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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 Oct 03. 2016

다시 신입생이 되더라도, 다시 했을 세 가지

재밌어 보였고, 멋있어 보였고, 확인하고 싶었다. 이게 내 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후회한다'는 말이다. 취업을 앞둔 사람들, 혹은 슬슬 준비할 때가 된 사람들과 있다보면 '아, 이것 좀 할걸' 혹은 '이 전공 선택한게 제일 후회돼'하는 말을 제법 많이 듣는다. 간간히 웃고, 대충 맞장구를 쳐 주다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면 적나라하게 쓰여있는 내 이력들이 보인다. 지난 대학 4년 간, 무슨 생각을 가지고 뭘 하고 살았나 고스란히 쓰여있었다. 하도 '후회한다'는 말을 들은 탓일까. 나 자신에게도 물음표가 스멀스멀 떠올랐다. 나는 신입생이 된다면, 어떻게 살까. 





하고 싶었고, 재밌었으니까.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어.


동기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 중 가장 ‘의외’인 것은 아마 내가 춤을 추는 것일 거다. 동아리 페어가 열리던 3월, 동기들 몇 몇이 어느 동아리에 들지 이래저래 재고 있을 때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댄스 동아리의 들었다. ‘네가 춤을?’ 했지만 그저 어깨 한번 으쓱거리고 말았다. '내가 하고 싶다는데, 무슨 상관이람!' 하고. 모두가 의아해 했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댄스 동아리에 신입생 열정을 쏟아 부었다. 봄 축제가 다가올 수록 나는 연습실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종종 연습 때문에 밤을 새기도 했다. 땀과 열로 거울을 하얗게 덮었고, 동아리 부원들과 살을 부대끼며 서로 춤을 가르치고, 연습하는 것은 어떤 것 보다 재밌었다. 늦은 밤, 연습실 바닥에서 먹는 치킨, 자장면은 어느 것 보다도 제일 맛있었다. 





 축제 무대에서 내가 춤 추는 모습을 처음 봤다. 아직도 동기들의 반응을 잊을 수가 없다. “와, 니가 이렇게 춤을 출 진 몰랐다.”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겠지만 동기들이꽤나 충격을 받았었던 것 같다.

동기가 내 무대 영상을SNS에 올렸고, 중고등학교 동창들도 그 영상을 봤다. 얼마 후 본가에 내려가 오랜만에한 동창을 만났다. 춤 추는 영상을 봤다며 알은 척을 했다. 


“난 누나가 댄스동아리 들어서 놀랐어. 누나는토론 동아리 같은거 할 줄 알았거든. 이젠 동아리도 스펙인데, 댄스라니. 별로 도움 안되지 않아?” 


사실 이 질문에 대답을 할 가치도 못 느꼈지만, 너무순진하게 물어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특별한 이유 있나? 춤 추는게 재밌고, 춤 추는 것 좋아하고, 춤 추고 싶었으니까 했지.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신입생 대학생활을 채웠던 동아리 활동은 온전히 좋아해서, 그냥 하고 싶어서, 재밌어서 했다. 신입생 때 만큼 하고 싶은 것 마음 껏 할 수 있는 때도 없다는 것을 일찍 알았던 덕일까. 그런 황금같은 자유에 눈이멀어 스펙이니 뭐니 따질 생각도 못했다. 아니, 생각이 있었더라도 고민 기준조차 되지 않았을 것 같다. 아직도 나는 잊을 수 없다. 화려한 조명이 비춘 무대 위엔 관객의 함성 조차 들리지 않았고, 오로지 쿵쾅쿵쾅 뛰어대는 내 심장소리만 들렸다. 한 번의 실수 없이 공연을 마쳤을 때 온몸을 휘감는 희열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 희열, 그 맛을 알았기에 동아리 활동을 그만 둔 이후에 다른 것들에 도전했을 때도 누구보다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었다. 


