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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톰 Sep 03. 2015

화가 이중섭

못 다 그린 그리움..

그림이 로망이었던 한 시절이 있었고 그때의 나는 행복했었다.
둔한 손길이 닿기엔 너무 고고하여 짧은 짝 사랑에 그쳤지만 나를 설레게 했던 화구들과 그 시절에 그리움을 담아 감사드린다.


그는 해방과 한국전을 전후하여 활동했 화가이다.
그는 소와 가족애를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외롭게 살다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간염으로 쓸쓸하게 죽었다.
그리고 사후에야 비로소 그와 그의 그림은 신화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중섭이다.(1916~1956)

강렬하고 거친 터치로 소, 닭, 까마귀를 그린 유화에서부터 데생, 부드러운 채색화 그리고 은지화까지 이 중섭의 그림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다양하다.

해를 불평하는 사람/1941
저울질하는 사람/1941
여인/1942
두사람/1943

그 누구도 자신 있게  중섭의 그림 세계를 논한 사람이 없으니 단지 그의 행적을 더듬어 화가가 아닌 인간 이중섭의 쓸쓸한 시대를 추 다.

한 사람의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의 삶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시대마다 변해가는 예술의 대상을 아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린 또래들이 사과를 먹을 때 이 중섭은 사과를 그렸으며 평양 오산학교, 동경 문화학원을 거치면서 당대의 걸출했던 스승들마저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말을 아꼈을 정도로 그의 그림에 대한 천부적 재능과 자질에 관하여는 이견이 없었다.

돈으로 예술적 가치가 평가되는 현대에 이르러
그의 작품(황소) 한 점이 35억 6천만 원에 거래되었으니 객관적 작품성이라고 해도 될는지....

황 소/35억 6천만원에 경매

잘 알다시피 이 중섭은 소 화가이다.

아니 이 중섭은 소다.

스스로가 소의 눈을 닮았다고 했으며 무거 수레를 끌고 가는 소를 보고 눈물을 글썽일 만큼, 소는 중섭  그 자체였으며 그의 그림 전반을 관통하는 소재였다.


<날마다 나타나서  하루해가 저물도록 소를 보고 있는 그를 처음에는 소 도둑인 줄 알고 고발한 일도 있고 어느 농부는 그를 미친놈이라고 쫓기도 하고, 아마도 소 도둑이나 소 백정이 미쳐서 소 옆에만 나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 송도원 주민 >  

소를 든 사람
소와 어린이

*소 : 소를 듣 사람/소 /황소 /흰소/소와 남자/소와 어린이/ 서있는 소/사람을 치는 소/싸우는 소/소와 여자/떠 받으려는 소 등등
오산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 문화학원에서 공부하였고 '서양의 유파를 받아들이는 것은 창조성을 방해한다'하여 배격하였지만 야수인 루오의 그림에는 관심을 가졌고, 그림의 동질성으로 인하여 학내에서 동방의 루오라는 별명을 얻는다


*동경: 서 있는 소/소의 머리 /망월 /산의 풍경

이 중섭/ 1936년(21세) 동경 문화 학원 시절
망월
가을 / 루오

당시 후배 마사꼬와 소문난 사랑을 하게 되며 태평양 전쟁 중  치려 진 결혼식은 동화 같은 사랑의 결실이었지만 동시에 두 사람에게 긴 기다림과 그리움을 남겨준 비련의 시작이었다.

이어 발생한 한국 은 평양 부호이던  중섭의 집안을 부르주아로 몰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으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하여 몰락해버린 마사꼬의 집안 역시 두 사람의 운명을 더욱 가혹하게 몰아갔다.

짧은 기간 원산에서의 신혼생활을 통하여 마사꼬는 고추장, 마늘, 된장을 잘 먹는'이 남덕'이 되어버렸고 집의 마당에서 키우는 닭을 모티브로 의 그림에는 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중섭은 소와 마찬가지로 닭의 이가 옮아 고생할 정도로 끊임없는 관찰을 통해야만 천재성을 발휘하는 예술가였다.

