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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 Apr 23. 2017

별안간 어머님

D+139, 아마도 최연소 창업센터 방문자 춘이

요 며칠, 갑자기 계획에 없던  발표자료를 만드느라 바빴다.

창업센터에서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을 마감 전날 알게되었다. 임신 때 해보려고 했던 게 있었는데,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출산을 했어서, 이 공고를 보고 부랴부랴 같이 하는 분의 도움을 빌어 지원을 했다. 급하게 한거라 기대는 안했는데, 서류 통과.

기쁨도 잠시, 3일 후 발표자료를 만들어 피티를 해야한단다.

같이 지원한 일명, 명상덕후님은 서류 준비를 맡았고 일정이 마침 겹친게 많아, 내가 만들기로 했다. 어느덧 빡빡한 하루가 저물고 춘이가 잠든 시간. 컴터를 키고 빈 화면을 띄워놓고는.....울어버렸다.

하.....출산 후 울보당첨.

임신과 출산 후 130여일, 고작 일년정도밖에 안되었는데도, 노트북 ppt의 느낌이 너무 낯설고 뭘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감이 안왔다. ppt라는 툴이 구린게 아닐까?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그래 키노트를 한번 써보자 했지만, 더 낯설것은 자명한 일.

갑자기 예전 회사 다니던 시절, 그 이전에 첫 직장에서 주중에는 빡씨게 야근하고 주말에는 마케팅 교육을 받으며 뭐든 의욕넘처 열심히 하던 지나간 그 시간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오르며 괜히 평소에는 좋기만 하던 이 밤의 정적이 너무 외롭게 느껴졌다.

출산 직전, 먼저 애기를 낳은 어떤 한 엄마가 애기 낳고 나면 좋아도 울고, 슬퍼도 울고, 화나도 울고, 맛있는걸 먹어도 울고, 그냥 다 울게 되요. 했는데 참, ppt  빈 화면을 띄워놓고 울게 되다니..울다가 웃기도 했다.


일단 명상이 필요했다.

눈을 감고, 내가 좋아하는 골드향의 에어컨디셔너를 방에 뿌리고 깊게 호흡하며,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는지 떠올렸다. 어차피 백일 지난 애기를 안고 뭘 어떻게 막 예전처럼 막 막막 막막막 마구마구...할 수가 없어. 그냥 이 과정 하나하나를 즐기는거야. 이렇게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한발짝씩 내딛는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어. 내 안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그렇다, 지금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었다. 엄마가 되었고, 엄마라는 메인 잡이 있는 이상 지금 당장은 혼자 몸일 때와 똑같은 그 어떤 것을 바랄 수 없는 일이다. 해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내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출산 후 매일 의식적으로 해왔던 생각 '이 시기를 온전히 겪어내면 그 이상으로 훌륭한 게 없다'라는 그것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는 내 마음은 고요를 되찾았다.


마침 일본에서 잠시 들어온 동생이 집에 잘못... 놀러왔다가 도움도 주고, 잘할려고 하는 생각 대신 이것을 한번 시도해본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어찌어찌 완성해서 제출했다. 그 제출한 자료로 피티를 해야하는데 참가부터 다시 난관. 피티는 함께 하는 명상덕후님이 하셔서 문제 없지만, 우리 춘이를 데리고 어찌 그 자리에 갈 것인가. 평일 오후시간이라 남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일하는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나를 잘 아는 옛 동료이자 친구가 내 상황을 듣고 흔쾌히 센터에 와서 춘이를 봐준다고 했다. 내가 잘 돌볼테니 너는 어떤 것도 고민하지 말고 원래의 너 모습대로 그냥 밀어붙여! 힘을 주었다. 정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당일 아침, 춘이의 컨디션을 요리조리 살피며, 최대한 수유시간과 겹치지 않도록 잘 달래가며 양껏 먹이며, 웬만하면 외출 전에 응가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 장 맛사지도 해가며, 내 군대식 샤워도 얼른 마치고, 나름 공식적인 자리라고 귀걸이도 달아가며, 미안하지만 춘이가 잠깐 우는 사이 아이라인도 그리며, 기저귀는 넉넉하게 보온병에 따뜻한 물도 넉넉하게, 가재 수건도 넉넉하게, 혹시 몰라 노트북도 기저귀 가방에. 싸본 적은 없지만, 이를테면 군장처럼 만발의 준비를 해 집을 나섰다. 아, 밥을 안먹었네. 애기를 보다보면, 정말 순식간에 당이 훅 떨어져서 눈이 깜깜해진다. 공식적인 자리에 가서 당떨어지면 답없다. 카시트에 세팅해놓은 춘이를 다시 들쳐매고 김밥집에 가서 재빨리 김밥을 포장. 다시 인체 묘기를 해가며 카시트에 춘이를 안전하게 앉혀놓고는 김밥을 입에 마구 넣으며 신호대기때면 울 준비를 하는 춘이에게 계속 말을 걸며 발표 장소인 광화문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쓸데없이 노트북까지 넣은 기저귀 가방을 들쳐매고 언젠가부터 외출 시 항상 나와 한 몸이 되어있는 아기띠에 다시 춘이를 안전하게 장착, 혹시라도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미세먼지를 훅 들여마실까 담요도 덮었다 열었다 하며 발표 장소 밑 커피숍에서 일일 보모를 자처한 친구를 만났다.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내 모습을 보고 친구가 빵터진다. 당연한 것이, 우린 불과 이 길을 3-4년전쯤?에 미혼커리어우먼의 모습으로, 퇴근 후 얼큰하게 취해서 깔깔대며 돌아다녔었던 바로 그 길이었는데, 웬 완전 무장을 한 어머님과 일일 보모의 모습으로 만났으니.

