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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 Jul 06. 2016

아빠와 나의 25년 간

아빠께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

한껏 늦장을 부리는 주말 아침, 온 몸이 뻐근하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주말 아침이 되면 아빠가 보고싶어 진다. 아빠는 주말 아침이면 침대맡에 앉아 손과 팔을 주무르며 나를 깨우셨는데, 그 시원함은 잠을 깨고 상쾌한 아침을 시작하기에 더할나위 없었다.



부녀 관계의 순리



유년의 기억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아빠와 밤에 몰래 외출했던 것이다. 이따금씩 아빠와 손을 잡고 시내에서 짧은 데이트를 하곤 했다. 동생과 엄마없이, 단 둘이. 난 애교가 많은 딸이었고,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와 율동을 온 가족에게 뽐내는 것을 좋아했다. 아빠가 샤워를 할 때면 아빠 속옷을 들고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빠에게 건네는 여우같은 딸이었다. 내 아빠가 딸바보가 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순리였다.


딸은 나이가 들 수록 아버지와는 멀어지고 엄마와는 친해진다고 했다. 여우같은 딸인 나도 크면서 점점 아빠와 서먹해졌다. 누구나 그랬듯 중,고등학생 때는 아빠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아빠는 여전히 딸바보였지만 여자 형제가 없고, 집에 여자가 귀해 딸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셨다. 게다가 30년을 군대에서 남자들과 지내셨으니 사춘기의 딸을 누구보다 어려워하셨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와 싸울 때면 난 항상 아빠께 "난 군인이 아니야! 나한테 부하 다루듯 하지마요!"라고 했다. 아빠 청춘의 한을 내게서 이루시려는 듯 쏟아지는 잔소리와 구속이 힘들었다. '아빠가 살아보니-' 하고 시작하는 잔소리도 싫었었다. 아빠가 살아온 시대와 내가 사는 시대는 너무나 다른데, 왜 자꾸 아빠의 경험에 비춰 이야기 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입학시 장학생으로 선발 돼면 기숙생활을 해야했다. 나는 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공부를 더 열심히 했었다. 하루가 멀다 하게 아버지와 싸웠던 그때, 아버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최초의 기회였다. 처음에 이 곳으로 진학하겠다 했을 때, 아버지는 만류하셨다. 내가 여자고등학교에서, 그것도 기숙생활을 해야 하는 곳을 내 성격과 성향에 절대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 결국 엄마의 설득으로 나는 이 자사고에 진학하게 됐다. 그리고 나는 1학기도 채 다니지 못하고 자퇴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퇴를 해야 했을 때, 나는 엄청난 우울감에 빠졌다. 목표를 져버리고 결국 포기하게 된 것 보다도 진학 전, 아버지가 예언했던 대로 이뤄진 것 같아 더 분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난 뒤, 나는 꽤 오랜 시간 심리 상담을 받아야 했다. 신경정신과에서 5시간 넘는 시간 동안 심리검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불만은 또래 사춘기 여고생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라는 결과가 기억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때때로 이것 또한 '순리'였다고 생각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내가 아빠를 미워할 만한 어떤 사건도 없었다. 그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님과 갈등이 생기는 것, 거기에 나는 자퇴경험까지 '특별히' 더해져 그런 것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 당신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그 결과를 신경정신과 의사에게서 들어야 했을 때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8년이 지난 지금도 감히 그 때의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나는 아빠에게 지은 죄가 많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아빠와 싸울 때 뱉어냈던 수 많은 못 들과 딸로서 보인 가장 못난 모습들. 심리검사를 받고 난 뒤, 나는 꽤 오랫동안 심리상담을 받아야 했다. 심리상담은 주로 내 안에 쌓인 화를 풀어내는 것에 집중됐다. 그저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것들이었지만, 나는 한 단어 한 문장을 꺼내 놓을 때 마다 눈물도 함께 쏟아냈다. 항상 상담을 받고 오는 날이면 진이 빠져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져 잤다. 그런 딸의 모습에 아빠는 어땠을까.


다시 고등학교에 재입학 한 후에도 아빠와의 갈등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긴 사춘기를 보낸 딸이었고, 그 시간만큼 아빠의 가슴에도 멍울이 졌다. 시험기간마다 무너지는 딸.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딸. 진로고민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던 딸. 아빠의 응원 한 마디 조차 거부하는 딸이었기에 아빠는 그저 딸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아빠는 어떻게 바라 보셨을까. 온전히 날 제대로 볼 수 있기나 하셨을까.



그 때는 몰랐다. 그때는 몰랐다는 변명으로 아직도 나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아직도 나는 아빠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으면서.




아빠도, 불안하다


여우와 사자가 싸우면 말 할 것도 없이 여우는 사자에게 잡아 먹히고 만다. 그래도 간이 큰 여우는 사자 앞에 가서 깐족대고 사자는 콧방귀도 뀌지 않다가 한 번 어흥! 하면 여우는 쪼르륵 도망간다. 근데 가끔 사자가 여우를 못 살게 굴 때가 있다. 정글의 왕인 사자는 여우더러 '사자의 룰'을 따르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글에서 내쫓겠다, 혹은 정글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한다. 사자와 여우를 아빠와 나로 바꾸면, 딱 적당하다.