이 무렵 태어난  첫아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아픔을 겪으면서 군 동화(아이들이 무리 지어 노는 그림)를 비롯하여 비현실적이며 천진난만한 그림 세계를 열어간다.

이 중섭과 마사코의 연애시절 (발을다친 마사코)
1945년 5월(30세)/원산


소년
닭과 가족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혁명적이지 않은 그의 그림은 북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전세에 따라 원산 부두를 통하여 남하하게 된다.
 중섭이 원산 시절에 그린 그림은 가장 안정적이며 악 조건에 시달린 남하 이후의 그림들보다 작품성이 더 나아 보다라는 친구들의 평과 함께 유작은 적으나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시절이었다.(1943-1950)


*원산 : 소년 /세 사람 /해를 불평하는 사람 /소와 여인/ 누워 있는 여자/닭과 가족/두 어린 이와 복숭아 /소와 어린이 등

두 어린이와 복숭아
소와 여인

남하 후 부산 임정부 수용소에 거류하게 되면서 이들의 부산 피난살이는 시작된다. 주먹밥과 구호물자 담요로 생활하며 중섭은 저 홀로 부산 바닥을 떠돌았다.

이 시절 부산은  중섭에게 암흑기였다
그림을 그릴 화구조차도 없이 떠돌던 그는 살길을 찾아 불현듯 제주도를 떠올렸다.

서귀포에서 1.4 평 남짓한 방 한 칸을 얻어 시작한 주도에서의 생활은 산방산,낙조의 장관,유채꽃 등 고호가 해바라기를 그린 아들르의 풍광과 유사했을 것이다.

비록 바닷게를 잡고 이삭을 주으며 연명했지만 7개월 동안 머문 제주에서의 생활은  중섭에게도 가족에게도 그의 미술에게도 가장 빛나는 한 시절이었다.
때론 보리쌀 한 됫박과 바꿔지긴 했어도 20여 점의 그림을 그렸고 그의 화풍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월남 이후 아내와 두 아이들이 함께 한 단란한 시절이었다.

*제주도 : 섶섬이 보이는 풍경/서귀포의 환상/ 바닷가와 아이들 / 게에 물린 아이들 외

섶 섬이 보이는 풍경/1951
섶섬이 보이는 풍경/서귀포시
서귀포의 환상
바닷가의 아이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이들
너를 숨쉬고/ 동시대 시인 김용호 시의 동명 작품


날이 날마다

오가는 길에

너 만 있다

숱한 사람

오가는 길에

너 만이 있어

어항 

한 마리 운명의

금붕어처럼

너를 숨 쉬고

  살아간다

김 용호 (1912 ~1973)/그림 뒷면에 시인의 육필 시가 쓰져 있다.


다시 부산으로 오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심적으론 풍요로웠을지 모르지만 제주에서의 7개월 역시 굶주림과 헐벗은 피난생활의 연장임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갑자기 비대해져 버린 황색의 도
부산으로 돌아온  중섭 일가는 다시 피난만 수용소에 재 수용되고 중섭은 부두의 날품팔이로 연명해 나간다.
이때 시인 구상이 어렵사리 제안한 경향 신문 소설 삽화의 일자리를 거절한 것은 오래 오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삽화는 그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굶어 죽더라도 지키고 싶은 예술에 대한 지조였을까.

반면에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린 박수근에 비하면 그 만의 비뚤어진 도그마였을지도 모르겠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점점 우울해져 갔고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결국 아버지의 사망 소식과 피난살이에 지친 남덕은 다시 일본인 마사꼬로 돌아와 두 아이를 데리고 부산의 일본인 수용소를 거쳐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게 된다.

재회를 기약한 구슬픈 이별 후 간간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그는 더 말이 없어지고 그저 친구들을 따라 다니며 술만 마셨다.
이즈음  중섭은 어둠 속의 은빛 희망처럼 담배 은지에 날카로운  송곳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 유명한 은지화를 시작한다.

