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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혜 Apr 30. 2017

로마 그 집

그 집이 내 집이었어야 해.

서른이 되면 독립할 줄 알았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그럴 줄 알았다. 


서른이 넘었지만 아직 부모님 집에서 살고 있다. 20대 초반에는 마음껏 놀지 못하고 일찍 들어와야 하는 게 싫었지만, 이제 그렇지도 않다. 부모님과 사이도 더 좋다. 수다 떨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의 하이라이트는 엄마가 해주신 밥이다. 엄마 밥은 사랑이다.


이렇게 사랑과 행복이 넘친다면서 나는 며칠 전 독립을 선언했다. 친구들은 '왜 사서 고생이냐', '돈 안 모인다' 등등 걱정 섞인 말들을 했지만, 이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럴 때가 왔다. 


외국에서 여행 다니며 다른 사람의 집에 오래 머무르다 보니 '내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아마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더 그렇게 된 것 같다. 나는 어떤 집에 살고 싶을까. 어떤 집에 살 수 있을까. 


하이델베르크의 집. 자전거가 무지 타고 싶었던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집. 다시 확인해봤는데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저택이라는 말이 어울리려나.
내 눈에 제일 예쁜 건 한옥.

여행을 가면 에어비앤비에 종종 묵는다. 에어비앤비를 고를 때 기준은 실제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인지 아닌 지다. 임대용으로만 사용하는 집과 사람이 사는 집은 다르다. 분위기도 냄새도 다르다. 사람 냄새나는 집은 색다른 매력이 있다. 


파리에서, 방콕에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집에 묵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자기 집을 내놓고 여자친구네 집에서 자는 대학생도 있었고, 자신들이 직접 지은 집을 소개해준 부부도 있었다. 모두 기억에 남고 고마운 호스트들이지만, 그중 으뜸은 단연 마리아 아주머니다. 


( 로마의 아파트와 로마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와인을 마시다 찍은 사진. 와인 라벨이 귀엽다. 로마에서는 맛있는 와인을 값싸게 즐길 수 있다. )


마리아 아주머니 집에서는 오래 머물렀다. 장기 투숙객이다 보니 두 번째 달부터는 할인도 해줬다. 잠시 다른 나라로 여행을 다녀올 때면 다시 마리아 아주머니 집에 돌아왔을 때 안심이 되었다. 마리아 집은 그런 따뜻한 곳이었다. 


로마 시내에 사는 마리아는 60대 정도로 예상되는 이탈리아 사람이다(나이는 서로 물어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마리아의 아버지가 아흔이 넘으신 거로 보아 대략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처음 내가 집에 갔을 때 나를 바라보며 소녀같이 웃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창가에 앉은 새를 보며 감동하고 파티를 간다며 자신의 드레스를 매만지던, 밝고 감성이 여린 분이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그녀의 집에는 책이 가득했다. 책을 좋아하는 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탈리아어를 읽을 줄 몰랐다. 마리아는 나에게 여행 책자나 잡지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대부분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었다. 불어를 배웠던 나는 대강 의미를 추리해보며 마음에 드는 장소는 따로 검색하기도 했다. 


“오늘은 어떤 여행을 했어?” 

마리아가 물었다. 그럼 나는 그 날 내가 본 감동적인 로마에 대해서 한참을 들떠서 설명했다. 

“길을 가다가 이런 유적지를 봤어. 굉장하더라.” 

이야기를 듣던 마리아는 “맞아 엄청나지. 시간이 되면 여기에 가봐. 네가 가보면 좋아할 거야.”라며 생각나는 장소를 추천해준다. 어떨 때는 인터넷에 검색까지 해가며 사진을 보여주고 ‘벨라(Bella)’를 외쳤다. 


마리아가 추천해준 유적지들. 사람에 치이는 로마 중심부와 달리 선선히 산책하기 좋았던 곳. 


그녀는 여행을 좋아했다. 냉장고 문에는 다녀온 도시의 마그네틱이 잔뜩 붙어있었다. 나는 종종 그 앞에 서서 유심히 마그네틱을 살펴보곤 했다. 그러다가 한 번씩 물었다. 

