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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톰 Jan 08. 2022

피카소

상상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현실이다 / 피카소

피카 소하면 먼저 그의 《 입체주의  Cubism 》를 떠올린다.

1908년 브라크의 그림을 보고 마티즈가 Cubism이라고 호칭한 이후, 7여 년 만에 단명한 사조이지만 미술사를 통틀어 Cubism이 가져온 충격과  파장은 태풍급이다.

일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Cubism은 여전히  닫혀있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제각각의 평론에 따라 색이 변하는 이상의  '오감도'나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 같다면 너무 가벼운 비유일까.

먼저 Cubism에 앞서간 피카소의 미술 세계를 아는 것이 조금 쉽게 Cubism에 다가서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유할 수 있는 그림이 필요하고, 펫북은 올릴 수 있는 그림이 30장으로 제한되어 있어, 피카소의 탄생부터 Cubism의 전환점이 된 〈아비뇽의 처녀들〉까지를 Part 1., Cubism의 태동과 완성 , 그리고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까지를 Part 2.로 구분하였다.   


 Part 1.

현대 미술의 혁명가.

조루즈 브라크와 함께 Cubism을 창시했으며, 현대 미술의 아방가르드 피카소는  가장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로 평가 받는다.

그는 1881년 (138년전) 지중해를 마주 보는 스페인의 항구 도시 ' 말라가 '에서 태어 났다.

가난했으나 화목했으며, 화가 겸  소묘 교사로 일한 아버지는 미술에  특별한 재능올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스페인이 그러하듯 투우에 대한 열정이  반영된 〈투우와  비둘기 〉〈말을 탄 투우사〉 〈 헤라클레스〉의 그 림들은 아홉살  소년의 실력 그 이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 그림2.) 〈헤라클레스〉〈투우와  비둘기〉〈말을 탄투우사〉1890/9 세


14세때 피카소 가족은 바르셀로나로 이사 하였고, 그는 미술 학교에 입학한다.

이때부터 피카소의 재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 했으며,

 그의 그림을 본 아버지는 자신의 화구를 피카소에게 물려주고 그림에서 손을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3살때 그린 최초의 유화 < 모자를 쓴 걸인> < 맨발의 소녀>에서 보듯 ,피카소는 주로 가족과 빈민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3.) < 모자를 쓴 걸인>< 맨발의 소녀>1894/13 세


15세 때 여동생을 모델로 하여 그린  <첫 영성체> 는 바르셀로나 전시회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았고, 수도원으로 부터 두 점의 그림을 의뢰 받는다.

연이어 아버지(의사)를 모델로 하여 대형 캠버스( 약2.5 m x 2 m) 에 그런〈과학과 자비〉는  마드리드 미술 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한다.

* 그림 4.)〈첫 영성체〉〈과학과 자비〉1896/15


17세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잠시 마드리드 왕립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나, 만족하지 못한 피카소는 곧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모더니스트 카페인《네마리 고양이》에서 다양한 예술가 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벽면을  그림으로 치장한 카페 네 마리 고양이는 미술 전시장의 역할뿐 아니라

 음악, 시 낭송, 연극등 각가지 공연들의 행사장 이었다.  

철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이 카페에서, 피카소는  음악, 시 ,철학에 대해 많을 것을 접할 수 있었으며  그의 미술과 철학 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몇해 후, 피카소는  문화적  교류와 자유 분망한  분위기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었던 이 시기의 카페를 그림으로 복제해 낸다.

* 그림 5.)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두명의곡예사,1901〉1901/20


열 여덟살이 되던 1899년 봄,  피카소는 네 마리 고양이에서  [카사헤마스]를 만난다.

그는 열정을 가진 시인 이었으며 화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카사헤마스는 알코올과 모르핀에  중독되어 있었다.

19살의 가을, 피카소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버린 카사헤마스와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이 시기 파리는 유럽 전체에서 몰려온 예술가들의 열기로 들끓었으며,  드가와 고흐의 화풍은 피카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신비에 눈 뜬 피카소는 두달 간의  짧은 체류 동안 자신의 개성이 된 첫번째 작품,

파리의 카페와 카바레에서 느낄수 있는 자유 분방한 분위기를 묘사한 그림,

 〈물랭 드 라 갈레트〉를그린다.

* 그림 6.)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 /1900/19

* 그림 7.)  〈피카소〉〈외투를 입은 자 화상 〉1901/20〈자화상〉1907/ 26

* 그림 8.)  〈매춘부〉〈푸른 옷의 여인〉1901/20


1901년 2월 17일, 불행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 파리로 돌아온 카사헤마스는 정신 장애로 어느 카페에서 자살했다.

 피카소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애도와 탄식이 담긴

〈카사헤마스의 죽음〉〈 관 속의 카사헤마스,〉〈 초혼-카사헤마스 의 매장〉 등

일 련의 그림을 그려 나간다.

카사헤마스가 자살 하던 날, 피카소는 파리가 아닌 바르셀로나에 체류 중이었음으로 ,

카사헤마스의 사후 그려진 그림들은 피카소의 회상이 만든 창작인 것같다.   〈카사헤마스의 죽음〉에서는 파리에서 영향을  받은 고흐의 두터운 임파스토 , 강렬한 색채등이 차용되었고, 한 동안  그는 후기 인상파의 발자취를 따라 다닌다.   