함께 무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 많은 갈등들. 더 멋진 안무를 고민하고, 더 나은 곡을 고르는 것, 연습을 잘 안하는 부원을 다독이며 연습에 참여시키고, 마음만큼 빠르게 늘지 않는 실력에 우울하던 것까지. 이 과정들 속에서 정말 내가 느낀 것이 재미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다만, 그것을 노리고 동아리에 가입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정말 재밌을 것 같아서. 한 번쯤 제일 멋있는 무대 한 가운데에 서서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어서. 그 기분을 알아야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금도 신입생들이 내게 '선배, 대학생활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어요.'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앞뒤 안 재고, 그냥 재밌는 것 하나만 보고 모든 시간을 다 쏟아 부을 수 있는 것 해봐. 동아리 같은 거.'

앞뒤 안 잰다는 것. 그것이 내겐 춤이었다. 얼마나 멋있는가. 누군가 앞에서 간드러지게 출 수 있는 춤 하나 쯤 있다는 것이. 물론 하나 뿐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말하는데, 진짜 '멋있어지고 싶어서' 한거야.


1학년을 채운 대학생활이 동아리였다면, 2학년을채운 대학생활은 기자활동이었다. 글을 통해 몇 번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나는 대학 미디어홍보언론사에서 취재기자로 약 1년 반 동안 활동했다. 이 또한 글을 통해 몇 번 밝힌 이야기지만, 나는 ‘글을 잘 쓰는게 섹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나 또한 섹시해지거나 멋있어지기 위해 글 쓰기를 배웠다. 그 시작이 취재기자 활동이었다. 


요즘 후배들을 만나면 대외활동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 또한 대외활동을 많이 해 본 편이 아닌데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하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니는 기자 하고 싶어서 기자 활동 하셨던 거에요?”하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듣곤 한다. 그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멋을 담아 웃으며 말한다. 


“아니. 멋있어지려고. 글 잘쓰는 남자가 그렇게 섹시하더라고.”


 활동했던 뉴스팀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여느 대학교에있는 학보지와는 조금 다르다. 대학 홈페이지 메인화면 하단에 게시되는 '홍보 기사'를 다루는 곳이었고, 이에 취재하는 내용과 기사를 써내려가는 방식도 일반 학보사와는 다르다. 오로지 홍보를 위한 곳이었다. '진짜 언론'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어느 학생조직보다 프로페셔널했다. 이 뉴스팀을 담당하시는 분은 메이저 신문사 특파원 출신이셨고, 편집장과 구성 기자들은 대학 내 존재하는 여러 언론사 편집장 출신이거나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었다. 언론인이 되기 위한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글쓰기 하나 배우러 들어간 내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 자체가 매우 감사했다. 도무지 대학생의 실력이라고 볼 수 없는 선임기자들의 기사를 보며 눈이 휘둥그래졌고, 그에 비해 한 없이 볼품없는 내 기사가 창피했다. 


원래 이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도저히 학업과 병행할 수 없는 살인적인 스케줄. 매주 취재와 회의, 기사 수정작업과 새 기사 작성. 거기에 매일 난도질 당하는 피드백과 나날이 떨어지는 자신감.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 둘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텼다. 여기서 그만 두면, 아무 것도 못 할 것 같아서. 

멋있어지기는 커녕, 힘든 것 못 버티고 제 발로 걸어나온 꼴이 정말 찌질할 것 같았다. 사실 이를 다 지켜보는 남자친구에게 자존심 상하는 꼴을 보이기 싫기도 했다. 당시 (현)남자친구는 사진취재팀 팀장이었는데, 사진 찍는 실력이 매우 우수해 대학 홈페이지 메인화면 촬영을 도맡아 했고, 한 번 촬영을 갔다 하면 단과대학에서 홍보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대학생 신분에 대사관 행사 사진기자로 스카웃되고, 거기서 또 사진을 얼마나 기똥차게 찍었는지 행사만 되면 또 사진을 요청해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어디 가서 글 좀 써달라는 요청을 받지 못해도, 적어도 기사 피드백 회의에서 '잘 썼다'는 소리 한 열 번쯤은 받고 나와야 그만두더라도 '못 버텨서 그만 뒀다'는 소리는 안 들을 것 같았다.


