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각자에게 어떤 이미지가 곧바로 재생되는지 궁금하다. 질풍노도의 반항적인 시기로 기억될지, 지독하게 짝사랑을 하던 순간이 떠오를지, 아니면 지독하게 공부하던 때일지. 사춘기의 사전적 정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어가는 시기’다. 그런데 내 경우엔, ‘그게 나한테도 있던 시기인가?’ 하는 의문이 먼저 떠오른다. 흔히들 겪는다는 사춘기 시절이 나에겐 무엇이었을까.
나는 나의 사춘기가 있긴 있었는지, 있었다면 대체 무엇이었을지 간헐적으로 생각해보곤 했다. 그리고 꽤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그 시절 나의 사춘기는 책으로 파고든 활자 안에서 유영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놀랍게도 어린 15살의 나는 에쿠니 가오리 작가의 책을 도서관에서 모두 빌려보았다.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중학교 때 도서관의 전경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더 최근인 고등학교 도서관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결론적으로는 에쿠니 가오리의 문장을 들이킨 15살이었다. 돌이켜보면 이게 사춘기였던 것 같다.
그 무렵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던 기억도 난다. “내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몰라서 너무 혼란스럽다.” 실수로 비싼 MMS 문자를 전송하지 않기 위해, 나의 이 혼란함을 80자 안으로 꾹꾹 눌러 보냈다. 곧바로 친구가 답했다. “나도 그럴 때가 있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정 부분 위안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방 안에 혼자 있을 때면 방바닥 구석에 모로 누워 내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기원을 찾고 싶어 했다. 눈을 감으면 뇌가 통째로 머리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이 났고, 머릿 속이 포그로 가득찬 기분을 느꼈다.그 무렵의 나는 생각의 기원과 내가 살아있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찾고 싶어 했다.
그래서 퍼즐을 맞춰보건대, 에쿠니 가오리의 허무함이 안개를 헤치고 마음속으로 들어왔던 것 같다. 그걸 정말 내가 이해하면서 읽었을까?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중학생이 읽어도 되는 건 맞았을까? 당시 발간된 그 작가의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좌안, 우안 같은 책은 꽤 길고 두꺼웠는데 그땐 어쩐지 두꺼운 책을 더 잘 보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의 묵직함은 손끝에 남아있다.
이후 고등학교에 들어서며 소설과는 잠시 권태기를 겪었다. 참고서에 등장할 문학과 어리둥절한 비문학 지문, 그리고 모든 단어와 문장이 뜯어져 보이는 논술의 세계로 들어가며 소설책은 더 이상 내 책가방에 들어오지 못했다. 특히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시 지원을 위해 긴 시간 논술과 부둥켜안고 있어 소설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시로 대학을 갔다) 모든 어절이 뜯어져 검사를 당하는 논술형 글쓰기와 답을 찾는 문학 덕분에 글이란 것이 그저 점수를 위한 읽기 행위였다. 나의 소설 연대기를 생각해 본다면 단연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대학교 3학년, 큰마음을 먹고 소설 창작 수업을 들었다. 단편 문학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다. 성인이 된 이후엔 어쩐지 반 하루키 감정이 커져 일본 문학에 대한 의구심, 나아가 ‘번역된 문학’에 대한 회의감이 커져 작가가 한글로 쓴 그 문장만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싶어 한국 장편 소설만 읽었다. 그런데 창작 수업에서 만나게 된 단편 문학들은 또 다른 지평의 장이었다. 2-30분 남짓한 독서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문학의 맛이 대단했다.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마음대로 문장을 구사해도 되는 소설 창작에 매료되어 그 어떤 수업보다 성실히 들었다. 매주 3~4편에 달하는 감상문을 써서 제출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꽤 열심히 감상문을 썼다.
그리고 나 역시도 단편 소설을 썼다. <- 이 문장을 쓰고 나니 어쩐지 머쓱하다. 첫 창작 소설은 너무 부끄러워서 인터넷 세상 어딘가에 데이터로만 잠자고 있다. 소설 수업 성적은 모두 A를 받았으나… 그뿐이다. 영원히 공개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마지막 학기에도 소설 창작 심화를 들었다. 교수님까지 둘러앉아 매주 합평을 하고 구체적인 감상문을 써 주었다. (두 학기에 수업을 들었던 교수님들은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시다. 왠지 모르게 서점을 지나다 이름이 보이면 너무 반가워 사게 된다.) 문학 창작을 전공하는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이방인으로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절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소재와 문체들을 읽고 있으면 그들의 대단한 재능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홀로 책상에 앉아 ‘지금 이 학생들이 나중에 등단한다면 대단한 인연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식을 모르면, 부동산을 모르면, 부의 추월차선을 모르면, 힘들어도 괜찮다고 그대로 살아가라 부르짖는 세상 안에서 아직도 오직 소설에만 마음 한쪽을 주게 된다. 경험해 보지 못한 누군가의 삶에서 나의 삶을 톺아보는 순간들은 소설을 읽을 때만 오기 때문이다. 때로는 벅찬 문장이 삶으로 들어오고, 내가 뱉지 못한 말들을 마주치는 순간. 삶에 있어 좋은 자양분이 되는 순간들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니 마치 내가 대단한 다독가 같지만… 실상은 한 달에 한 권 읽기도 벅찬 현대인1인 점을 뒤늦게 밝힌다. 그러니 이 글은 나의 소설 연대기임과 동시에 0과 1 사이에서 벗어나 활자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밝히는 글이다.
나의 저녁이 낙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