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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 Nov 11. 2021

크리스마스의 맛(2)

인문360 (2017 수상작)

내 어린 날의 가난은 길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들통에 찬물을 받아 가스렌지 위에 올려 펄펄 끓인 다음 

다시 화장실로 날라서 찬물과 섞어 머리를 감던 추운 겨울, 

긴 집게로 연탄을 잘 집어 손에 힘을 잔뜩 준 채로 바깥으로 나르던 날에 

손 끝에 닿았던 시려웠던 바람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 겨울만큼 험한 계절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아빠가 가끔 퇴근길에 사주시던 호떡 네 장, 

네 식구가 한 사람 앞에 한 장씩 나누어 먹던 그 시간이 부르는 향수 같은 것. 

그리고 여전히 가난은 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를 한 번씩 사 먹을 수 있게 된 형편 속에서 

나는 서글픔과 고마움을 동시에 조금씩 배웠던 거 같다.


지금도 굳게 믿는 게 하나 있다면,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언제나 결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나친 결핍은 열등감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그 곳에서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쥐어짜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기에. 그래서 적당한 결핍은 사람의 의식을 성장을 돕는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원하는 케이크를 원하는 순간에 사먹을 수있게 되었지만, 

막상 입에 들어갔을 때의 충족감은 그 어린시절을 따라갈 수가 없다. 

‘간절함’이라는 양념이 빠지면 음식이든 기억이든 그 맛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케이크만 보면 무조건 생일인 줄 아는 아이와 촛불을 호호 불며 

한바탕 크리스마스 케이크 파티를 하고나서 뜬금없이 버터 크림 케이크가 먹자고 하자, 

남편은 당황스러워했다. 

하필 지금 난데없이 요즘 같은 때에 웬 버터크림 케이크냐고. 


우리 집에 오는 산타할아버지는 비록 다 낡아빠진 중고책 한 권씩을 선물로 주고 가셨지만, 

그 때 받아둔 책들이 지금도 내 책장에서 가장 보물인 것처럼, 

그 케이크는 어릴 때 크리스마스를 기억하게 하는 맛이라고 말하자 

무덤덤하게 듣고 있던 남편은 잠든 아이를 어머님께 맡기더니 드라이브를 가자고 했다. 

이 밤에 무슨 드라이브? 버터크림 케이크를 사러가자는 건가...... 싶어서 

그래, 하고 흔쾌히 따라나섰는데 남편의 차는 고속도로를 넘어서 

내가 어릴 때 살던 그 허름한 동네로 향했다. 

비록 차로 30분 거리지만 선뜻 자주 가지지 않는 그 곳.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아 그저 어두운 동네를 눈으로 훑었다. 

차도 인적도 드문 그곳을 빙빙 도는데, 파란풍차 빵집 자리는 사라지고 다른 가게가 셔터를 내리고 있었고, 

골목 귀퉁이의 호떡 포장마차는 -여전히 같은 주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굵은 고무 밧줄로 꽁꽁 닫혀있었다. 

그거라도 어딘가. 

식구 수에 딱 맞춰 천 원에 네 장을 주는 호떡을 사려고, 

밤 10시에 퇴근한 아빠는 버스에 내려서 그 호떡이 구워지기를 기다렸다가 품에 안고 오셨었지. 

그러면 나랑 엄마랑 할머니는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가 손에 들른 호떡에 먼저 눈이 갔던 그 겨울 밤. 

그 겨울 밤의 맛. 

그냥 별 것 아닌데도 그 추억들이 뭉클하게 올라와 눈물이 주르륵 났다. 

라디오 조차 틀지 않은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지만, 

그 편안하고 익숙한 정적 속에서 남편은 왼 손으로 운전을 하고 

오른 손으로는 손끝이 찬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서 너 바퀴를 더 돌고는 말없이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새근새근 잘 자고 있고, 

행여나 손주가 자다 깨어 울까 방문 한 쪽을 열어두고 주무시고 계신 어머니.

어머니 방문을 닫아드리고, 저녁 때 먹다 남은 케이크의 잔해를 치우면서 마음이 뭉근하게 치올라왔다. 

모든 마무리를 마치고 아이의 선물을 커다란 양말에 넣어 거실에 놓아두고 

방에 들어와 아이를 품에 꼭 안으니 세상이 이리 따뜻할 수가 있는지.


내 어린 시절의 서글픔도 지나고나니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 아이는 나중에 크리스마스를 어떤 맛으로 기억할지, 몹시 설레었던 밤. 

그렇게 불혹을 눈 앞에 두고도 크리스마스의 맛은 새롭게 바뀌고 새로운 기억으로 남겨지기도 한다.






***

아직 크리스마스가 전이지만 이 즈음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기억에

옛 글을 뒤적여봤습니다.

저때는 37살 새파랬네요. 

지금은 어느 새 저 때 없던 아이가 하나 더 있는데 말이죠.

요즘은 조금 업그레이드(?)해서 생크림 케잌이 가장 좋아졌다는 후기(?)를 전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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