* 그림 9.)   〈카사헤마스의 죽음〉1901/21

* 그림 10.) 〈초혼-카사헤마스의 매장〉1901/20


이후 피카소는 9개월 간 파리에 머물며, 미술상 볼라르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개최 하는 등 화가로서의 경력들을 하나씩 쌓아 나갔다.

어김없이 가난이 따라 다녔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은 배고프지 않았다.

 이듬해 1월 피카소가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그는 거의 무일푼의 상태였다.

이 작업실에서 저 작업실로 떠돌아 다녀야 했으며, 화려한 채색과 파리의 밤 풍경은  더 이상 피카소의 소유가 아니었다.

걸인, 행상인, 유랑자들 만이 피카소의 캔바스 위에서 쉴 수 있었 으며,

축척된 절망과 절박함, 카사헤마스의 망령이 뒤 덮은  피카소의 팔레트는

《바르셀로나 블루스/Les Bleus de Barcelone》라 불리는  청색 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 (1901 ~1904)

이 시기의 그림들,〈두 자매〉는  청색 시대의 화집 중 인상적인 작품으로

떠도는집시 자매의 창 백한 얼굴,부스스 하 고 무기력한 표정이 안스러움을 더한다

〈바닷가의 여인과 아이〉은 아이를 안고 기도하는 듯한 손에  한송이 붉은색 꽃을 든 여인이 물가에 서 있다.

 온통 청색인 캔바스위에  도드라진 붉은 꽃과 하얀 면사포가....

난 구도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 성병의 고통을 가진 불운한 여인 ' 이라는 평자의 해설은 공감하기 힘들다.

〈삶〉 역시 중요한 작품 인 듯하다.

다의적 해석이 가능한 내용이란 생각이 들며,분분한 논란 끝에

반 나체 상태의 남자는 카사헤마스 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뒤에 놓인 캔바스 위에 그려진 웅크린 자세의 인물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셀레스티나〉외눈의 이 여인은 질병 빈곤 소외 노쇠 등 인간이 가진 108 번뇌를

응집해 놓은 듯 하다.

〈다림질 하는 여인〉 에서 는 마침내 청색 시대 와의 고별을 알리는 듯, 푸른 색조는 엷어지고 그림의 상부에서는 잿빛이 섞인 붉은색이 엷게 나타나기시작한다.

피카소가 이 무기력하고 암울한 청색 터널을  빠져 나오기 까지는 5,6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후일 피카소는 이 시대와 이 시대 의 그림들을 별로 좋아한 것 같지 않다.


* 그림 11.) 〈두자매〉1902/21

* 그림 12.) 〈바닷가 여인과 아이〉1901/21

* 그림 13.) 〈기타치는 늙은 맹인〉〈맹인의 식사〉/1903/22

* 그림 14.) 〈스프〉1903/22

* 그림 15.) 〈삶〉1903/22

* 그림 16.) 〈다림질 하는 여인〉1903/22

* 그림 17.) 〈포옹 〉1903〈몸단장〉1906

* 그림 18.) 〈셀레스티나〉1904/23


1904년 4월/23세, 피카소는 드디어 몽마르트르 언덕을 등정한다.  

쓰러져가는 목조 건물이 얽히고 설킨 동네. ( 세탁선이라  불리는)

낡은 공장을 개조하여 만든 수십개의 작업실에 모딜리아니를 비롯

수 많은 예술가들이 이 곳을  스쳐 갔으며, 유럽 예술의 메카가 되었다.

얼마후 피카소는 이 무질서한  난립속에서 몽마르트르의 구심점이 되었고,

 가을부터   모델  '페르 난드 올리비에' 와 이 어수선한 작업실에서 동거한다.

 그리고, 둘은  7년간의 연인이 되었다.  

후일 올레비에는 피카소의 찬란한 예술 혼, 친근한 동지 가난과 함께 한 나날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아, 몽마르트르


피카소가 파리에서 찾아낸 새로운 모티브는 유랑극단과 그들의 삶이었다.

서러운 유랑에 유희와 조롱까지 짊어진 피에로의 얼굴이,

 어슬픈 불어 와 억울한 거래로 굳어져가는 자신의 얼굴과 닮아져 있음을 느꼈을 것일까.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은 곡예사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밝고 따뜻하며 다양해 진다.


올리비에와의 사랑과  따스한 주변과의 만남,  그리고 새로운 예술을 향한 포부 때문 일 것이다.  

서서히 지워진 카사헤마스 의 망령  또한....

피카소가 몽마르트로 이주한 1904년 부터 Cubism 에 눈뜨기 시작하는 1906년 까지,

3년 남짓한 시기를 《 장미빛 시대 》 라 부른다.

바르셀로나의 단색조와 입체감 없는 평면, 늘어진 인체 의 형상에서 탈피하여, 새로이 접한 고갱과 세잔 특히 세잔 의  ' 빛의 시각적 표현 ' 을 모방한 화풍은 피카소를 잠시 새로운 세상에 머물게 했다.


 보이는 대로 표현 하고  보이는 대로 보는, 이 시기의 그림들은  선명하다.

해설은 사족이다.

유랑 극단과 광대가 장밋 빛 시대의  대표적 아이콘 이라면  

그림.20.)〈앉아있는 어릿광대〉1905/24
* 그림 21.〈곡예사 가족〉1905
그림 22.) 〈공위의 곡예사>1905




23.) 〈원숭이와 곡예사의 가족〉1905






그림 24.)〈어머니와 아들> 1905

좀처럼 나타나지 않던 <누드> 또한 젊은 피카소의  모티브가된다.

