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의 자식은 욕망을 숨기는 데 익숙하다.
가격표를 몰래 들쳐 보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서너 개쯤 들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가장 보고 싶은 것들은 그립지 않기 위해 무던히 싫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지기도 전에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대여섯 개쯤 대어야 잠이 왔다.
수빈은 가난한 이의 자식이었다. 그럭저럭 월급은 밀리지 않는 회사에 다녔지만 불우한 친척을 두었고 그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심성의 부모를 둔 탓이었다. 그래서 밑바닥을 기지는 않았어도 절대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를 티 내지 않았다고 착각을 했으나 장을 볼 때마다 모친이 내뱉는 한숨, 때때로 부친이 술을 어디선가 잔뜩 먹고 들어와 푸념처럼 하는 말들, 언니가 필요한 학용품을 사달라고 말하지 못해 여러 번 친구에게 빌리다 담임 선생님에게 온 당부 전화, 수빈의 방문을 꼭 닫고 하는 부부싸움들은 어린 그녀의 경제관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도 미취학 아동 시절 예쁜 패키지에 포장된 미미 궁전이나 부엌놀이 세트를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불행히도 눈치가 너무 빠르게 생겨났다. 마트에 갈 때마다 그녀는 미미 궁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까지 노력했다. 그 화려한 그림들을 질릴 때까지 바라보고 있자면 반복된 특정 단어가 어느 순간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 상품의 본질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노력하면 그녀가 정말 원하는 마음이 있었는지까지 의심이 들었다. 그녀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에 착시를 걸었다. 그녀의 재능은 ‘포기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빈의 부모는 그녀에게 아디다스, 나이키의 짝퉁을 입히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어쭙잖은 서민의 흉내를 내느니 철저한 거렁뱅이가 되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워낙 오래 익숙해진 탓에 특별히 불만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의 짐을 더 덜어주기 위해 짐짓 만족하는 척, 이러한 결핍에 한 번도 손해보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그런다고 그녀의 부모가 더 행복해지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부모가 더 불행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철없는 수빈의 동생들은 종종 떼를 썼지만, 그녀만큼은 부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자 했었다. 그것은 수빈의 부모와 수빈 자신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했던 착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막 시작되었던, 슬슬 영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겨울밤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기 10분 전부터 학생들의 마음은 이미 저만큼 떠 열람실은 가방을 챙기거나 속닥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수빈. 이번 주말에 학교에서 자습할 거야?
아니, 학원 때문에 외출증 끊어놨어.
그럼 토요일 저녁에 시내 나갈래? 예주 생일 파티. 옆 남고 남자애들도 몇 명 올 거래. 예주 중학교 친구들. 아, 너 학원 가야 하냐? 몇 시부터 수업인데?
사실 학원은 그만둔 지 좀 되었다. 학원비가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같은 학원비를 내면서도 그에 아무 죄책감이 없는 친구들, 심지어는 선생님이 수업을 대충 때우거나 일찍 끝내주면 기뻐하는 철없는 애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괴로웠다. 엄마에겐 학교 수업만으로 충분하다며 학원을 그만두었지만 학교에는 알리지 않고 여전히 주말 자습을 빼는 중이었다.
아니, 토요일 저녁은 괜찮아. 몇 명이나 오는데?
남자애들이랑 뭉쳐서 논 것은 초등학교 때가 마지막이었다. 남자애들한테 크게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학기가 끝난 여유로운 주말, 예주의 생일파티, 시내, 토요일 저녁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수빈은 빠르게 이번 달의 남은 용돈을 셈해보았다.
너 오면 7명. 그럼 우리 돈 모아서 예주 생일 케이크 살 건데, 예주 빼고 6명이니까 3000원만 줘.
응. 토요일에 줘도 될까?
응, 그래 그럼. 장소는 문자로… 아 , 너 핸드폰 없지. 금요일에 정해지면 알려줄게.
