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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선생 Mar 18. 2020

남겨진 자의 슬픔과 상호 치유

영화 "레인 오버 미(Reign Over me)

 이 영화는 9.11 사태로 인해서 가족을 잃은 찰리(아담 샌들러)와 가정생활에 대한 계속되는 회의를 느끼고 있는 알렌(돈 치들)의 상호 치유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족을 떠나보내고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삶에 대한 회의를 가득 가지고 있는 찰리에게는 더 이상의 삶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유일한 낙은 음악을 듣고, 전동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아내의 마지막 소원이었던 주방을 고치는 일뿐이었다. 치과의사인 알렌은 가정생활에 충실하고, 열심히 병원에서 일하는 것 이외에는 별 낙이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다. 자기 자신의 의미를 점점 잃어가고, 부부간의 관계도 소원해지며 답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에 대학 때 룸메이트였던 찰리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2001년 9월 11일, 밤 10시경 군부대에 있던 나는 당직사관 몰래 TV를 보던 선임들과 함께 블록버스터 영화 같은 현실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대의 비행기가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향해서 비행하여 두 개의 빌딩을 무너뜨리는 광경이었다. 당시 기억으로는 모두가 "이거 진짜야? 아님 영화 찍은 거야?"라는 반응이었다. 순식간에 두 개의 거대한 빌딩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사람들은 탈출을 위해서 빌딩에서 뛰어내리고, 사방은 먼지로 뒤덮였다. 말 그대로 지옥이 다름없었다. 살아남은 모든 이들에게나 죽은 모든 이에게나 괴롭고 힘든 순간이었다.


 2008년 9월 11일, 아침 8시경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사실인지 아닌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친구를 본지가 일주일도 되지 않은 때라서 더욱 충격적이고, 믿을 수가 없었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 모두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라는 말을 되뇌었고, 망연자실 떠나는 친구의 뒷자리를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나 자신에게 끝없는 무력감을 느끼면서, 떠난 그에게나 살아남은 나에게나 세상은 무서운 존재로 다가왔다. 




 살아남은 자들은 떠난 사람들에게서 부채를 떠안게 된다. 떠난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대한 부채를 떠안게 된다. 이러한 부채는 떠난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가 떠난 사람을 생각하며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이러한 부채를 안고서 살아간다. 살아남은 자들이 안고 있는 부채의식은 단숨에 사라지거나, 누군가가 치유해 주는 것을 통해서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부채의식을 극복하고,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 자신들의 노력과 고민, 방황일 것이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부채를 없애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때로는 자신이 대신 짊어지겠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가능하지도, 가능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자기 성찰과 상처의 아픔을 무디게 해 줄 시간이다. 이 두 가지 모두 당사자 스스로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군가가 강요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이럴 때, 주변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그들이 제자리에 돌아오고, 자신들에게 환하게 웃어줄 그 어느 날이 올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날을 기다리는 인내심이다. 그런데 만약 주변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해결책을 주겠다며, 그의 행동을 바로잡으려 한다면,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의 굴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굴을 파고, 그 속에서 꼼짝달싹 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굴 밖으로 나오는 데에는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어쩌면 그 굴 속에서 평생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은 찰리를 굴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다. 그들은 찰리를 도와주겠다는 미명 하에 그에게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찰리가 자신을 추스르고, 자신의 부채의식을 떨쳐버릴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알렌만은 달랐다. 찰리를 치유하려 하지도, 그를 굴 밖으로 끌어내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찰리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찰리 스스로가 그 문제를 떨쳐버릴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이해해 주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삶의 무료함을 느끼는 알렌도 자신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서로를 치유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고민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을 때,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 아마도 인간 사이의 일들은 이러한 것 같다.                                                  

                                                                          

 내가 예기치 않게 한 친구를 잃었을 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한 친구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세상을 떠난 친구의 소식을 듣고 나에게 연락을 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내가 친구를 잃었을 때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내가 그 일로 인해서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그저 이해해주고, 모든 일은 지나가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오히려 가까운 친구들 중에서 이런저런 충고를 해주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던 친구들보다 더욱 많은 힘을 주었다. 그 당시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나를 추스를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이었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와 타인의 상처를 같이 치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치료약이 된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도나(세프론 버로우즈)는 찰리를 정신병원에 감금하여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인, 장모를 본 뒤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왜 사람들은 저 사람(찰리)이 상처 받은 거라는 걸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심장이 뜯겨 나갈 만큼 아프다는 걸 왜 모를까요?"


상처 받은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상처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 상처가 아물게 해주는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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