〈네덜란드 여인〉〈꽃 바구니를 든 소녀〉 〈무릎을 세우고 앉은 누드〉....

 ..그림 19.) 〈무릎을 세우고 앉은 누드〉 1903  〈앉아있는 누드〉 1905
 그림 25.) 〈네덜란드 여인〉〈 세명의 네덜란드 소녀〉1905



정신이 남루한 시대에, 예술의 서열이 돈 이라면, 놀랄만한...

2018년 5월 장미 빛 시대의 대표작 〈꽃 바구니를 든 소녀 〉 가 경매에서 1억1천500만 달러(약 1천 241억 원)에 낙찰되었다.

 〈꽃 바구니를 든 소녀〉1905〈 알제의 여인들>1955

피카소의 작품으로는 1억7천937만 달러(약 2천 5억 원) 에 낙찰된 Cubism의 회화

‘알제의 여인들’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경매가다.

) 〈명상〉〈부채를 든 소녀〉 1905




〈파이프를 든 소년〉1905


〈두 여인의 누드〉 1906

* 그림 19.) 〈무릎을 세우고 앉은 누드〉 1903  〈앉아있는 누드〉 1905

* 그림.20.)〈앉아있는 어릿광대〉1905/24

* 그림 21.〈곡예사 가족〉1905

* 그림 22.) 〈공위의 곡예사>1905

* 그림 23.) 〈원숭이와 곡예사의 가족〉1905

* 그림 24.)〈어머니와 아들> 1905

* 그림 25.) 〈네덜란드 여인〉〈 세명의 네덜란드 소녀〉1905

* 그림 26.) 〈꽃 바구니를 든 소녀〉1905〈 알제의 여인들>1955

* 그림 27.) 〈명상〉〈부채를 든 소녀〉 1905

* 그림 28.) 〈파이프를 든 소년〉1905

* 그림 29.) 〈두 여인의 누드〉 1906 /26 ,〈 자화상〉1907/27


장미 빛시대를 거치며, 많은 습작 끝에, 1907년/25세, 피카소는  사창가의 여인을 소재로한 〈아비뇽의 처녀들을〉을 완성 한다.

그림.30)〈아비뇽의 처녀들〉〈아비뇽의 처녀들 습작 〉1907/25

현재 뉴욕 미술관에 보 관되어 있는 대형 캠버스의 (약 2.5m X  2.5 m ) 이 그림은, 그 자체로서는 Cubism의 회화가 아니다.

그러나 이제껏 본적 없는  파격.

원근법의 생략, 형체의 단순화 ,무시된 모사로 캔바스를 채운 이 작품은 Cubism의 포문을 연,   20세기 현대 미술의 이단아 로 평가된다.

피카소와 함께 Cubism 의 창시자인 브라크는 처음 이 그림을 본 충격을 ' 가솔린을 강제로 들어 마시고 불을 내뿜는 느낌 ' 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비뇽의 다섯 처녀들은 바로 공개되지 않은 채,

오랫 동안 때를 기다리며 피카소의 화실에서 침묵하다, 1916년 '프랑스 근대 미 술전' 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어떤 긍정적 평가를 받지못하며 침묵하 다, 1939년 '우리 시대의 미술전'을 통하여 32년만에 비로소 20세기 미술의 근간을 이루는 작품으로 평가 받기 시작했다.

Cubism 의 비 대중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피카소는 타인 (1916년,앙드레 살몽)이 붙인 이 그림의 제목( 아비뇽의 처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평생 이 그림을 《 철학의 사창가 》라고 호명했다.

5개월간에 걸친 구상과 습작에서는, 2명의 남자,책을 든 의대생과 선원을포함한7 명이 등장하지만 최종 선택에서 다섯명의 매춘부 만 그려진다. 오직 그 녀들 만을 위한 그림이길 바란 피카소의 선택이었다.

 * 그림.30)〈아비뇽의 처녀들〉〈아비뇽의 처녀들 습작 〉1907/25


 ☆ To be concluded in the Part 2.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


피카소의 미술 철학이기도 하겠지만, 점점 추상으로 기울어져 가는   Cubism의 변명 처럼 들린다.


원시 혹은 순수 그리고 세잔의 도형.

피카소와 브라크의 Cubism이 형성될 때까지, 이 둘은 커다란 중심 축으로 작용한다.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전후하여 피카소는  아프리카 미술에 매혹된다.

먼지를 뒤집어쓴  전시물들로 가득한 아프리카 민속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 들였으며,  가봉 팜족 가면과 같은 물건들은 가릴 것없이 중고 미술상을 통하여 사들인다.


단순한 형체,투박하며 거친 선을 가진 이 형상들은

피카소에게 신비한 영감을 불어 넣으며

<아비뇽의 처녀들/1907,27세>을 포함하여,

<2. 세 여인, 팜족 가면 /1908>

2. 세 여인, 팜족 가면 /1908>
3.상반신의 여인, 숲속의 요정 /1908>
부채를 든 여인/1909>우정 /1909>


< 3.상반신의 여인, 숲속의 요정 /1908>

<4.부채를 든 여인/1909>

<4.우정 /1909> 등 여러 그림에 투영되어  초기 Cubism의 자양분이 된다.


이들 역시 Cubism의 포괄적인 특징인

단순화된 형태, 녹,황토등으로 제한된 색채, 빛과 원근법을 무시한, 기존 회화의 틀을 무너뜨리는 파격 이었다.


