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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dy Sep 10. 2015

트라우마

실물을 볼 때 느껴지지 않던 감정이 사진을 통해 나타날 때가 있다.  지난 주말 멋지게 피어 있는 순천만 정원의 튤립을 보면서 따뜻한 봄 햇살을 느끼다가도, 막상 그것을 사진으로 담아 와서 보면 하염없이 돌아가고 있는 풍차에서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 쓸씀함 뒤에는 늘  마음속 고민이 따라 붙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김혜남 선생님이 그러지 않았는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그러니 고민하지 말고 재미있게 인생을 사는 것이 답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때론 사소한 것에 얽매이는 나를  발견할 때, 나도 한 낱 작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신호 위반으로 인해 교통 사고를 크게 당한 후, 항상 운전대 잡기가 겁난다. 특히 혼자가 아닌 가족을 태우고 어디를 가야 할 때는 그 걱정이 배가 된다. 그래서 여행을 가더라도 가능하면 대중교통이 잘 닿는 곳을 먼저 찾게 된다. 일종의 트라우마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교통 사고 이외에 나를 부여잡고 있는 학창시절의 트라우마가 하나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잊혀질 법도 한데, 마음 속의 상처가 너무 커서 그런 것인지 아직도 나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다. 


때는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누군가는 대학 생활 속의 '부정행위'를 '낭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강의실에 가보면 벽 구석 그리고 책상 위에 얼룩져 있는 부정행위 흔적을 보며 학생 때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낭만의 상징으로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되, 모르면 모르는 데로 시험을 치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정말 외워야 하는데, 도무지 외워지지 않는 것이 있으면, 시험 직전에 웅얼웅얼 외우고 있다가 답안지를  받자마자 그것의 한 귀퉁이에 내 기억을 쏟아내어 적어두는 것이 유일한 내 전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 생활의 낭만이라고 하는 이 부정 행위의 지나침에 있었다. 벽 구석도 좋고 책상 위에 깨알처럼 써 놓는 것도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답안지와 똑같은 종이(갱지)에 시험 내용의 대부분을 써 놓은 후,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답안지처럼 책상 위에 놓고 답을 써 내려 가는 행위는 도저히 내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런 행위를 통해서라도 적당한 점수를 맞으려는 사람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위 과에서 톱클래스를 다투는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과 똑같이 할 수는 없었다. 나는 평소처럼 양심껏 시험을 치렀다. 점수는 좋지 않았고, 간발의 차이로 다음 학기 장학금을 놓쳤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등록금 전액 면제는 반드시 쟁취하고자 늘 노력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나를 허탈하게 만들어 버렸다. 과연 양심은 지켜져야 하는 도덕이며 윤리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내 마음에 벽을 쌓아 버렸다. 그 사건에 가담한 상당수의 동기들이 점수 앞에서 깔깔대며 웃어대는 비열함에 치가 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몇몇 대학 동기 이외에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친구라고 다가오는 그들의 얼굴 위에 씌워진 가면이 늘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면놀이를 즐겨하는 정치인들을 바라볼 때와 다른 느낌이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배신감은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내 기억 저편에서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는 존재한다. 트라우마는 물리적 혹은 심리적인 상처가  마음속 깊이 숨어 버려서 발생된다. 하지만 그것을 늘 감추고 있으면 영원히 나를 괴롭히는 트라우마일 뿐이다. 차라리 그것을 공개하고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나도 마음 속 한 가지 트라우마를 꺼내 보았다. 이제 그것을 잊어보려 한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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