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는 양말을 신는 것조차 힘들고, 사실 가벼운 운동화를 신더라도 달라붙는 느낌 때문에 맨발로 걷고 싶을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럴 때 신는 신발이 다름 아닌 슬리퍼와 샌들이다. 물론 여름에 샌들이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다. 안전화를 착용해야 하는 직종을 제외하더라도, 구두나 지정된 신발을 신어야 하는 직종은 이런 샌들을 신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더위 속에서 꼭 구두를 신어야 하는 것일까? 꼭 그렇진 않다. 답은 언제나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다룰 이야기의 주인공은 샌들을 비롯한 여름 신발 친구들이다. 모두를 다루면 좋겠지만 워낙 많은 신발의 종류를 한 글에 다 다루기엔 힘드니, 여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신발인 샌들의 유래와 더불어서 여름에 신기 좋은 3가지 트렌드 제품, 피셔맨 샌들/뮬(블로퍼)/바부슈를 다룰 예정이다. 이번 글은 신발에 대한 역사로 더 깊게 들어가니 어찌 보면 옷을 입는 것에 대한 설명보단 패션사로 보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샌들은 모든 신발의 시초이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신발, 샌들은 무려 10,000년 전부터 신어온 신발이다. 탄소연대측정이 아닌 기록된 역사상으로 가장 오래된 '샌들'의 경우 기원전 36세기의 이집트의 성직자들이 종교적 행사를 위해 신었던 파피루스 샌들이 있을 정도로 샌들은 사람들과 오랜 기간 함께해왔다.
파피루스로 만든 이집트의 샌들. (출처: Quora)
샌들 하면 떠오르는 국가, 고대의 그리스/로마에서는 이 '샌들'을 착용하는 것이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경우엔 노예가 아닌 '자유시민'만 샌들을 착용할 수 있었는데, 신발을 신었다는 건 이 사람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시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적인 것이었다. 또 직업에 따라 이 샌들이 달라지곤 했는데, 희극인이나 철학자들이 식물성 재료 들로 만들어진 샌들을 신었던 것과는 다르게 군인, 사냥꾼 혹은 높은 지위의 사람의 경우 가죽으로 만들어지고 코르크까지 들어간 샌들을 신었다.
로마의 경우엔 노예/시민 모두가 이 가죽 샌들을 신을 수 있었지만, 사람의 지위에 따라 샌들의 디테일이 달라지곤 했다. 그리스의 직업에 따른 신발의 디테일 변경이 아닌 직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신발이 달라진다고 보면 되는데,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높은 직위의 사람들은 화려하고 얇은 밑창을 지닌 샌들을, 낮은 직위의 사람들은 단순하고 튼튼한 밑창을 지닌 샌들을 신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샌들(출처: World4eu, "Roman Costume and Fashion History in Antiquity")
그리스/로마 시절에는 거의 모든 신발이(심지어 군화도) 이런 샌들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물론 이 이후에도 샌들은 한동안 많은 초기 유럽의 사람들이 애용했고, 특히나 더운 남부/지중해 근방의 국가들의 거주자들은 계속 샌들을 착용하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적으로 기록된 인류의 중요 무대가 남부/지중해에서 서유럽으로 옮겨짐에 따라 이후 유럽에서 샌들의 위치는 신화의 한 장면을 표현한 그림에나 나올 정도였다.
다시금 신화적 인물의 발에서 일반인의 발로 샌들이 돌아오게 된 것은 19세기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18세기 프랑스혁명이 끝난 후에 계몽주의의 불이 퍼져나갈 무렵, 인간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던 그리스/로마의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당시의 제작자들은 이 시대의 '샌들'에서 감명을 받아 여성의 발목 위까지 열십자로 묶는 신발을 제작했다. 물론 그리스/로마 시절의 샌들과는 다른 모습이지만(발가락이 노출되지 않는 일종의 발레 슈즈와 비슷했다), 이 신발을 '샌들-슬리퍼'라 부르며 다시금 패션의 역사에 샌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후 샌들은 1920년도까지 수영장, 해변가 혹은 욕실 같은 한정된 장소를 위한 제품으로 머물렀다.
