에 푹 쳐져 쉬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매번 다리를 쩍 벌리고 볼썽사납게 앉아 있는 것이다. 방문객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여자가 세련되지 못하게 왜 이렇게 쩍 벌리고 앉아있지?"

하지만, 친구의 말은 나에게 새로운 여성관을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왜, 여자들에게 남자들이 보는 시선으로 말하는 거니? 나는 충분히 쉴 자격이 있고, 내 몸이 어떤 상태인지 인지하고 있어.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여성관은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해야 한다지만, 왜 그래야 하는 거지? 다리를 붙이고 불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과연 좋은 모습일까?"

그때 나는 여성관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시기였는데, 친구의 말 한마디에 크게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모습은 남성 못지않게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인격적이었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성은 깨지며, 남성과 동등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한 번은 노동 현장에서 본 스페인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성과 똑같이 삽을 가지고 노동을 하고, 시멘트를 개고, 돌을 나르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스페인 여자들이 참 당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왜 이들이 치장하지 않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스페인의 양성평등이 공평하게 이루어졌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통계상으로 봤을 때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 평균에서 뒤처져 있다. 하지만, 정부에서 양성평등을 목적으로 법을 제정하여 여성 인력이 사회와 가정에 평등한 위치에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칭찬할 일이다. 이런 노력의 덕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스페인 시민들의 여성관도 상당히 많이 변했다. 

스페인 직장에서도 여성을 동등한 비율로 기용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요즘은 여성 인력의 대우가 개선되고 있는 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농담도 좋아하고 개방적이다. 길을 잃었을 때 목적지까지 자세하게 알려주는 다정함도 지녔으며,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는 주저함 없이 다가와 도와주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과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성향을 지녔는데, 이런 유쾌한 친절에 가려, 의외로 담담한 이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논란과 논쟁으로 누구보다도 목소리 높여 싸우듯 대화하는 이들이지만, 내심 자신이 얽힌 사건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묘사하는 힘도 지니고 있다. 큰 암에 걸려 내일 당장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드라마적으로 감정을 토로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그 인생을 묘사하는 부분은 정신적인 어떤 경지까지 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잘 모르는 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하고, 함께 살며 공존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스페인이다. 스페인이 오랜 역사에서 배운 교훈이 아닐까 싶다. 이베리아 반도의 특성상 많은 문화가 교차하는 특징 때문에 이들도 문화를 융합, 흡수하는 법을 이미 터득해 이런 태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온 이 필자가 스페인 사회에서 이방인이 아니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곳 사람들이 차별을 두지 않고 나를 존중해준 바탕이 아니었을까 싶다. 


* 글쓴이 산들무지개는 블로그 하늘 산책길, 그곳에서 꿈을 꾸다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해발 1200m의 스페인 고산 평야에 보금자리를 두고 스페인 생활과 문화, 음식, 여행 등에 대해 글과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고요, 자연 친화적이고도 이국적인 스페인 전원생활을 다룬 [우리 가족, 숲에서 살기로 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체를 알면 놀라는 스페인 음식 몇 가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