“베를린은 어땠어? 나는 정말 좋았는데.” 

그럼 마리아가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말도 마. 내가 터키 사람인 줄 알고 무시를 하더라고. 독일 사람들은 너무 불친절했어.”

이탈리아 사람이 여행 갔을 때 느낀 이야기들에 나는 금세 빠져들었다. 


마리아가 추천해주는 전시, 유적지 모두 좋았지만 이 집에 머무르며 가장 좋았던 건 음식이다. 마리아는 첫날 부엌에서 음식 재료들을 보여주며 “다 네 꺼야.”라고 말했다. 시칠리아에 사는 친구가 직접 짠 올리브유, 다양한 종류의 파스타, 아침 시장에서 사 온 채소, 맛있는 와인까지. 내가 마늘을 많이 쓰는 게 미안해 따로 사 왔더니 여기 있는데 왜 또 샀냐며 한참을 웃는다. 


마리아가 음식을 할 때쯤 귀가를 하면 저녁을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며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내어주기도 했다. 그녀의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밖에서 사 먹는 김치찌개보다 집에서 끓여 먹는 김치찌개가 맛있듯이 집에서 마리아가 만들어주는 파스타는 ‘몰또몰또 부오노!(아주아주 맛있어!)’를 외치며 엄지를 척 세우게 했다.  


마리아의 집을 떠나기 전날, 마리아는 내게 특별한 요리를 해줬다. 카르쵸피와 큰 생선이었는데 생선은 아들이 직접 잡아 온 거라고 했다. 카르쵸피는 한국에서 먹어 보지 못했던 음식이라 새로웠다. 마리아에게 먹는 법을 배우며 즐겁게 식사를 했다. 와인이 절대 빠질 수 없다며 맛있는 와인을 새로 꺼냈다. 


카르쵸피 요리. 식탁보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마리아 집이니까. 하하
발코니에서 키우는 올리브나무 가지를 떼어 소스를 바르는데 사용하였다. feat. 마리아의 손


1월 1일, 로마사람들은 이런 모양으로 과일을 먹는다고 한다. 특히 복을 많이 받기 위해 석류를 먹어야한다고. 
크리스마스 기다리며 테이블에 각 종 음식과 두고 장식품으로 꾸민다. 


마리아네 집에 살며 나는 마리아의 생활 방식에 조금씩 물들었다. 한국 부모님 집에 살 때는 빨래를 널면 엄마가 너는 방식으로 너는데 마리아 집에 살게 되니 마리아가 너는 방식으로 널게 된다. 세탁기를 돌리는 방식도, 청소도, 밥을 먹는 시간, 커피를 마시는 방식도 마리아가 하는 대로 따라가게 됐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건가 싶다. 


그녀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녀의 삶의 방식이 곧 규칙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그녀가 트리를 놓는 장소가 있고, 크리스마스 때 먹는 음식들을 놓는 테이블이 있었다. 책이 있는 장소가 있고 그녀가 쉬며 책을 읽는 의자가 있다. 베란다에는 올리브 나무와 다른 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고 그걸 쓰는 빗자루가 마리아가 정해놓은 자리에 있다. 


 ( 아침 산책을 나가 근처 빵집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사 와서 먹곤 했다. 평화롭던 시간. )



나는 어떤 공간을 갖게 될까. 우선 예쁜 책장을 사고 싶다. 아끼는 책들을 나만의 기준으로 꽂아둘 거다. 그 옆에는 책을 읽기 편한 의자와 턴테이블. 침대는 매트리스가 중요하다. (해외 게스트하우스에 떠돌면서 매트리스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했기에) 매트리스에는 아낌없이 투자해야지. 벽에는 흰색과 짙은 남색의 페인트를 칠하고 싶은데 방이 추워 보일까 걱정도 된다. 제주도에서 산 풍경과 모빌도 달고, 마그네틱 판도 예쁘게 걸어둘 거다. 그림도 하나씩 걸어 그렇게 나의 공간을 꾸며야지. 

그리고 초대할 거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내가 머물렀던 집의 사람들을. 

겨울이 되니 로마가 그립다. 로마의 집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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