얼마 전, 아빠와 한 바탕 '거사'를 치렀다. 공무원 시험을 강권하시는 아빠와 내 꿈을 쫓으려는 딸. 어느 때 보다 강하게 권하시고-강요라 느낄 만큼- 툭툭 던지시는 모진 말에 꽤나 서러웠다. 왜 내 꿈을, 내 인생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일까 한참을 원망했다.



그런데, 사실은 아빠도 불안한 거다. 다가오는 퇴직, 아직 공부를 마치지 않은 아들. 그리고 엄마의 새로운 사업 시작. 홀가분한 마음으로 퇴직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 그것이 아빠의 퇴직이다.  아직 아빠의, 가정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는데 내려 놓아야 하는 월급. 퇴직하기 전 직장을 구하고 자리 잡은 딸의 모습을 보는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거다.


정년 퇴직. 당신의 인생의 35년을 군부대에서 보냈다. 드디어 떠난다는 홀가분함이 있을까. 월급, 혹은 계급으로 대변되던 당신의 쓸모가 이제는 없어졌다는 씁쓸함이 더 클까. 아빠도 갱년기가 있다. 어쩌면 아빠의 퇴직과 함께 갱년기가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빠의 갱년기를 물리칠 가장 큰 선물은 내가 직장을 구하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아빠의 책임의 결과를 보여드리는 것일 거다.



"당신의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무한한 응원과 지원으로 내가 이만큼 잘 살고 있습니다" 하고.

아니, 이것도 아니다. 난 잘 모르겠다. 여전히 아빠의 마음을 알기란 어렵다. 스물 다섯이 되도록 난 아빠를 위로하거나 응원할 말 한마디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못난 딸이다.



아빠의 습관을 닮기


아빠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춘천으로 발령을 받아 '셀프 안식년'을 지내신다. 여전히 군인이시지만, 스스로 '가족으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하셨다. 다행히도 주변에 아빠의 동기들이 많이 계셨고, 춘천으로 가신 첫 해에는 주말이면 동기들과 여행을 다니셨다.


우리 가족은 세 집 살이를 하면서 1달에 한 번, 온 가족이 모였다. 그래서일까, 그 때 부터 아빠를 자연스럽게 관찰하게 됐다. 홀로 사시는 것이 걱정됐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 보니 아빠가 지긋지긋하게 하시던 잔소리가 죄다 맞는 말임을 깨달으니 민망해져서 괜히 말은 못 붙이고 관찰만 했다.


희한하게도, 아빠와 나는 대학에 와서 더욱 친해졌다. 집 떠나 사는 신세의 동병상련일까. 1주일에 2-3번씩은 반드시 통화했고, 매번 아빠께 어리광을 부렸다. "나 취업 못하면 아빠가 나 데리고 살아야해"하고 말하면 "시집도 가지 말고 아빠랑 살아"하고 답 해주셨다.


그토록 아빠와 싸워대던 그 때에도 나는 아빠의 딸이었다. 나는 아빠의 등을 보고 자랐고, 아빠의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커왔다. 이따금씩 '아빠 닮아 이렇지'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소설을 좋아하는 것이나, 술을 마시면 항상 배고파 지는 것, 그리고 가죽자켓을 입으면 한 없이 무서워 지는 것 까지. 흔히 좌뇌와 우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좌뇌에 관한 모든 것은 아빠를 빼다 닮았다.


내 인생에 아빠가 단 한 분이어서, 그래서 아빠가 어렵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변하고, 아빠도 변하고. 부녀지간은 평생의 숙제기 때문에 더욱 아빠와 친해질 노력을 해야한다. 나를 가장 껴주고 사랑해 주는 아빠를, 어쩌면 평생에 걸쳐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르니까.


고민이 생길 때 다 자연스럽게 아빠께 전화하는 것. 스물 다섯 나이에 아직도 철이 없다거나 어리숙한 모습일지 몰라도 나는 정말 좋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내 고민과 힘듦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아빠가 있어서 좋다. 3년 넘게 교제중인 남자친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셔도, 전화 할 때 마다 '남자친구 바꿀 때 됐다'하시는 농담도.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나는, 그것에 익숙해져 아빠를 닮은 남자를 찾는 딸이 됐다. 아빠 말고, 아빠같은 남. 내 남자친구의 기준은 아빠였다. 이상하게 그랬다. 누군가 내게 '사랑스럽게 글을 쓴다'고 한 적이 있따. 스스로 사랑스럽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내가 어떤 의미에서든 사랑스럽게 보인다면 그것은 아빠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일거다.



평소에 찍어둔 아빠의 동영상을 보면 웃음이 난다. 어쩜 하는 행동이 나랑 이렇게 똑같을까.







동생(남, 23세)과 맥주 한 잔 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누나, 요즘 왜 아빠 생각만 하면 울컥하는 지 모르겠어."

짜식. 우리는 잘 둔 자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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