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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편소설 쓰는 남자 Jun 28. 2021

깊디깊은 겨우살이의 꿈

간편소설 스물여섯

눈 빛깔이 죽이지 않냐? 번쩍번쩍한 게 무슨 은가루 같애.
김 병장님, 이건 진짜 은가루지 말입니다.

푸슬푸슬 내리는 가루눈들은 박 일병의 말처럼 레알 실버, 은가루였다. 부대원들 모두가 눈치를 챘는지 텐트를 치다 말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때 지프차 한 대가 맹렬히 달려왔다. 지프차에서 내린 대대장이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다들 고생이 많다. 하늘도 너희들의 노고를 포상하겠다고 귀한 은가루를 막 뿌리고 있다. 어서 퍼 담아라.

대대장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부대원들은 주머니랑 헬멧이랑 반합이랑 배낭은 물론이고 신고 있던 군화까지 벗어서 은가루를 퍼 담았다. 그렇게 열을 내고 있는데, 번쩍거리는 은가루를 둘러쓴 박 일병이 소리쳤다.


기상하십시오. 폭설로 30분 조기 기상입니다.

쏟아지는 불빛. 내무반 천장이 보였다. 끙끙대고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가 보니 사방이 캄캄하고 바닥만 하얗게 떠 있었다. 위병소 바깥 진입로부터 연병장까지 넉가래로 밀고 삽으로 뜨고 빗자루로 쓸어서 눈을 치우는 동안에 날이 훤해졌다.


뜻밖의 물건이 눈에 띈 건 탄약고 주변을 비질할 때였다. 노랗게 반짝이는 것이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안쪽에 ‘K♡S’라 새겨진, 입대할 때 S랑 나눠 낀 커플링이었다. 이게 여기서 왜 나와? 의아한 가운데, S는 어찌 지내는지 새삼스런 궁금증이 덩달아 튀어 올랐다. 주말이라 행정반에서 일찍 돌려받은 휴대폰을 만지작대며, 1년 전에 헤어진 여자한테 문자를 하느냐 마느냐로 고심하는데, 행정반 요원이 어깨를 흔들었다.


김 병장님, 빨리 일어나세요. 애인 면회 왔어요.

잠이 확 달아났다. 뻥을 좀 가미해서 사채업자가 면회를 와도 반가울 텐데 애인이라니? 더구나 나도 모르는 애인이? 궁금하고 설레는 맘으로 면회실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S였다. 외박 신고 후에 S가 모는 빨간 스포츠카에 올라타면서 꿈 얘기를 들려주었다. 공교롭게 면회를 와서 넘 신기하다고, 예지몽을 꾼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S가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넌 이게 진짜라고 생각하니?

장난기라곤 1도 없는 얼굴을 보면서 의아해하다가 “김 병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박 일병이었다. 위병소 근무 교대할 시간이라고 했다. 복장을 챙겨 박 일병과 함께 위병소로 갔다. 외진데다 추워서인지 차량이나 사람의 출입은 거의 없었다.


위병소 안에서 난로를 쬐는데, 박 일병이 량의 접근을 알렸다. 과연 차 한 대가 진입로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다. 근데 빨간 스포츠카였다. 이 또한 꿈인가 싶어 난감한 기분으로 이마를 긁었다. 식은땀이 손톱 밑으로 끈적하게 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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