도발적 원시주의에 가세하여 입체주의 형성에 큰 원동력이 된 것은 세잔의 도형 이론이다.

원근법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캔버스에  입체적으로 옮기는 기술이다.

크고 선명하게 혹은 작고 흐린 변화를 통하여 입체감을 주며, 풍경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한 화면에  하나의 눈(투시점)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잔은 하나의 눈만으로 그려진 그림은 속임수라 결론짓고,

<6.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1890 ~1894 >

<6. 사과와 오렌지 1895 ~1900> 등에서 두개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이를 한 화면에 그려넣는 시도를 한다.

(세잔은 주로 높은 시점과 먼 시점을 선호 하였다)

그리하여 이중 시점을 통하여 그려진 세잔의 그림은

안정적인 형태의 과일들과 곧 쏟아져 내릴 듯 불안해 보이는 과일들이  한 화면에 혼재한다.

두개의 눈,각각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 본 대상을 한 평면에 옮겼기 때문이다.


각각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한 화면에 그리는 세잔의 도형 이론은, 피카소,브라크 외 들로네 등 파리의 여러 화가들에게도  호응을 얻는다.

들로네는 웅장한 에펠탑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하여 각각 아래와 위에서 본 두개의 구조물 로 분할하였고, 주변의 불빛과 마을을 좌우에 배치 한

<7. 에펠탑/1910>을 그렸다.

후일  일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Cubism 이 종식된 이후에도 피카소는

<조각가 /1931>

<8. 도라마르의 초상/1937>

<8. 마리 테레즈/1937>  


<센강의 처녀들/1950> 등 그의 상징이 된 수많은 그림들을 이 기법을 응용하여 그려낸다.


그 어디에서도 도나마르( 피카소의 연인 )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찾을 수 없는 대표작, <9. 우는 여인/1937>에 이르기 까지.

우는 여인/1937

세잔은 또한

<10. 프로방스의 언덕과 산/1880>

<10. 에스타크의 바다/ 1878 ~ 1882>등 에서 보듯 

산, 바다,언덕 등의 자연을 구, 원통, 원추,입방체의 도형으로 치환하며 화면에 옮기는 기하하적 Cubism 의 효시가 된다.

이후 세잔의 Cubism 은 피카소,브라크 등을 거치며 다양하게 진화 해 나가며

<11.피카소-저수지/1 9 09>

<11. 피카소-토르토사의 벽돌공장 / 1908>

<11. 브라크- 데스타크의 집들/1908>


<12. 페르낭 레제 -바늘질하는여인/1910>

<12. 페르낭 레제 -세 여인/1911>

<피카소- 바느질하는 여인/ 1910> 등의 그림들을 남긴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상의 실체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 후일 Cubism이 추상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특히 <4. 피카소-부채를 든 여인>은 세잔풍의 Cubis m 과 원시 미술의 흔적이 동시에 나타나는 초기 Cubism 의 교본인 듯하다.

피카소-부채를 든 여인>

그리고 이 때를 전후하여

<13. 장 매칭거-간식/1911>

<13. 알베르 글레즈-플록스를 든 여인/1910>

<13. 앙드레 드랭-카다케의풍경/ 1910>

등도  Cubism에 합류하여 영역을 확대 하였다.

3차원의 공간에 사는 우리들은 대상의 모든것을 한꺼번에 보지 못한다.

앞을 보면 뒤를 보지 못하고 아래를 볼 땐 위를 보지 못한다.

Cubism의 의도는 모든 방향에서 바라 보이는 각각의 전경을 한 캔버스 위에  담으려는 시도 일 것이다.

2차원의 캔버스에서 이러한  ‘보는 법’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원근법이 지배했다.


기하학적이고 다시점이 가져온 효과가  부분적으로 고전을 대치 했다해도, 피카소와 브라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러한 끊임없는시도를 통하여,1910년대를 지나면서 입체주의는 혁신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한다.

<14. 피카소-볼라르의 초상 / 1910>

<14. 빌헤름 우데의 초상/ 1910> 에서 보는 것처럼,

다양한 시점에서 관찰 된 형상은

유리 파편처럼  해체되고 다시 캔바스 위에 재 구성 한다.

조각 조각에 투영된 모습을 통해, 대상의 앞, 뒤, 옆면을 모두 보여 주겠다는 시도이다.

그런데 화폭에 표현되는 모습은 사실적인 형태가 아니라 화가의 의도에 따라 재 구성되어 그려진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처음부터 이런 혁신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 우리들이 (피카소 & 브라크)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 했을때, Cubism 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마음이 가는 데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것이 Cubism이 되었다 "


후일 미술 사학자들은 Cubism 을 세 가지 흐름으로 구분한다.

세잔의 도형 이론에 영향을 받아 태동했던 초기 Cubism 혹은 세잔 형식의 Cubism을 시작으로,

대상의 형체를 알수 없을 정도로 분해하여,

추상화 되어가는 시기를 분석적 Cubism,

마지막으로 회화에 문자와 콜라주 기법등이 도입되고 일차대전으로 Cubism 이 막을 내릴 때 까지를 종합적 Cubism 으로 구분한다.


초기 Cubism에서 분석적 Cubism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작품,  <15. 만돌린을 든 소녀/1910>

          <15. 안락 의자에 앉은 여인/1910> 은 그 형체와 주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있다.

