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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洞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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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연마 Aug 28. 2015

봉숭아 꽃물 기다리는 여자

영화洞人_ 2. 영화 '스틸 앨리스' & '아무르'

 외할머니께서 병원 생활을 시작하신 것은 4월부터였습니다. 

인도(人道)에서 후진하던 차가 할머니를 치는 바람에 우측 고관절이 모두 으스러지셨습니다. 

여든을 훌쩍 넘기신 나이에 골다공증도 있으신 터라 회복은 더디기만 합니다. 

아침 주말 할 것 없이 드라마 줄거리를 줄줄 꿰던 양반이 어제 본인이 하신 말씀도 잘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몸과 정신이 눈에 띄게 쇠약해지시는 걸 보니 착잡한 마음을 이루 말할 수가 없더군요. 

더욱이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서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가족 간의 불화도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할머니 마음도 더욱 움츠러드는 것 같아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스틸 앨리스’를 보는 저의 시선은 

주인공인 앨리스보다 병약해져 가는 그녀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에 집중됐습니다. 

‘스틸 앨리스’는 가정과 사회에서 이상적인 성공과 행복을 누리며 살던 앨리스가 알츠하이머 발병 후 

관계와 기억, 자아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입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줄리안 무어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 사랑스러운 아내, 존경받는 교수로서 공든 탑과 같았던 앨리스의 인생은 

알츠하이머가 발병하면서 맞춰질 수 없는 퍼즐처럼 조각조각 사라져 갑니다. 

늘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던 남편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먼 타지로 떠나고, 

늘 자랑스러워했던 변호사 큰딸과 의사 아들도 각자의 삶을 이유로 앨리스 곁을 지키지 못합니다. 

끝까지 엄마의 곁을 지키는 것은 늘 앨리스를 걱정시켰던 막내딸이었습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생각나는 동시에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지난 주말 병원에 갔습니다. 

할머니는 “지연이가 오늘 올 줄 몰랐어. 너무 고맙다. 바쁜데 어떻게 왔어.” 하시며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저도 역시 앨리스의 가족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하다 보니 주말에 간신히 찾아뵙는 것이 다였으니까요. 

아내와 엄마의 곁보다는 각자의 삶을 선택한 앨리스 가족들을 남 일처럼 비난할 수만은 없는 저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무겁습니다.     


물론 ‘스틸 앨리스’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가 가족애와 그들의 책임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거침없이 몰려오는 상실의 바다에서 

그녀가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무엇’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집니다. 

그래서 그 무엇이 뭐냐고요? 안돼요. 스포는 금지니까요. 꼭 영화를 보고 함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마지막 장면에서 막내딸의 이야기에 앨리스가 어눌한 목소리로 답했던 말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으로 대표되는 앨리스의 주제 의식은 영화 ‘아무르’와 대비됩니다. 

‘아무르’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병마에 마주 선 노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둘은 사랑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서로의 존엄성과 품위, 신의를 지켜나가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남편 조르주는 굳어져 가는 몸 안에 갇힌 안느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려고 

끝내 그녀를 영원히 놓아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두 영화의 기저에는 비슷한 상실의 감정이 흐르고 있지만, 

그것을 대하는 조르주/안느와 앨리스/막내딸의 선택은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나이를 먹고 기력이 쇠하고 기억을 잃어도 여러분을 여러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훌륭한 두 영화 ‘스틸 앨리스’와 ‘아무르’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할머니 얘기를 좀 더 할게요. 열 살쯤부터였을까요. 

매년 여름 방학이 되면 할머니는 늘 봉숭아를 곱게 빻아 제가 올 때만을 기다리셨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릴 적 저는 손끝까지 빨갛게 물들어 지워지지 않는 봉숭아 물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곱게 물들인 손을 보고 방긋대던 꼬마 마지연을 기대하고 계시겠죠.      

이번 주말엔 할머니를 협박(?)하러 다시 찾아뵐까 합니다. 

손녀 손에 봉숭아 물 들여 주시려면 어서 일어나셔야 한다고. 

그러려면 먹기 싫은 식사도 열심히 드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올여름 매니큐어를 깔끔히 지우고 깨끗한 손으로 할머니를 기다릴 겁니다. 

다음 영화洞人 에필로그에서는 발갛게 물들인 못난 제 손을 인증샷으로 올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스틸 앨리스(Still Alice, 2014)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   줄리앤 무어 주연

아무르(Amour, 2012) 미카엘 하네케 감독  장-루이 트렌티냥, 엠마누엘 리바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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