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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유년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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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 May 26. 2023

곰보 할머니

나의 마녀 할머니

세계의 전래동화를 참 좋아했다. 갖가지 다른 버전을 모두 섭렵하며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마흔이 훌쩍 넘어가는 지금도 좋아한다.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보게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책중 하나이다.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마녀 혹은 요정이 나온다.

까마귀로 변한 공주님이나 유자를 쪼개면 나오는 아름다운 요정 아가씨들

외모도 아름답고 마음도 고와서 꼭 시기질투의 대상이 되는 그녀들 앞에

대부분은 아주 추한 모습으로 등장해서 선한 마음을 시험하곤 한다.

그리고 선한 마음을 가진 그녀들에게 복을 내려준다.

문제는 그 '복'이 꼭 부자 왕자님을 만나는데 그친다는 거지만.

어린 시절에는 나에게는 언제 마녀 할머니가 나타날지, 가끔씩 멍하니 고민을 하곤 했다.


내가 가진 친절을 나누어 드릴게요, 우리 집이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서 내 인생을 빛나게 해주세요.

왕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스스로 빛나는 인생을 만드는게 더 빠르고 멋지다는 걸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앞에 나타난 마녀 할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룹 과외수업을 가는 날이었다. 가난한 처지에 무슨 과외냐고 물으면 할 말이 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그룹 과외를 다녔는데

그 그룹을 맡아 수업해주시는 선생님께서 형편이 어려우면 무료로 들어오라고 해주셨다.

우리집은 부평이었고, 과외수업을 하는 곳은 갈산동이었는데

당시 40분쯤 걷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부지런히 걸어다녔다.


그 날은 조금 늦었다. 부지런히 걸어가는 도중, 주택가 골목길 한 복판에 할머니 한 분이 서계셨다.

빠르게 지나가는 내 옷깃을 잡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순간 헉. 하고 비명이 터질 뻔 한 걸 꾹 삼켰다.

할머니의 얼굴은 곰보 딱지 같은 것을 방금 뜯어낸 것처럼 여기저기 동그란 피딱지 자국이 가득했다.

할머니는 말을 하지 못하시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검은 비닐 봉지를 내보여주셨다.

그 속에는 동전 몇개가 들어있었다. 돈을 달라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할머니의 얼굴에 패닉상태가 되었는데 너무 속이 상했다.

주섬 주섬 주머니에 돈을 꺼냈는데 당시 나의 전재산이 달랑 2000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대신 김밥을 사먹으려 챙겨둔 돈이었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이걸 다 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냥 다 드릴까. 그럼 이따 배가 고플텐데. 근데 너무 힘들어 보이시는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절반인 1000원만을 드렸다.

나머지를 더 달라고 옷을 잡아당기며 매섭게 노려보는 할머니가 무서웠다.


"죄송해요!!!"

할머니를 뿌리치고 달려가면서 나를 위한 1000원이 얄팍하게 느껴졌다.

정말 1분도 안걸렸다. 다시 뒤를 돌아 뛰어갔다.

그 1분 사이에 할머니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주택가 골목 사거리.

여기저기 다 틔여있는 그 공간에서 그렇게 빨리 할머니가 사라질 수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달리 생각이 되지도 않았기에

그저 빨리 다시 찾아야한다는 마음만 앞섰다.

혹시나 가까운 대문 어딘가로 들어갔을가 싶어서

나는 "할머니!!" 하고 계속 부르면서 여기저기 골목을 뛰어다니고 돌아다녔다.


결국 할머니를 다시 만나지 못했고 나는 손에 쥔 1000원이 부끄러워서 길바닥에서 엉엉 울었다.


수업은 한참 늦었다. 눈과 코가 빨개진채로 들어서는 나에게 선생님은 지각의 이유를 묻지 않으셨다.


그 날 이후 나는 그 할머니 생각이 곧잘 나곤 했다.

얼굴은 괜찮아 지신걸까, 그 때 어디로 그렇게 사라진걸까.

두고두고 후회가 몰려왔다. 그냥 그걸 다 드릴걸.

그 한끼 못먹은거야 다음 날이 되면 잊겠지만

이렇게 가슴에 남는 후회는 어쩌라고.


그러다가 스무살이 지나고 서른살이 훌쩍 넘어

내 아이를 품고 수유하던 어느 밤에 반짝 전구가 켜진듯 알아챘다.


그 분이 나의 마녀 할머니였다는 걸.

내가 가진 걸 아낌없이  내어주지 못한 나의 작은 그릇을 알고

내 인생에서 딱 절반치의 행운을 주고 가셨다.

나머지 절반은 내가 채워야 할 몫이라는 걸 알게 됐다.


가끔 너무 일이 안풀리고 돈도 안풀리고

관계속에서도 치이고 힘든 순간들이 있지만

세상 모든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나는 또 마냥 험한 인생만을 헤쳐오지 않고

좋은 사람들과 우연한 행운을 만난 일이 부지기수였다.


절반의 행운.

절반의 노력.






괜찮아요. 이만하면 괜찮은걸요.

돌이켜보면 지금이 내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좋은 시절에 살고 있는 걸요.

할머니, 어디에 계시든

또 다른 소녀를 찾아다니고 계시든

할머니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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