동경 유학시절의 착안 이기는 하지만 가난과 화구에 대한 옹색함이 배경이 된 이 독특한 시도는  중섭 미술만의 전유물 이었다.

순백의 평면이 아니라 담배 포장으로 구겨진 흔적을 통하여 그의 구도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은지화 : 발가벗은 아이와 게/게와 물고기가 있는 가족/사랑 1/사랑 2/가족에게 둘려 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외

사랑
물고기와 아이들
가족에 둘려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부산에 홀로 남은 그는 보수동, 영도, 서면, 완월동 등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유랑 걸식하였다.
 중섭은 어느 유파에도 눈 돌리지 않는 독단적 신념을 고수했으며 세잔,브라크,,피카소 그 누구도 자신과 비교할 수 없다 라는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담보하여 그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확신했다.

사실 그의 그림은 그 어느 미술 사조에도 편입되지 않았으며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니
이로 인하여 더욱 외로운 화가였다.

굳이 대입하자면 소..까마귀 등에서 나타나는 굵고 힘찬 선은 포비즘 (Fauvisme/야수파)의 영향을 받았고 아이들의 얼굴 등에서는 미니말리즘/Minimalism의 경향을 보인다 하나 중섭은 데생에 더 강한 화가였었다.

이는 굵은 선,세필,스크래치,은지화 기법 등과 같은  중섭의 다양한 회화 기법 중 하나일  뿐이며 미니멀리즘 또한 전성기인 60년대보다 10년이나 앞선 만의 표현 방식이었다.

서양 유파에의 대입은 서구/분석 지향적인 일부 평론가의 교과서적 분석일 뿐 <중섭의 예술이 어디에 뿌리를 박고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한 김광균(시인/와사등)의 이중섭찬讚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53년 종전 후 서울로 떠나는 동료 화가들을 전송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부산 바닥을 헤매던 그는 친구와 함께 통영으로 자리를 옮긴다.


*부산 : 떠 받으려는 소/황소/판잣집 화실/바닷가의 아이들 /부부 /범일동 풍경/ 완월동 풍경

춤/마티즈,야수파 Fauvisme
바닷가의 아이들
부부
범일동 풍경
판자집 화실
문현동 풍경

부산은 각박했으나 통영은 후덕했고 무엇보다 전쟁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통영은 그에게 안정된 분위기를 제공해 주었고
풍경화, 은지화에 이에 다시 황소가 되살아나며  중섭 회화의 중간적 절정을 이루었다.

때마침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해운공사 소속 선원증이 발급되어 일본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선원증은 여권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항구까지는 갈 수 있으나 내륙으로는 갈 수 없는 제약된 조건으로 중섭의 시도는 일종 밀입국이었다.

 중섭이 탄 배는 고베항에 기항 , 동경에서 극적으로 마사꼬와 아이들과 상봉하게  된다.

평전 등 대부분의 기록들은 장모의 야멸찬 박대로 5일 만에 귀국할  수밖에 없다고 묘사했으나 후일 한국을 찾은 마사꼬의 말로는 장모는 중섭을 극진히 대접했으며 중섭이 불법 체류자로 처벌받는 것과 고베에서 동경까지 오는데 도움을 준 사람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 귀국을 권고했다고 한다 (?).

마사꼬가 어렵게 마련하여 중섭에게 보낸 돈이 전달 과정에서  착복되었음을 알았고 이는 향후 마사꼬가 20년에 걸쳐 갚아야 했던 큰 돈 이었다고 한다.

 중섭은 5일을 체류한 후 재회를 기약하며 통영으로 돌아왔고 월남 이후 최고의 열정으로 그림에 몰입하였으며 그 결과 4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완성시켰다.


* 통영 : 달과 까마귀/흰소/통영 풍경/피난민과 첫눈/ 그리운 제주도/가족과 어머니 외

통영풍경
달과 까마귀
남망산 오르는 길이보이는 풍경/1954
충렬사풍경
그리운 제주도 풍경/종이에 잉크
가족과 어머니
흰소

중섭은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고 절망적이라 해도 절대로 그림에 그런 분위기를 투영시키지 않았다.
어떻게 부산에서 , 서귀포에서 복사꽃이 피고 잉어 뛰놀고 아이들이 게와 노는 그럼을 그릴 수 있었을까.