정말 울면서 버텼다. 오만 생각 다하며 스스로 위로하며 버텼다. 그렇게 1년 반을 취재기자로 활동하며 100여편의 기사를 완성하고 15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나 스스로 독기나 오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만큼 버틸 정도의 독기는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약학대학 학장님을 인터뷰라는 모습. 활동 기간 중 가장 만족스런 취재와 기사였다. 




버티며 배운 것이 정말 많았다. 글을 기획한다는 것의 의미. 기획 의도 아래 적합한 취재 방법을 찾아가는 것, 가독성이 높은 문장과 구성을 고민하고 뻔하게 흘러갈 인터뷰를 뒤집는 '신의 한 수' 같은 질문을 만드는 것.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사진 배치와 레이아웃, 캡션까지. 물론 사진기자의 촬영과 디자인기자의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지만 기획부터 취재, 작성과 디자인 작업까지 '글'이라는 것 하나를 통째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시키는 훈련을 했다. 


이것들은 비단 글쓰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 낼 수 있는지 찾아내는 체계적인 고민의 과정이 됐고, 보고서를 쓸 때 누구보다 간결하고 가독성 좋은 문장을 만들어 냈다. 수업 중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기획 의도나 목표, 결론을 전달하는 것 하나 만큼은 또래보다 명확하게 해낼 수 있었고, 레포트를 쓰거나 소논문을 쓸 때 구성이나 연결성, 논리성 같은 것들에 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를 악 물고 버틴 결과였다. 멋있어지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 사람이 어떤 '실력'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말 아주 천천히,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느끼고, 그것을 버티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깨달음을 얻은 것이 기자활동이었다. 


이런 것들을 배울 줄을 미리 알고 하게 된 활동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 나는 글을 잘 쓰고 싶어서 시작했던 것이었다. 만약 이렇게 살인적이고 힘들 줄을 알았더라면 시작도 안했을거다. 





스펙이 아니라 '테스트'였어. 오로지 그거 하나였어. 


“한국에서도 백화점에서 일 하고 싶어요. 그래서이 일이 제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말레이시아 백화점 인턴면접에서 '경제를 전공했는데 왜 백화점에 왔느냐'고 묻는 인사담당자에게 던진 매우 당돌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 솔직함 덕분에 누구보다 만족스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원한 직무와 관련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오' 


요즘 매일 들여다 보는 모든 자기소개서에 등장하는 항목이다. 직무와 관련된 경험은 아르바이트나 인턴경험을 의미하는데, 나에게 인턴은 저 항목을 위해 존재하는 경험이 아니다. 철저히 '테스트'였던 것이 내 인턴 경험이었다. 


브랜드 매니저였던 이모는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항상 멋있게 차려입은 이모는 내게 제일 예쁜 사람이었고, 주말도 마다한 채 늦은 밤 까지 일하는 모습은 누구보다 멋있었다. 이모가 일 하는 백화점에 처음 갔을 땐 '이모는 이렇게 멋진 곳에서 일하는 구나'하면서 동경심리가 더욱 커졌다. 이모는 항상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제일 예쁘고 멋있는 모습으로 내 매장을 나서는 것이 행복해" 


