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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선생 Mar 25. 2020

사랑, 현실이 되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 영화 "비포 선셋", 영화 "비포 미드나잇"

 우리가 보는 많은 로맨틱 멜로 영화들의 마지막은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식의 마무리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행복하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오래오래 예쁜 모습으로만 살아갔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저런 사랑이 세상에 어디 있어? 다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되뇌며, 영화 속 사랑과 현실의 간극을 오가게 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로맨틱 멜로 영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낯선 기차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잘생기고 아름다운 남녀-제시(에단 호크), 셀린느(줄리 델피)-와 아름다운 비엔나의 거리, 로맨틱한 밤과 신비로운 새벽의 시간. 남녀는 서로의 삶과 생각을 탐닉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20대의 두 젊은 청춘은 서로의 사랑에 대한 앞으로의 날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두려움을 감춘 채, 세련되고 쿨한 선택을 하려고 한다. 하룻밤의 만남이니 서로에 대해서 연연하지 말자고 한다. 뜨거운 감정을 감추려고 하지만, 결국 이들은 헤어지는 기차 앞에서 6개월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1995년에 나온 이 영화는 당시 젊은 청춘들의 마음을 꽁냥꽁냥 하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예쁜 영화 장면들은 20대 청춘들에게 로맨틱한 상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솔로 남녀들이 영화 속 인연이 나에게도 있을까 싶어서 경춘선 기차를 탔다가 혼자 춘천 가서 닭갈비에 소주 한 잔 걸치고 돌아왔다는 우스개 소리들을 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사람들에게 로맨틱한 연애의 시작을 꿈꾸도록 해주었고, 한 동안 로맨틱 멜로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저 나름대로 영화만큼이나 로맨틱하다. 운명처럼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그(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상대에게 맞추고, 자신도 모르게 변한 모습에 '사랑의 힘'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쓰게 된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로맨틱할지 모르겠지만, 사랑의 과정은 로맨틱하지 만은 않다. 사랑이 시작될 때는 상대의 나와 다른 모습을 매력이라고 여기게 된다. 과묵한 모습이 듬직하다며 좋아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행동이 조심성 있어서 어른스럽다 말하고, 자신의 기분을 내색하지 않는 모습이 진중하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이 오래될수록 이러한 모습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상대를 바라보게 된다. 과묵한 모습이 답답해서 싫다고 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행동이 게으르다고 하며, 자신의 기분을 내색하지 않는 모습에 감정이 공유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러 번 연인 간의 해프닝 속에서 사랑이 일상이 되고, 일상은 현실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감정이 멀어지고 식어간다. 아마도 영화 속의 제시와 셀린느가 6개월 뒤에 만났다면, 그들도 이와 같은 모습을 하지 않았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6개월 뒤에 그들은 만나지 못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들은 9년 뒤 2004년에 만났다. 영화 "비포 선셋"을 통해서 만난다.

시간은 9년이 흘렀고, 23살의 제시는 32살의 소설가가 되어 파리의 유명 고서점인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작가와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셀린느와의 하룻밤 사랑을 소설로 써서 유명 작가가 되었고, 그 서점에 32살의 셀린느가 찾아오게 된다. 둘은 서로가 없었던 시간을 채우듯 파리의 시내를 걸으며 자신들의 삶과 생각들을 끊임없이 나눈다. 대화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그림움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다. 서로의 삶을 탐닉하던 20대를 지나서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30대의 이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현실적인 문제들 중 하나이다. 9년 전 일에 대해서 추억의 앨범을 들여다보듯이 이야기하고,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가면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지만, 그 추억을 다시 회상하는 것이 현재의 삶을 어떻게 흔들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결혼이라는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질문과 대답을 하며, 자신의 자리를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비껴간 사랑에 대한 감정을 쏟아내지만, 그 사랑 속에서도 현실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한다.




 20대의 사랑은 불처럼 뜨겁고,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는 사랑하는 이와 나 둘만이 존재하고,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뜨겁고, 용감하다. 하지만, 20대의 사랑은 그처럼 뜨겁고 용감하기 때문에 변덕스럽다. 시간이라는 변수가 나타나면서 사랑의 온도와 용기는 바뀌게 된다. 30대에 접어들면 뜨겁고 거세던 불길은 잔잔한 모닥불로 바뀌고, 무모할 정도의 용기는 현명한 선택을 고민하는 용기로 바뀌게 된다. 사랑이 현실의 문제가 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필요로 하는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 결국, 사랑도 현실에 발을 붙여야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사랑이 밥 먹여주냐?"는 식의 대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처럼 사랑을 위한 행동이 순수하고 아름답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영화 "비포 선셋"에서의 사랑을 위한 선택은 심각한 현실적 책임, 심리적 고통과 포기해야 하는 삶에 대한 고민을 보여준다. 결국, 영화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자신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현실적인 고민을 감내하며 사랑을 좇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그 후에 이들은 어떠한 길을 갔을까?




 그들의 길은 9년 뒤 2013년에 영화 "비포 미드나잇"을 통해서 보이게 된다.

이 영화들의 특징은 각각 1개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영화 "비포 선셋"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나는 제시와 셀린느의 이야기다. 세 번째 영화 "비포 미드나잇"은 그리스 해변 마을 카르다 밀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첫 장면은 아들을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제시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제시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셀린느와 결혼을 하여 쌍둥이 딸을 두고 있다. 18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완전히 현실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도 젊은 커플이 이들의 사랑 얘기를 듣고 로맨틱하다고 하지만, 이 둘은 "그렇지도 않아요."라는 반응을 보이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서로를 향하는 마음을 가졌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되어버린 사랑 앞에서는 그저 남들도 다 하는 사랑 얘기쯤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사랑은 더 이상 '한 사람과의 사랑이 아니라 삶 전체의 사랑'으로 변한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짧은 로맨스로 시작해서, 사랑과 현실의 고민을 거쳐, 결국 삶 속에 사랑이 위치하게 된 것이다. 지난 두 편의 영화에서 나온 롱테이크 대화 씬에서는 서로를 탐색하는 듯한 대화가 이어지면서 끝부분에 감정의 굴곡이 크게 나타났다면, 영화 "비포 미드나잇"에서 표현된 롱테이크 대화 씬에서는 서로를 탐색하는 대화가 빠져있다.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대화의 저변에 흐르는 감정도 솔직하고, 구체적이며, 상대에게 일상적이다. 부부간의 대화는 그렇다.


 



 한 때는 동화 속의 사랑이야기 같은 연애를 하고, 서로에게 미칠 듯이 끌리게 사랑을 하지만, 그 사랑이 현실이 되면서 모습은 달라진다. 연애시절에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만, 부부가 되고 아이를 가지게 되면 고맙다는 눈빛 한 번, 정성을 담은 음식 한 그릇, 반듯하게 준비해준 옷 한 벌 속에서도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표현 방법은 달라지지만, 본질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서로 솔직하게 감정을 이야기하고, 그 감정 때문에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모습, 현실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렇다고 '연애의 완성은 결혼' 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들의 로맨스는 평생 갈 수는 없지만, 로맨스가 현실 속의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일상이 되면 '한 사람과의 사랑이 아니라 삶 전체의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본다.


P.S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함께 만드는 다음 "비포 시리즈"를 보고 싶어진다.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만든다면 부부 간의 사랑이 지향하는 지점이나 인물을 통한 대화를 구성하면 재미있을 듯 싶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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