마침내 중섭은 서울로 올라 왔지만 여기저기 식객으로 떠돌았고 명동에서의 혼탁한 절규와 술 주정으로 하루하루를 이어나간다.

전쟁이 남긴 황량한 폐허 속에서 가족에 대한 비애와 그리움으로 함몰되어 갔으며 간혹 그림이 팔리면 명동 술집을 드나들면서 탕진해 버렸다.

그리고 그림은 동료 화가들에게 화구 물감 등을 조금씩 얻어다가 그리는 정도에 머물렀으며 그림엔 점점 더 가족에 대한 절망적인 그리움이 묻어 났으나 당시의 상황으론 더욱이 떠돌이 화가 중섭의 신분으로 합법적으로 동경까지 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시 화단의 대세는 추상이었으나  '진짜 좋은 그림은 농부도 아는 거야'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유행처럼 서구 유파에 휩쓸리는 풍토를 꼬집었고 그 만의 독창적 세계를 고집하였다.


중섭은 1955년 1월 미도파에서 45점의 작품을 내걸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작품전을 가진다.

알게 모르게 규합된 그의 추종자들로서 작품전은 호황을 누렸고 많은 호평을 받았다.

성당 부근/1955
자화상/1955

하지만 그 후 중섭은 팔리지 않은 그림, 전시되지 않은 그림들을 태우거나 우물에 빠뜨리는등 기행과 발작증세를 나타내어 입원하게 되고 정신분열증에 거식,피해망상,가해증 까지 겹쳐 몸까지 앙상하게 쇠약해지며 최악의 상태에 이르런다.

그의 극심한 병증 뒤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극이 잠재적으로 내포되어 있지 않았을까.

병원에서의 지루한 생활 속에 그는 화단의 관심에서 곧 사라져갔다.
그가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 속에는 절절한 사랑이 녹아있으며 이중섭과 친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술보다 그의 인간 냄새에 취했었다고  이야기한다.

중섭은 문인이나 연극인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좋은 영감을 얻었으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굽히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장점과 예술적 감흥을  흡수할 줄아는 겸손한 화가였다.

일시 회복되어 사회로 복귀한 중섭은 잠깐 위험한 즐거움을 즐기기도 하였으나 폭 영양실 건강이 유지되기가 어려웠고 결국 돌이킬 수을 만큼 간염이 위독해진 그는 56년 9월 6일 11시 4분 그리운 모든 것들을 접어둔 채 조용히 외롭고 고단한 삶을 마무리한다.
향년 41


가족에게 보낸 엽서화(편지화)88점을 포함 총 320점 (은지화 120. 유화 60. 드로잉 150)의 유작을 남겼다.

꼬리가 물린채 서로죽이려는 야수 / 1955
돌아오지 않는 강/1956
편지화
엽서화
엽서화

그림의 이해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판단이라는
 중섭의 말처럼 취향에 따라 그림의 호불호가 나뉠 것이다.


나는 거친 선과 강렬한 색상의 그림보다 은지화, 데,부드럽게 채색된 그림을 더 좋아한다.
어느 것이든지 향토적 정서와 사랑 그리고 그리움을 바탕으로 혼의 그림을 그려온 화가  중섭.


그의 자부심처럼 세,,피카소에 결코 뒤지지 않는 화가가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한 예술가의 외로움과 고단함이 그림으로 남아 비로소 빛을 발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러운 생각이 
<예술가는 그가 받아들이는 비극을 어느 만큼 그의 예술에 관련시 키느냐에 의해서 예술가와
예술적 치정이  나뉜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만일 그가 21세기의 풍요와 안락함 속에서 살고 있다면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그림이 그려진 장소와 년도 유작의 수는 정확하지 않다.


*가족

이 남덕,이 태현,이 대성


도원
길 떠나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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