언제나 그렇듯 우린 한참을 웃고는, 오느라 이미 당 떨어졌다며 예전에는 거들떠도 안보던 초코가 가득 들어간 음료를 주문해서 반샷을 했다. 발표장소로 이동해 애기와 일일 보모..ㅋㅋ가 있을 곳을 찾아봤다. 다행히 라운지가 있어 아직 애기가 없는 친구에게 아기띠 매는 법, 춘이를 대처하는 법 몇개를 알려주고는 발표장소로 이동했다. 7,8명의 심사위원이 있고 그 앞에서 발표를 하는, 다소 엄숙한 분위기였는데, 간간히 밖에서 춘이의 깊고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친구는 카톡으로 상황보고, 춘이가 갑자기 울음 터져 분유를 먹이려는데 잘 안되서 지나가는 청소 아주머니가 도와줬단다. 그 아주머님도 6개월된 손자가 있다고 하시며 신의 손으로 분유를 먹이시고는 쿨하게 휴지 한장을 건네며 애기 입 닦아주라고 하시곤 떠나셨단다. 이리 웃길 수가.. 역시 이 세상에는 아직 의인들이 훨씬 더 많다.


문 하나를 앞에 두고 내가 있는 이 곳에서는 우리의 프로젝트가 마치 엄청난 사업성이 있을 것만 같이 진지한 분위기속에서 발표 중이고, 문 밖 저쪽 라운지에서는 우리 춘이와 나의 친구가 서로 진땀 빼며 기싸움을 하고 있을 것인 이 상황적 괴리가 순간 참 웃기기도 하고 주로 행복하기도 하고 아주 살짝 서글프기도 했다.

대기시간까지 합쳐 장장 4시간을 창업센터에서 춘이와 보내는 동안, 지나가는 창업 준비하는 분들이 춘이를 보며 신기해 하기도 했고, 귀엽다고 만져주기도 했으며 나 없는 동안 어떤 분은 애기도 출근했냐며 놀라워했고, 또 잠깐의 울음소리로 일하는 그들에게 민폐도 끼쳤을 것이었다. 하지만 춘이와 함께 앞으로 반발짝이나마 나아갈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고 행복했다. 예전의 나로 돌아간 느낌도 잠시 받았다.

원래 애기가 울어서 잠깐이라도 달래다보면 그게 불과 3,4분의 짧은 시간이라도 정신적인 피로까지 겹쳐 당이 훅 떨어지는 법인데, 괜찮냐는 나의 걱정에 친구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자기 체력이 강한거 모르냐고 하는데...흠, 눈이 만났을 때와 다르게 좀 꺼져있었다.ㅋㅋㅋ

청년창업가 지원하는데 웬 애기엄마가 애기랑 왔으니 눈에 띄었을 터. 다 끝나고 가는 길 센터직원은 애기도 엄마도 수고하셨다고 하는데 왠지모르게 울컥. 말 한마디가 고마웠다.


기념샷을 찍고, 친구 밥한끼도 못사준채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져서는 퇴근한 남편과 만나 같이 귀가했다. 중간에 차가 막혀 시간이 지체되고 춘이가 들썩들썩 울기 시작해 아무 동네에 들어가 수유를 하고는 다시 재빠르게 출발. 집 앞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들어와 씻기고 재우고 그렇게 뻗었다.


지난 몇일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왔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결과를 떠나서 이렇게 하루하루 내가 도전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고 실패도 해보고 도움도 받고 도움도 주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간다면, 잘 살 수 있을 것만같은 확신이 들었다.


무알콜맥주로 빡센 하루를 자축하고 엄마와 전화로 오늘 하루간의 일을 한참 수다떤 뒤 시큰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잠들었다.


오늘의 긴 하루 일기 끝.


최연소 센터방문자가 아니었을까 해서 춘이와 기념샷 한방
발표 전 열심히 연습하는 명상덕후님. 나름 긴장되어 발표에 앞서 같이 잠시 명상했다.
나의 옛 동료가 갑자기 일일 보모로..고생많았다 친구야.
발표 전날 서울혁신파크에서 회의 미팅에 참석한 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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