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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 Jul 24. 2023

몽당연필을 정리하다가

소멸해가는 것들까지

수업과 수업 사이에  책상 정리를 한다. 부스러진 지우개, 연필심 그리고 짧아진 연필들.

지우개 가루를 뭉쳐놓은 뚱뚱한 국수가닥을 보면 웃음이 난다. 수업시간에 내 눈을 뒤로한 녀석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눈에 보인다.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안다.

나도 다 해봤던 것들이니까.


지우개를 인내심있게 눌러 클레이처럼 자유자재로 별 걸 다 만들곤 했다. 그 인내심이 공부할 때는 사그라들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공부말고 다른 일에 놀라운 창의력과 인내심이 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개 아이들이 다 그렇다.

(문제는 어른인 내가 같이 신나지는게 문제다.)


 연필 뒤꼭지를 열심히 깨물어 둔 아이의 흔적을 보면 또 마음이 측은해진다.

잘못해서 힘을 많이 줘서 깨물다가

연필 맨 뒷부분 뚜껑같은 커버가 으스러지면

혀에 닿는 쓴 연필심맛은 진짜 맛이 없다.

예상치 못한 찰나의 쓴 맛이라서 기분도 별루다.


선생님도 왕년에 연필 좀 씹어봤단다.

연필심 맛처럼 안절부절한 아이의 마음을 조금 엿본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누구도 이제 사용하지 않는 연필들은 따로 한켠에 모아져 있다. 제법 짧은 것들이다. 예쁜 길이조절 깍지를 가져다 두었지만 두번은 손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누구도 쓰지않는 짧아진 연필이라 그만 버려야 할 것 같은데도 참 버려지지가 않는다.


 늘 이게 문제다. 물건을 잘 버리지를 못한다.

안 쓸 걸 알면서도 언젠가 쓸까봐 쌓아둔다.

막상 쓰려할 때면 너무나 잘 모셔둔 그 물건이 어디있는지 몰라서 결국은 새로 사게 된다.

어쩌다 일년에 한 두번 쓸 일이 생기면 아주 뿌듯하다.

그 단 한번의 뿌듯함 역시 아주 짧다. 그렇게 쌓여가는 폐품(?)이 한가득이다.


단단한 키친타월 심지같은 건 버리려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날을 잡아서 우리집 애들을 데리고

휴지심으로 문어도 만들고 기차도 만들고

단단한 키친타월 심으로 검도 만들지만

한계가 있다.


그런데 보다보면 우리집 두 녀석은 나를 닮았다. 그들도 버리질 못한다.

신발 상자, 비타민 상자 등등 제법 단단한 상자만 보면 뭔가를 만들거라고 쌓아두고

나는 내다 버리고 그렇게 실랑이를 한다.


그렇게 우리 집은 각종 상자, 심지, 글루건, 가위, 단추, 색종이 등등 여기저기 만들다 만 더미들이 봉우리처럼 쌓여있다. 집이 깔끔할 날이 없다.  


 손에 잔뜩 모인 몽당 연필을 보니 난감하다.

나는 이것들을 버릴 수 없다. 얘네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수도 없다.


이를 어쩌나. 스러져가는 것들에 마음을 주는 일은 이토록 불안하다.

이럴 때는 우리집 첫 째한테 물어보면 가끔 예상치 못한 답이 나온다. 이 연필들은 내가 첫째랑 방법을 찾아볼 시간을 아주 잠시 벌었다. 아주 운이 좋은(?) 연필들이다. 며칠 작은 상자에 담아두기로 한다.


 모질게 내치는 마음을 미루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좋다. 나른한 오후 3시.

달달한 믹스커피가 간절한 시간이다.

나머지 연필들을 정리해두고 아이들이 오기 전에 얼른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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