토요일의 시내는 영하로 슬슬 떨어지는 날씨에도 사람이 많았다. 수빈은 약속 시간은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각에 도착하고는 곧바로 후회했다. 약속 장소에는 예주와 지연을 제외하고 다들 모였으나, 하루 빌린 엄마의 핸드폰에 도착한 지연의 문자는
‘미안, 나 예주랑 같이 가고 있는데 우리 사거리 지나는 중. 한 10분쯤 걸릴 것 같아!! 먼저 만나서 밥 먹고 있으면 찾아갈게’
라고 찍혀 있었다. 그녀는 아마 20분쯤 늦을 것이다. 사실 생일 당사자인 예주와 초대해준 지연 말고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혜지는 얼굴은 대충 알지만 같은 반을 해본 적이 없어 말도 몇 번 해본 적이 없는 애였고 남자애들은 완전히 초면이었다. 혜지는 남자애들이랑 이미 아는 사이인지 가벼운 시비를 걸며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수빈은 어색함을 짐짓 추운 척 감추며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시내라서 사람이 많아 다행이었다. 인파에 숨어 있으면 그녀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수빈은 목도리에서 얼굴을 꺼내 입김을 후 불고는 흩어지는 연기 모양을 관찰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울 거라고 했다.
너도 예주 친구지? 고등학교 친구?
검은 코트에 체크 목도리를 두른, 키가 유난히 큰 남자애가 수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어… 어. 2학년 때, 아니 1학년 때 같은 반 했어.
수빈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어색하고 갈라진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예주랑 엄마끼리 친해서 어렸을 때부터 알았어. 동네 친구.
우와 신기하다. 부럽다, 동네 친구.
부럽긴. 차예주랑 그래서 맨날 비교당해.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예주는 센스 있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재미없는 애라고 판단해버릴까 봐 무서웠다.
나는 한승민이야. 양진남고. 예주랑 동갑이니까 너랑도 동갑이겠다.
난 유수빈. 그러게, 친구네.
수빈은 승민처럼 씩 웃었다. 혜지가 아직도 다른 남자애들과 시시한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둘은 제법 어른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비밀스러운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았다.
뒤늦게 도착한 예주와 지연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도, 고등학생에겐 제법 가격대가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도, 노래방에 가서도, 예주가 생일 케이크의 초를 끄는 순간에도 수빈은 승민만 보였다. 승민에게는 또래보다 더 성숙해 보이면서도 다른 애들과 잘 어울리는 묘한 리더십 같은 것이 있었다. 남자애들의 어린 서열 싸움 같은 것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그들의 위에 있었다. 승민 역시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누군가를 휘두르지 않았다. 승민은 오히려 그러한 강점을 오늘 수빈에게 먼저 말을 걸어 그녀가 처음 보는 이들과도 잘 어울려 놀 수 있도록 배려한 것처럼 타인을 위해 이용하는 그런 애였다. 그러니까 안타깝게도 수빈이 승민에게 반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래방의 마지막 서비스 시간까지 끝나고 나자 더 이상 귀가를 미룰 핑계가 사라져 버렸다. 탄산음료의 마지막 단 맛이 입에 남듯 달짝하면서도 찜찜한 기분 나쁜 헤어짐의 시간만이 남은 것이다. 수빈도 피곤하기도 하고 그만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인지 선뜻 ‘가자'라고 말하는 것만은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어려웠다. 아이들은 느릿 거리며 짐을 챙기면서, 누군가 이제 그만, 집에 갈까?라는 명령을 내리길 기다리듯 미적거렸다.
한승민. 엄마가 데리러 오신다는데, 같이 갈 거지?
한참 핸드폰을 만지던 예주가 승민에게 물었다. 이 말은 이제 다들 각자 집에 갈 버스를 찾아보라는 말이었다.
나는 들를 데 있어.
승민은 예주와 함께 가지 않는다. 이 사실이 수빈에게 묘한 안도를 주었다.
엄마 차를 타고 예주가 제일 먼저 떠나고, 남자애들과 시시덕거리던 혜지와 지연은 자기들끼리 더 놀고 싶은 눈치인지 어물쩡 거리다 다른 방향 버스를 탄다며 사라졌다.
승민과 수빈은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었다.
막차가 다다른 시간에, 날은 소름 끼치게 추웠다. 하지만 두세 정거장쯤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가능하다면 집까지라도 같이 걷고 싶었다. 걷는 동안 승민은 수빈에게 조심스럽게 오늘 내 친구들이 혹 무례하지는 않았는지, 오늘 예주가 사 준 이탈리아 레스토랑의 음식이 입맛에는 맛있는지, 예주가 학교에서는 자기가 아는 것처럼 푼수처럼 굴지는 않는지, 예주가 초등학교 때 장기자랑에 나가 혼자 걸스 온 탑을 추었던 걸 아는지, 그리고 그걸 연습하는 예주가 얼마나 웃겼는지 아냐는지 등을 물어왔다.