끈으로 올라오는 부츠 형태의 두 가지 제품
샌들이 여성 패션의 한 자리를 꿰차게 된 것은 1930년도의 미국에서부터 시작된다. 여름 밤늦게까지 파티를 즐기던 미국의 여성들, 속칭 플래퍼(Flapper)들은 이브닝드레스에 답답한 구두 대신 여름의 바람이 조금씩 들어오게 만들어진 샌들을 착용하면서 여성 패션, 여성 신발의 중요한 위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30년도에 플래퍼 여성이 여름에 신었던 구두. (출처: Boston MFA)
플래퍼들의 샌들 사랑에 이어서 이러한 샌들의 인기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캐주얼과 클래식을 넘나들며 식을 줄 몰랐다. 여름에 덥게 발등을 모두 가리고 발을 조여왔던 가죽 신발에서 발등을 내놓고 간편하게 가죽 끈으로만 묶여있는 구두는 더운 여름의 낮이나 밤에도 시원하게 신을 수 있었기 때문. 이런 와중에, 60년대의 기존의 룰을 타파하고자 하는 히피 문화가 들어서면서 샌들 제작에 고무 등의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다양한 스타일로 제작이 가능하게 되자 샌들은 더 폭발적으로 소비되었다. 또한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패션계에서도 성별의 구분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남성 여성의 구분 없이 이쁘거나 멋진 제품이면 모두가 착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장벽을 허문 히피 문화의 흥행 이후 스포츠 샌들(1990년도)과 하바냐스, 핏플랍 등이 등장하며 현대의 샌들과 슬리퍼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클래식한 멋의 샌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피셔맨(Fisherman Sandal)'
스포츠 샌들, 쪼리와 슬리퍼는 등장 이후부터 이제 여름엔 없어선 안될 제품이 되었다. 편하고 가볍다는 장점도 장점이지만, 장마라는 우기가 버티고 있는 한국의 여름엔 물에 강한 제품들이 살아 남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해당 제품들이 갖고 있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사실 예의를 갖춰야 하는 곳의 분위기를 버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샌들을 포기할 수 없는 당신에게 추천하는 모델이 있으니, 다름 아닌 '피셔맨 샌들(Fisherman Sandal)'이다.
남성용 피셔맨 샌들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 (출처: BESTSELLER)
왜 이름이 피셔맨이 되었는지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물이 잘 빠져나가게 만들어져서 그렇다는 것도 있고, 단순히 어부들이 자주 신어서 그랬다는 썰도 있으니까. 유래야 어쨌든, 이 피셔맨 샌들은 본래 편하게 그리고 작업 시에 착용하기 위해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클래식한 외형보단 락포트, 머렐 등 착용자의 발의 편의에 맞춰진 스포츠/아웃도어 샌들이 유명했다. 하지만 르메르(Lemaire)부터, 영국의 유명 구두 브랜드 처치스를 지나 한국의 수제화까지 올여름, 클래식하게 가죽으로 제작된 피셔맨 샌들의 위치가 확 올라왔다.
좌측은 르메르의 피셔맨 샌들, 우측은 처치스의 피셔맨 샌들(출처: Lyst, Yoox)
단순히 이번 여름 유행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벼움을 피하고 무게감 있는 느낌을 주는 여름의 신발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피셔맨을 추천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앞 코가 막혀있는' 그 특유의 디자인 때문이다. 피셔맨처럼 비슷하게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아온 '글래디에이터' 형식의 샌들을 보게 되면 기본적으로 앞코가 트여 있지만 피셔맨은 그렇지 않다(물론 몇몇 디자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대부분의 피셔맨은 앞코가 모두 가리고 있다.) 쉽게 말해 앞코가 발가락을 가리느냐 가리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좌측이 글래디에이터, 우측이 피셔맨. (출처: NYLON)
물론 문화의 차이가 있는 서구 사회에서는 다를 수 있다, 같은 복식이라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복식에 대한 문화와 통념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스웨이드는 비에 신으면 안 된다던가 결혼식에 흰색을 입으면 안 된다는 통념들) 그렇기에 맨살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예를 갖추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의 유교적 문화에 따른 예의범절이라 하더라도, 이 작은 앞코의 유무에 따라서 착용자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가벼워지는지 혹은 단정 해질지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보통의 샌들이 아닌 가죽으로 제작된 클래식한 피셔맨을 추천하는 이유는 사실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피셔맨 샌들은 당신이 비즈니스 캐주얼 형식의 옷을 입었더라도 어울리는 샌들이 된다는 것. 무더운 여름에 스포츠 샌들, 핏플랍이나 토앤토도 좋지만 도저히 못 참을 정도의 더위에서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는다면 피셔맨 샌들은 어떨까?
처치스의 피셔맨 샌들과 티셔츠 셋업. (출처: Lyst)
앞은 구두, 뒤는 슬리퍼. '뮬(Mule)'
2010년도 중반, 구찌는 17세기 실내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유행을 선도했었다. 그 제품이 다름 아닌 '뮬'
이젠 모두가 아는 구찌의 프린스타운 뮬
우리에겐 블로퍼로 익숙한 이 신발은 고대 로마 집정관의 신발인 Mulles Calceus에서 유래된 신발로, 16세기부터 성별을 가릴 것 없이 귀족들이 실내에서 착용하던 제품이었다. 간단하게 보자면 현재의 룸 슈즈인 슬리퍼의 위치였던 것.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서양, 특히나 비포장 도로가 많아 밖에서 진창을 밟고 더러워지기 쉬운 유럽에서 신발을 신고 들어가기 싫었던 귀족들이 실내에서 신기 위한 신발로 개발된 것이 다름 아닌 이 '뮬'이었다.