그러나 대상의 해체와 재 구성을 통한 Cubism 의 회화는 점점 난이도가 더해져,

<16. 피카소- 아코디언 연주자 /1911> 와

피카소- 아코디언 연주자 /1911

< 17. 브라크- 기타를 든 남자11911> 는 두 화가의 그림을 분간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브라크- 기타를 든 남자11911>

피카소와 브라크의 1911 년경의 그림들은 대상이 무엇

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상은 선과 면의 짜임,

명암의 분포, 거칠고 매끄러움 등 질감으로만 . 나타난다.

이 때문에 리얼리티나 진실의 재현은 불가능해진다.  


대중에게 그들의 작품은 자의적이고 추상적인 기하학 일 뿐 이었다.

<서있는 누드/ 1910>

<18. 브라크-포루투갈인 / 1912>

<18. 기타 연주자 /1910> 등

누구도 이 그림의 미로를 헤쳐 나가지 못했다.

그림을 가져가는 화상들 까지도.


이것은 대상을 더욱 진실되게 표현하리라는 초기의

의도와 멀어지고 추상화에 가 끼워 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대상의 리얼리티는 사라졌다.


추상으로의 진보를 원치 않았던 피카소는 현실과 격리된 분석적 Cubism을 떠난다.

그러나  Cubism은 새롭게 돌아온다.(종합적 Cubism)


피카소와 브라크는 리얼리티를 재현하기 위해

몇 가지 조형적 방법을 탐구했다.

대상을 기호화하는 것,  인쇄 활자체를 화면에 도입하는 것 그리고 물감이 아닌 외부의 질감을 도입 하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그동안 주된 정물의 소재였던 유리잔, 담뱃대,

악기 등을 특징적인 모양으로 단순화 했다.

삼각형의 포도  주전자 직사각형의 컵, 가는 원주모양의 촛대와 같이 기호화된 형상들로 만들었다.

이 형상들을 이용하여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게 정리하였다


또 그림에 설명을 덧붙인 것같이 어색하지만,

<19. 마  졸리(치터 또는 기타를 든 여인/1912>에서는

분석적 Cubism의 화풍에  MA JOILE라는 연가에서 유래 된 활자들 투영하여 그림이 음악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19. 피카소-투우사/1912> 에서는 보다 많은 활자를 그림 속에 서 찾을 수 있다.

화면 위에 나타난 Le Torero는 투우사를 의미하며, Nimes은 그가 투우를 보았던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이 남아 있는 프랑스의 지방도시를 가리킨다.


<20. 피카소-건축가의 테이블/1912>에는 연인 Ma Jolie와 술이름 Marc, 또 피카소의 부재시 그를 방문했던 사람이 남긴 명함 Mrs Gertrude Stein까지도 그림의 일부가 되었다


< 20. 피카소-작크 조가비/1912 > 는 까페 테이블의

실제 장면이다.

테이블의 모양이 타원형의 캔버스로 암시되어 있고,

중앙에 점심 식사인 작크 조가비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 Notre avenir est dans l' air" 라는 제목이 인쇄된 잡지가 비스듬하게 놓여 있음을 볼 수 있고, 술잔, 컵, 담배대, 신문 등이 기호화되거나 문자로 그려져 있다.


1912년 9월 어느 날 브라크는 아비뇽 시내를 거닐다가

상점에 진열된 나무무늬 벽지를 보았다. 질감표현을 위해 그림 위에 나무무늬를 묘사하던 그는 이를 구입하여 화면에 갖다 붙이는, 꼴라쥬 collage기법을 탄생 시킨다.

<21. 브라크-과일 접시와 컵/1912>은 최초의 꼴라쥬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까페 테이블에 BAR라는 활자로 장소를 표시하고 NAL은 (jour)nal, 신문을 그리고 나무 무늬 벽지로 테이블의 질감을 표시했다.

그 위에 기호화 된 포도 접시와 맥주 컵을 그려서  테이블의 모든 정문을 재현했다.


피카소는 더욱 과감하게 꼴라쥬를 시도한다.

<21. 등나무 의자 정물/1912>은 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을 타원형의 테이블을 캔버스에 그렸다.

테이블 둘레를 밧줄로 감아 청동으로 마감한 테이블의 테두리를  표현했으며  엮은 등나무 무늬가 인쇄된 천을

화면 위에 직접 붙였다.

그위에  레몬이 꽂힌 술잔, 컵, 담배, 신문 등을 표현 하였다.


1914년 7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피카소는 징집을 피하여 아비뇽으로 옮겨간다.

길어지는 전쟁의 와중에 Cubism에 호감을 가졌던 화가와 추종자들은 징병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리하여 포연 자욱한 전장 속에서, 르네상스에 저항한 7 년 전쟁(1908 ~ 1914)은 조용히 날개를 접는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블루스, 장미빛 시대, Cubism 을거쳐온 피카소의 그림은 1973년 4월 (93세)그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다양하게 지속된다.

<22. 낮잠/1919>

<22. 해수욕하는 여인들/1918, 38세>

<22. 해변을 달리는여인들/1922, 42세>

< 물가의 세 여인 /1921, 41세>

<23. 세 악사/1921>

<23. 거울을 보는 소녀 /1922>

<24. 꿈 /1932>

<24. 알제의 여인 /1935, 55세>

<고양이와 있는 도라마르/1941>

<거대한 두상들/1969, 89세> 등


그리고 폭력적이고  비극적인

< 25.투우: 여성 투우사의 죽음 /1933, 53세>은

4년 후 <게르니카/1937>로 재 탄생한다.  


