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아이돌의 노래를 좋아했다. 상큼하고 발랄하고 귀여웠다. 항상 에너지가 넘쳤고 듣고 있으면 힘이 나는 신나고 즐거운 노래들이 많았다. 가끔 어린 친구들이 오디션 프로에 나오면 나도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응원했고, 본인들의 음악성을 살려 멋진 노래와 춤을 보여줄 때면 환호했다. 압박감 속에서도 꿈을 찾아가는 모습이 멋있었다.
언젠가부터는 아이돌의 노래를 듣지 않게 되었다. 매일 듣는 음악은 김윤아, 빌리 아일리시, 아이유의 곡들이었다. 마치 중고등학생 때 mp3에 넣어서 수백 번씩 반복해서 들었던 것처럼 한, 두곡을 반복하고 그러다 질리면 같은 가수의 다른 노래를 찾아들었다. 동일한 가수라도 신나거나 즐거운 곡은 듣지 않았다.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은 빌리의 lovely였다. 칼리드의 저음이 불러오는 침잠하는 느낌과, 가사 중간의 Welcome home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전체 가사를 제대로 읽어보고 뮤직비디오도 찾아보았다. 가사에 담긴 뜻이, 뮤직비디오의 장면들이 노래를 듣고 있던 나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어느새부턴가 친구들에겐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쉬웠다. 코로나19 때문에, 요즘 일이 많아서, 멀리 살아서 볼 수가 없다는 말과 함께 조금씩 거리를 두었다. 회사에서는 정말 일만 했다. 몇 주동안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에 크게 지장이 없는 선에서 최소한의 일만 했다. 회사의 친한 동료들이 혹시나 요즘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 봐, 회사에서는 밝게 웃고 다녔다. 일주일, 한 달 전의 내 모습으로 다녔다. 누군가가 툭 건드리면 왈칵 쏟아져 내릴까 봐 되도록 티타임도 가지지 않았다. 바빠서. 요즘 많이 바빠서. 다음에 커피 한 잔 해. 이 말 한 마디면 모두 이해해주었다.
그렇게 점점 바닥으로 내려갈 때쯤, 친한 친구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뇌출혈부터 암까지. 뭐 하나 가벼운 게 없었다. 혹시나 해서 주변에 가까운 친구들의 건강을 물어보았을 땐 아니나 다를까 다들 뭔가 하나씩은 안고 살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아픈데 내가 건강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난 여름을 좋아했다. 변덕스러운 봄과 가을도 아니었고, 소리 소문 없이 눈으로 뒤덮이는 겨울도 아니었다. 여름은 비가 미친 듯이 오거나, 태양이 강렬히 내리쬐는 딱 두 가지 버전만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도, 태양이 강한 날도 좋아했다. 여름이면 항상 여행을 다녔다. 멀리 가지 못 할 때는 가까운 산이나, 하천이라도 가서 열심히 걸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숲에서 진하게 불어오는 나무 냄새를 맡을 때면 살아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 년 중에서 가장 건강한 계절이었고 일 년치 비타민D를 한 번에 합성하는 날들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지금의 기분도 밖엘 나가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산으로 바다로 다니면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서핑을 하고 제트스키를 탔다.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프리다이빙과 헬스 PT도 결제했다. 스페인어 공부도 시작했고 책도 읽었다. 주말이면 사는 곳을 떠나 차를 끌고 전국을 다녔다. 근데도 이상하게 기분은 좋아지지 않았다. 잠깐의 짜릿함과 즐거움은 있을지라도 금방 표정이 굳었다. 입꼬리는 아래로 고꾸라졌고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늪 속으로 잠기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유를 몰랐고, 기분을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냥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았다. 내가 침잠해있다고 해도 어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말하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그럼에도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하루하루 보내도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