이모는 엄청난 수완가였다. 판매직부터 시작해 브랜드 바잉까지 했고, 다 죽어가는 브랜드를 살려내는 실력있는 매니저였다. 이모의 연봉은 남들과 다르게 책정됐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실력가로, 매출의 일정 퍼센트를 몫으로 가져갔고, 그 수준은 어마어마했다. 이모가 그런 실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고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준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런 신념 하나로 모두의 스카웃 대상이 된 이모가 멋있었고, 그런 이모의 신념을 따라 가고 싶어서 백화점에서 일하고 싶었다.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따위의 말은, 솔직하게 내게 속하는 말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모를 보며 막연히 백화점을 꿈꿔왔고, 그것이 내게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이 말레이시아 해외 인턴이었다. 지원동기를 묻는 인사담당자에게 당돌하게 이야기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백화점에서 일 하고 싶은데, 그것이 나와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담당자는 한 동안 나를 쳐다봤고, 나는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아냈다. 그 다음 주 월요일, 첫 출근을 했고 담당자와 나는 2시간 가량 회사에 대한 소개와 간단한 OJT 를 했다.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첫 부서를 배치해 주던 인사담당자의 말을. 


네게 백화점이 어떤 곳인지 가르쳐 줄게. 3개월 동안 3곳의 부서를 경험하게 될거야. 부서 기준은 간단해. 그 부서에서 행사나 주요 업무를 통해 네가 배울 것이 있고, 또 그것을 네게 잘 가르쳐줄 사람이 있는지, 이 2가지가 선정 기준이 될거야.



담당자는 내게 일만 배우지 말고, 백화점을 보라고 말했다. 부서 별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각 부서끼리 어떤 업무로 연결돼 있는지. 내가 이 곳에서 배워야 할 것은, 나무를 심는 법이 아니라 숲이 어떤 나무로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이 숲이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에 너무 감사했다. 


3개월 간 영업관리, VMD, HR, 마케팅 부서에서 근무했다. 상대적으로 주어진 업무량이 적었던 영업관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서에서는 정말 '열정페이'라던가 '노동착취'가 무엇인지를 뼈 속 깊이 체감하고 왔다. HR에서는 복지 지원 적격심사 업무를 시작으로 인턴인 주제에 2015년 1/4분기 인사변동 보고서를 작성하고 채용박람회, 면접 참관을 하지 않나,  VMD에서는 2015 S/S 컬렉션 패션쇼 무대 세팅 및 해체, 2개 지점 매장 디스플레이 및 쇼윈도우 세팅 작업을 하느라 현장 출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대망의 마케팅팀에서는 아버지의 날 신문광고 제작을 직접 했고(보조가 아니라, 정말 내가 했다), 그 과정에서 매입부 직원들과 행사 상품과 조건을 맞추느라 그들을 달달 볶는 데 도가 텄으며, 2015미스말레이시아 캠페인 카탈로그 촬영을 위해 인턴 주제에 각 브랜드 매니저들과 회의 해 본선 진출자들에게 협찬할 옷을 선정했다. 주말에 촬영장으로 출근해 촬영 진행도 보조했다. 어느 날엔 난데없이 한국 뷰티브랜드 시장조사를 해 오라더니, 갑자기 몇 브랜드를 꼽아 사업제안서를 작성하란다. '내가? 나 인턴인데? 응?' 했지만, 시키니 했다. 신기하게도 그 중 두어 브랜드는 마음에 들었는지 실제 매입부에서 정식으로 사업제안서를 보내기도 했다. 




2015 미스말레이시아 본선진출자들과 함께한 캠페인 촬영. 당신들 옷 고르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은 내게 정말 '테스트'가 였다. 막연히 '멋있어 보여서' 로망을 품었던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됐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제일 의미 있는 것은, 짧게나마 여러 직무를 체험했다는 것. 내게 4개 부서를 다니며 내게 어떤 직무가 맞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비록 일하지 않는 부서였더라도 '인턴'이라는 특급혜택을 원없이 이용해 다른 부서 사람들을 만나며 직무 인터뷰를 맘껏 했다. 이 3개월간 백화점이라는 숲을 봤다. 백화점이라는 유통채널의 전반적인 운영체계를 보았고, 내부적으로 어떻게 연결돼 있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직접 보고 배웠다. 인턴 신분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을 했지만, 그만큼 내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만약 스펙이라던가, 어떤 경험을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턴을 시작했더라면 이만큼의 만족을 느끼지 못했을거다. 오히려 기대보다 두려움이 컸다. 남의 나라, 회사까지 가서 내가 잘 해내지 못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 나 때문에 한 번 일 할 것 두 번 일하게 만드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 걱정들이 '짧지만 직장인이다'라는 책임감으로 승화됐던 것에 감사하다. 