<춤 /1925, 45세>과

< 붉은 의자에 앉아 있는 거대한 누드/1929,49세> 는 피카소가 초 현실주의에 관심을 보일 때 그린 작품이다.

춤은 화가의 초기 시절부터 열성적으로 피카소를 도운 후원자를 떠나 보낸 후, 그린 그림으로 후회, 슬픔 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 붉은 의자에 앉아 있는 거대한 누드/1929,49세>는 초 현실주의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피카소는 77세의 나이에 젊을 때부터 좋아했던 벨라스캐스의 모작, <27. 시녀/1957>를 완성한다.

그는 평생 수많은 모작을 통하여 그림의 기초를 터득했으며, 그에게 있어 모작은 단순한 작품의 흉내가 아니라,새로운 창조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28. 한국에서의 학살 >


1973년 4월,93세로 영원히 붓을 놀을 때까지

피카소만큼 왕성하게, 열정적이며 다양한 화풍의 그림을 남긴 화집은 본적이 없다.

짧은 기간에 걸친 화풍이었지만,

Cubism은  미래주의, 오르피즘, 구성주의 등 현대 미술에 영향을 미친다.


축약에 축약을 거듭했으나,  평생 5만장이 넘는 그림을 그린 피카소를 60여장의 그림에 담는 건 건방진 시도였다.

짧은 시간 동안,어색한 번역서를 되풀이 하여 읽었고, 연대와 인물,이해하지 못한는 문맥은  넘어 버렸다.

자의적 해석과  오류 투성이인, 부담없는 꼴찌의 답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피카소를 찾아가는 길은 즐거운 여행 이었다.

만일 지금,  이 여정에 동행한 친구 한, 둘이 있다면  

두터운 동지애로 손 잡고 싶다.


시대를 떠나 예술의 근본은 Humanism 이라 믿는다.

'그림은 집안의 벽을 치장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피카소의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웬지 길게 여겨지던 바깥 나들이.

다시금 겨울의 한 가운데서, 별 없는 하늘을 본다.

... 그러나 봄이면  날개를 단다 ...


천체 망원경을 구해야 겠다.

피카소의 미술 철학이기도 하겠지만, 점점 추상으로 기울어져 가는   Cubism의 변명 처럼 들린다.


원시 혹은 순수 그리고 세잔의 도형.

피카소와 브라크의 Cubism이 형성될 때까지, 이 둘은 커다란 중심 축으로 작용한다.

<아비뇽의 처녀들/1907>을 전후하여 피카소는  아프리카 미술에 매혹된다.

먼지를 뒤집어쓴  전시물들로 가득한 아프리카 민속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 들였으며,  가봉 팜족 가면과 같은 물건들은 가릴 것없이 중고 미술상을 통하여 사들인다.


단순한 형체,투박하며 거친 선을 가진 이 형상들은

피카소에게 신비한 영감을 불어 넣으며

<아비뇽의 처녀들/1907,27세>을 포함하여,

<2. 세 여인, 팜족 가면 /1908>

< 3.상반신의 여인, 숲속의 요정 /1908>

<4.부채를 든 여인/1909>

<4.우정 /1909> 등 여러 그림에 투영되어  초기 Cubism의 자양분이 된다.


이들 역시 Cubism의 포괄적인 특징인

단순화된 형태, 녹,황토등으로 제한된 색채, 빛과 원근법을 무시한, 기존 회화의 틀을 무너뜨리는 파격 이었다.


도발적 원시주의에 가세하여 입체주의 형성에 큰 원동력이 된 것은 세잔의 도형 이론이다.

원근법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캔버스에  입체적으로 옮기는 기술이다.

크고 선명하게 혹은 작고 흐린 변화를 통하여 입체감을 주며, 풍경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한 화면에  하나의 눈(투시점)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잔은 하나의 눈만으로 그려진 그림은 속임수라 결론짓고,

<6.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1890 ~1894 >

<6. 사과와 오렌지 1895 ~1900> 등에서 두개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이를 한 화면에 그려넣는 시도를 한다.

(세잔은 주로 높은 시점과 먼 시점을 선호 하였다)


그리하여 이중 시점을 통하여 그려진 세잔의 그림은

안정적인 형태의 과일들과 곧 쏟아져 내릴 듯 불안해 보이는 과일들이  한 화면에 혼재한다.

두개의 눈,각각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 본 대상을 한 평면에 옮겼기 때문이다.


각각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한 화면에 그리는 세잔의 도형 이론은, 피카소,브라크 외 들로네 등 파리의 여러 화가들에게도  호응을 얻는다.

들로네는 웅장한 에펠탑을 한 화면에 담기 위하여 각각 아래와 위에서 본 두개의 구조물 로 분할하였고, 주변의 불빛과 마을을 좌우에 배치 한

<7. 에펠탑/1910>을 그렸다.


후일  일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Cubism 이 종식된 이후에도 피카소는

<조각가 /1931>

<8. 도라마르의 초상/1937>

<8. 마리 테레즈/1937>  

<센강의 처녀들/1950> 등 그의 상징이 된 수많은 그림들을 이 기법을 응용하여 그려낸다.


그 어디에서도 도나마르( 피카소의 연인 )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찾을 수 없는 대표작, <9. 우는 여인/1937>에 이르기 까지.


세잔은 또한

<10. 프로방스의 언덕과 산/1880>

<10. 에스타크의 바다/ 1878 ~ 1882>등 에서 보듯

산, 바다,언덕 등의 자연을 구, 원통, 원추,입방체의 도형으로 치환하며 화면에 옮기는 기하하적 Cubism 의 효시가 된다.