Metropolitan 박물관에 전시된 17세기의 뮬. 실내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다 할 정해진 모양 혹은 패턴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집에서 신는 슬리퍼니까. 하지만 1694년도에 올로네(현재 남쪽 프랑스 Les Sables-d'Olonne) 백작 부인이 드레스에 이 뮬을 신고 사교회에 등장하게 된 이후, 당대 최고의 패셔니스타인 폼파두르 부인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뮬을 신고 등장하며 뮬은 당시 패션의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분이 백작부인. (출처: Wikipedia)
물론 이후에 뮬이 계속 패션 아이템으로 소비된 것은 아니다. 지디가 라이언 슬리퍼 신고 패션위크 걸어도 한 2년 후엔 라이언 슬리퍼는 집 앞 편의점 가는데 신는 아이템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18세기를 지나 2016년, 2017년에 다시 떠오르기 전까진 뮬은 집에서 신는 슬리퍼에 멈춰있었다. 심지어 잘 벗겨지는 특성과 침실을 연상하게 만드는 이미지 덕분에 약간의 에로티시즘이 가미되기도 했다. 프라고나르의 '그네'나 마네의 '올랭피아' 그리고 1949년도 홀스트의 보그 화보 주인공들이 이 뮬을 신고 있는 것처럼.
좌측부터 프라고나르의 그네, 마네의 올랭피아 그리고 독일계 패션 사진작가 홀스트의 보그 화보
구찌의 프린스타운 뮬이 등장하고 패션 아이템이 된 지금은 이런 에로티시즘과는 거리가 좀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블로퍼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진 뒤로, 실내화의 이미지보단 로퍼의 이미지를 조금 더 많이 갖고 있기 때문. (블로퍼라는 이름이 Backless loafer를 줄인 B-loafer에서 왔다는 썰이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카더라.) 샌들을 신을 수 없는 당신에게 이 블로퍼를 추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퍼의 앞코와 슬리퍼의 뒤축은 샌들 혹은 슬리퍼와 비교해서 단정해 보이는 것은 맞으니까. 다만 대부분의 블로퍼의 경우 슬랙스처럼 가벼운 느낌 바지 혹은 옷들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점을 기억해둘 것.
이렇게
그렇기 때문에 생지 데님 혹은 두꺼운 면으로 제작된 와이드 팬츠와 입을 경우 전체적으로 어색해 보일 수 있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블로퍼를 신는다면(가을에 신더라도) 최대한 가벼운 느낌의 바지인 슬랙스 혹은 면바지를 입도록 하자.
구겨 신으세요, 그래도 괜찮으니까요. '바부슈(Babouche)'
1960년도의 입생로랑은 모로코의 마라케시라는 도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를 자주 왕래했다. 그는 여기서 지내면서 모로코의 전통 신발을 애용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바부슈다.
모로코 전통 바부슈 (출처: Riadzituon)
불어로 슬리퍼를 뜻하는 바부슈는 뒤축을 일부러 구겨 신을 수 있게 따로 제단선까지 있는 앞코가 길쭉한 모로코의 전통 실내화다. 17세기 프랑스 왕의 가신들과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 입생로랑의 사랑을 받은 이 모로코 전통 실내화는 셀린느의 디자이너 피비 필로(현 자체 브랜드 피비 필로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에 의해서 패션계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셀린느의 16년도 컬렉션 중 하나인 V넥 바부슈. (출처: Sandracloset)
입생로랑의 모로코 사랑에서 시작된 바부슈는 셀린느를 거쳐 자연스럽게 여성 제화에서 남성 제화로도 넘어왔고, 새로운 제품을 상대적으로 보다 빠르게 기획하고 제작해 내는 국내의 수제화 브랜드들이 이를 적극 수용하며 해당 스타일의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이 어딘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2017년도 봄에 손 신발에서 제작하며 이후 국내에서도 이 모델이 자주 등장했다.)
국내에서 가장 먼저 2017년도에 제품을 선보인 손신발의 Babouche 4012-01(출처: 손신발)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7년 이후 바부슈 스타일의 로퍼 혹은 블로퍼를 만드는 제화 브랜드는 많이 없다. 위에서 언급한 블로퍼/뮬과는 다르게 완벽한 로퍼의 모습에서 필요에 따라 뒤축을 접을 수 있다는 상대적인 강점이 있지만, 블로퍼보다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아무래도 현재 구두를 주로 신는 위치의 사람들에게 구두의 뒤축을 구겨신는다는 아이디어가 아직까지 어색한 것이 가장 크기 때문.
그래도 이렇게 구하기 어려운 제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애매함을 이용하기 위해서다.(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로맨틱무브나 손신발에서 버젓이 팔고 있으니까.) 여름용 구두라고 떠올리면 대부분 로퍼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끈이 없는 로퍼의 특성상 착용 후 익숙해지기 전까지 발이 답답할 수밖에 없다. 또 이 답답함이 습한 한국의 여름을 만날 경우 '발등은 아픈데, 가죽의 끈적함 까지 느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바부슈의 경우 뒤축을 접어 신는다면 발등이 아플 때까지 꽉 쪼이 지도 않을 것이고 답답한 습기는 가끔씩 쉽게 벗어던지면서 해결이 가능하다. 물론, 뒤축을 접지 않으면 단순한 로퍼이기 때문에 슬리퍼처럼 신고 있다가 필요의 경우 로퍼처럼 신을 수 있고, 또 뒤축이 없는 제품들과는 다르게 사계절 모두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