다시 처음부터 대학생이 된다고 하더라도, 해외 인턴은 반드시 꼭 할 일 중의 하나다. 여러 직무경험은 물론, '해외 거주' 이 자체만으로도 매력있다. 언어와 문화, 민족이 완전히 다른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진정으로 와닿았다. 난생 처음 겪어본 이슬람, 힌두 문화에 손으로 밥을 먹어보고 라마단을 경험하겠다는 패기로 닷새간 함께 단식을 해보기도했다(진짜 죽을 뻔 했다). 단순한 여행만으로도 안목과 식견이 넓어질 수 있지만, 여행과 거주는 완전히 다르다. 한 커뮤니티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느낄 수 있는 것은, 스쳐지나가는 여행자일 때와 차원이 다르다. 그것을 느끼게 해 준 것이 말레이시아 인턴이었다.  





그런데, 나는 다시 이렇게 살 것 같다.


1/4 지점 쯤 왔을까. 취업이란 것, 아직 내 인생의 25%도 안 살았는데 벌써부터 지치게 한다. 어느 누구보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한 없이 남과 비교되고, 잘 해온 것 보다 못 한 것이 더 눈에 보인다. 내 가치를 몇 장의 이력서와 자소서 만으로 평가당하는 씁쓸한 기분에 아빠를 붙잡고 몇 번을 울었다. 


그런데, 나는 다시 이렇게 살 것 같다. 어느 것 하나 계획해서 이뤄온 것이 없다. 내 인생이 그렇다. 재밌어서, 하고 싶어서, 멋있어 지고 싶어서, 확인하고 싶어서. 뭐 하나 '내게 도움이 되니까'하고 생각하고 해 온 것들이 없다. 그래서 더 온전히 즐길 수 있었고, 세상 모르고 몰입할 수 있었다.  순간 스쳤던 관심에 더 집중하지 못한 것들은 지금에 와서 아쉬움으로, 미련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만들어 온 선택들을 다시 반복할 것 같다. 후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결과물을 만든 선택 아래 깔린 '재밌을 것 같아서', '멋있어지고 싶어서', '확인해 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는, 지금 되짚어보아도 거스를 수 없는 이유다.




좀 더 얍삽하게 살 지 못한 것, 좀 더 앞날을 위해 체계적으로 준비하며 살 지 못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현재를 200% 누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나를 알아가고, 나의 새로움을 발견하고, 나의 한계를 느꼈으며, 그 속에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 왔다. 


그래도 다시 이렇게 살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내린 선택의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의미다. 결과가 어떻게 변하던 간에, 내 선택 기준은 변하지 않을 거다.


이게 내가 나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자기소개서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고, 어떻게든 나를 어필하려고 애쓰느라 잊고 있었던 진짜 내 방식. 이렇게 나를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나를 만들어 가고 싶다. 


그럼 나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똑같은 자기소개서 문항에 어떻게 하면 나를 좀 더 돋보이게 구겨 넣을 수 있을 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취업 앞에 약해지지 않고 싶다. 그저 조금 더 나 답게 마주하고 싶다. 












나는 자소서를 아주 '막' 쓰는 편이다. 공식 같이 문장 하나, 구성 하나 다 정해진 그런 자소서를 쓰고 싶지 않았다. '자소서읽을 마음이 없어 보이는' 기업들은 지원하지도 않았다. 한 선배가 이런 내가 답답했는지 "너 그러다 다 떨어져. 대체뭘 믿고 그러냐?" 했다.



선배, 알아 볼 사람은 알아 보겠지. 

뭐, 아니면 마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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