이후 세잔의 Cubism 은 피카소,브라크 등을 거치며 다양하게 진화 해 나가며


<11.피카소-저수지/1 9 09>

<11. 피카소-토르토사의 벽돌공장 / 1908>

<11. 브라크- 데스타크의 집들/1908>

<12. 페르낭 레제 -바늘질하는여인/1910>

<12. 페르낭 레제 -세 여인/1911>

<피카소- 바느질하는 여인/ 1910> 등의 그림들을 남긴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상의 실체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 후일 Cubism이 추상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징후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특히 <4. 피카소-부채를 든 여인>은 세잔풍의 Cubism 과 원시 미술의 흔적이 동시에 나타나는 초기 Cubism 의 교본인 듯하다.


그리고 이 때를 전후하여

<13. 장 매칭거-간식/1911>

<13. 알베르 글레즈-플록스를 든 여인/1910>

<13. 앙드레 드랭-카다케의풍경/ 1910>

등도  Cubism에 합류하여 영역을 확대 하였다.


3차원의 공간에 사는 우리들은 대상의 모든것을 한꺼번에 보지 못한다.

앞을 보면 뒤를 보지 못하고 아래를 볼 땐 위를 보지 못한다.

Cubism의 의도는 모든 방향에서 바라 보이는 각각의 전경을 한 캔버스 위에  담으려는 시도 일 것이다.

2차원의 캔버스에서 이러한  ‘보는 법’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 원근법이 지배했다.


기하학적이고 다시점이 가져온 효과가  부분적으로 고전을 대치 했다해도, 피카소와 브라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러한 끊임없는시도를 통하여,1910년대를 지나면서 입체주의는 혁신적으로 변화하고 진화한다.


<14. 피카소-볼라르의 초상 / 1910>

<14. 빌헤름 우데의 초상/ 1910> 에서 보는 것처럼,

다양한 시점에서 관찰 된 형상은

유리 파편처럼  해체되고 다시 캔바스 위에 재 구성 한다.

조각 조각에 투영된 모습을 통해, 대상의 앞, 뒤, 옆면을 모두 보여 주겠다는 시도이다.

그런데 화폭에 표현되는 모습은 사실적인 형태가 아니라 화가의 의도에 따라 재 구성되어 그려진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처음부터 이런 혁신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 우리들이 (피카소 & 브라크) 입체적으로 사물을 그리기 시작 했을때, Cubism 을 의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마음이 가는 데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것이 Cubism이 되었다 "


후일 미술 사학자들은 Cubism 을 세 가지 흐름으로 구분한다.

세잔의 도형 이론에 영향을 받아 태동했던 초기 Cubism 혹은 세잔 형식의 Cubism을 시작으로,

대상의 형체를 알수 없을 정도로 분해하여,

추상화 되어가는 시기를 분석적 Cubism,

마지막으로 회화에 문자와 콜라주 기법등이 도입되고 일차대전으로 Cubism 이 막을 내릴 때 까지를 종합적 Cubism 으로 구분한다.


초기 Cubism에서 분석적 Cubism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 작품,  <15. 만돌린을 든 소녀/1910>

          <15. 안락 의자에 앉은 여인/1910> 은 그 형체와 주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있다.


그러나 대상의 해체와 재 구성을 통한 Cubism 의 회화는 점점 난이도가 더해져,

<16. 피카소- 아코디언 연주자 /1911> 와

< 17. 브라크- 기타를 든 남자11911> 는 두 화가의 그림을 분간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1911 년경의 그림들은 대상이 무엇

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상은 선과 면의 짜임,

명암의 분포, 거칠고 매끄러움 등 질감으로만 . 나타난다.

이 때문에 리얼리티나 진실의 재현은 불가능해진다.  


대중에게 그들의 작품은 자의적이고 추상적인 기하학 일 뿐 이었다.

<서있는 누드/ 1910>

<18. 브라크-포루투갈인 / 1912>

<18. 기타 연주자 /1910> 등

누구도 이 그림의 미로를 헤쳐 나가지 못했다.

그림을 가져가는 화상들 까지도.


이것은 대상을 더욱 진실되게 표현하리라는 초기의

의도와 멀어지고 추상화에 가 끼워 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대상의 리얼리티는 사라졌다.


추상으로의 진보를 원치 않았던 피카소는 현실과 격리된 분석적 Cubism을 떠난다.

그러나  Cubism은 새롭게 돌아온다.(종합적 Cubism)


피카소와 브라크는 리얼리티를 재현하기 위해

몇 가지 조형적 방법을 탐구했다.

대상을 기호화하는 것,  인쇄 활자체를 화면에 도입하는 것 그리고 물감이 아닌 외부의 질감을 도입 하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그동안 주된 정물의 소재였던 유리잔, 담뱃대,

악기 등을 특징적인 모양으로 단순화 했다.

삼각형의 포도  주전자 직사각형의 컵, 가는 원주모양의 촛대와 같이 기호화된 형상들로 만들었다.

이 형상들을 이용하여 대상들을 인식할 수 있게 정리하였다


또 그림에 설명을 덧붙인 것같이 어색하지만,

<19. 마  졸리(치터 또는 기타를 든 여인/1912>에서는

분석적 Cubism의 화풍에  MA JOILE라는 연가에서 유래 된 활자들 투영하여 그림이 음악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한다.


<19. 피카소-투우사/1912> 에서는 보다 많은 활자를 그림 속에 서 찾을 수 있다.

화면 위에 나타난 Le Torero는 투우사를 의미하며, Nimes은 그가 투우를 보았던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이 남아 있는 프랑스의 지방도시를 가리킨다.


<20. 피카소-건축가의 테이블/1912>에는 연인 Ma Jolie와 술이름 Marc, 또 피카소의 부재시 그를 방문했던 사람이 남긴 명함 Mrs Gertrude Stein까지도 그림의 일부가 되었다


< 20. 피카소-작크 조가비/1912 > 는 까페 테이블의

실제 장면이다.

테이블의 모양이 타원형의 캔버스로 암시되어 있고,

중앙에 점심 식사인 작크 조가비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 Notre avenir est dans l' air" 라는 제목이 인쇄된 잡지가 비스듬하게 놓여 있음을 볼 수 있고, 술잔, 컵, 담배대, 신문 등이 기호화되거나 문자로 그려져 있다.


1912년 9월 어느 날 브라크는 아비뇽 시내를 거닐다가

상점에 진열된 나무무늬 벽지를 보았다. 질감표현을 위해 그림 위에 나무무늬를 묘사하던 그는 이를 구입하여 화면에 갖다 붙이는, 꼴라쥬 collage기법을 탄생 시킨다.

<21. 브라크-과일 접시와 컵/1912>은 최초의 꼴라쥬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까페 테이블에 BAR라는 활자로 장소를 표시하고 NAL은 (jour)nal, 신문을 그리고 나무 무늬 벽지로 테이블의 질감을 표시했다.

그 위에 기호화 된 포도 접시와 맥주 컵을 그려서  테이블의 모든 정문을 재현했다.


피카소는 더욱 과감하게 꼴라쥬를 시도한다.

<21. 등나무 의자 정물/1912>은 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을 타원형의 테이블을 캔버스에 그렸다.

테이블 둘레를 밧줄로 감아 청동으로 마감한 테이블의 테두리를  표현했으며  엮은 등나무 무늬가 인쇄된 천을

화면 위에 직접 붙였다.

그위에  레몬이 꽂힌 술잔, 컵, 담배, 신문 등을 표현 하였다.


1914년 7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피카소는 징집을 피하여 아비뇽으로 옮겨간다.

길어지는 전쟁의 와중에 Cubism에 호감을 가졌던 화가와 추종자들은 징병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리하여 포연 자욱한 전장 속에서, 르네상스에 저항한 7 년 전쟁(1908 ~ 1914)은 조용히 날개를 접는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블루스, 장미빛 시대, Cubism 을거쳐온 피카소의 그림은 1973년 4월 (93세)그가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다양하게 지속된다.

<22. 낮잠/1919>

<22. 해수욕하는 여인들/1918, 38세>

<22. 해변을 달리는여인들/1922, 42세>

< 물가의 세 여인 /1921, 41세>

<23. 세 악사/1921>

<23. 거울을 보는 소녀 /1922>

<24. 꿈 /1932>

<24. 알제의 여인 /1935, 55세>

<고양이와 있는 도라마르/1941>

<거대한 두상들/1969, 89세> 등


그리고 폭력적이고  비극적인

< 25.투우: 여성 투우사의 죽음 /1933, 53세>은

4년 후 <게르니카/1937>로 재 탄생한다.  


<춤 /1925, 45세>과

< 붉은 의자에 앉아 있는 거대한 누드/1929,49세> 는 피카소가 초 현실주의에 관심을 보일 때 그린 작품이다.

춤은 화가의 초기 시절부터 열성적으로 피카소를 도운 후원자를 떠나 보낸 후, 그린 그림으로 후회, 슬픔 등이 내재되어 있으며

< 붉은 의자에 앉아 있는 거대한 누드/1929,49세>는 초 현실주의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피카소는 77세의 나이에 젊을 때부터 좋아했던 벨라스캐스의 모작, <27. 시녀/1957>를 완성한다.

그는 평생 수많은 모작을 통하여 그림의 기초를 터득했으며, 그에게 있어 모작은 단순한 작품의 흉내가 아니라,새로운 창조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28. 한국에서의 학살 >


1973년 4월,93세로 영원히 붓을 놀을 때까지

피카소만큼 왕성하게, 열정적이며 다양한 화풍의 그림을 남긴 화집은 본적이 없다.

짧은 기간에 걸친 화풍이었지만,

Cubism은  미래주의, 오르피즘, 구성주의 등 현대 미술에 영향을 미친다.


축약에 축약을 거듭했으나,  평생 5만장이 넘는 그림을 그린 피카소를 60여장의 그림에 담는 건 건방진 시도였다.

짧은 시간 동안,어색한 번역서를 되풀이 하여 읽었고, 연대와 인물,이해하지 못한는 문맥은  넘어 버렸다.

자의적 해석과  오류 투성이인, 부담없는 꼴찌의 답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피카소를 찾아가는 길은 즐거운 여행 이었다.

만일 지금,  이 여정에 동행한 친구 한, 둘이 있다면  

두터운 동지애로 손 잡고 싶다.


시대를 떠나 예술의 근본은 Humanism 이라 믿는다.

'그림은 집안의 벽을 치장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피카소의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웬지 길게 여겨지던 바깥 나들이.

다시금 겨울의 한 가운데서, 별 없는 하늘을 본다.

... 그러나 봄이면  날개를 단다 ...


천체 망원경을 구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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