수빈은 그들에게 가진 공통점이 예주뿐이라는 점에 마음 한 구석이 뻐근했다. 그리고 예주는 수빈에게 언제나 좋은 친구였기 때문에 그런 뻐근함이 못내 불편했다.
승민은 그녀와 같은 버스를 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탈 버스가 올 때까지 자신의 버스를 일부러 놓치면서 기다려주었다. 카카오톡이 있냐는 승민의 질문에는 정말로 미어지는 마음으로 아직 핸드폰이 없다고 대답해야 했다.
이해해, 우리 부모님도 성적 조금만 더 떨어지면 바로 폰 해지할 거래.
가난을 들키는 대신 학업 성적에 엄한 부모님을 둔 척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수빈의 버스는 전광판에 뜬 시간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버스 카드를 찾느라 허둥지둥 버스를 잡아 타느라 승민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버스 좌석에 가까스로 앉아 정류장을 쳐다보자 승민은 바로 도착한 다음 버스를 탔는지, 들를 데가 있다던 곳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들를 데가 있다는 곳은 어디었는지.
수빈은 그의 질문에 대답을 성실히 했을 뿐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주. 오늘은 야자 할 거야?
아니 오늘은 스터디 있어. 진짜 짜증나. 아 저번에 만났던 한승민 있지, 걔랑 몇 명이랑 하는 스터디인데…
그 뒷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승민의 이름이 예주의 입에서 나오자 시끄러운 교실의 소음 속 그의 이름만 밑줄 친 것처럼 들렸다. 생일 파티 이후 수빈은 승민을 만날 구실도, 소식을 알 길도 없었다. 예주에게 슬쩍 물어볼까 싶긴 했지만 왠지 그들의 관계는 퍽 견고해 보여 내키지 않았다. 그럴 때면 수빈은 가만히 그의 이름을 한 글자씩 되뇌었다. 하교할 때도, 야자를 하다가도, 세수를 하면서도, 부모님이 안방 문을 닫고 싸우는 소리가 들릴 때도, 스타킹이 찢어진 걸 양말 밑에 최대한 당겨 그대로 신고 나가야 할 때도, 친구들이 저녁 급식 대신 치킨을 시켜먹을 거라며 그녀에게 물어볼 때 다이어트를 하는 척을 해야 할 때도, 많은 추운 순간들에 그의 이름을 부적처럼 되뇌었다. 한, 승, 민. 한 글자 한 글자가 퍽 따듯했다.
.. 그래서 말인데, 너도 스터디할 생각 없어? 안그래도 한 명 나간다고 해서..
스터디?
응. 영어인데, 선생님이 원래 한성 종합학원에서 가르쳤었대. 실력 괜찮아. 애들 다 등급 올렸거든.
학원도 아니고 스터디라니. 과외도 아니고 스터디라니. 예주 같은 애들은 그런 게 어울렸다. 립글로스 말고 립밤. BB크림 말고 파운데이션. 문방구가 아닌 편집샵에서 산 다이어리, 과외가 아니라 스터디.
잘 모르겠으면 일단 이번 주 두 번 정도면 청강해보고 결정해도 되는데. 화요일, 금요일. 선생님한테 말해둘까?
승민을 다시 만날 구실이 생겼다는 안도와 스터디 비용이 얼마일지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수빈은 전반적으로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기 때문에, 청강을 해보고 대충 수준이 맞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스터디 등록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스터디에서 만나는 승민이 궁금했다. 공부하는 승민이 궁금했다. 양진고 교복을 입은 승민이 궁금했다. 사실 그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승민이 너무 궁금해지면 싸이월드에서 그의 미니홈피를 들어가곤 했다. 그는 예주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예주의 미니홈피에서 그의 이름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와 예주의 1촌명은 ‘평생 절친'이었다. 승민의 미니홈피는 두세 번 만에 게시글을 다 외울 정도로 볼 게 없었다. 일촌 공개도 아니고, 그냥 원래 뭘 잘 공개하는 성격이 아닌 듯했다.
넘버원 스터디 카페.
카페도 몇 번 가보지 못한 수빈은 스터디 카페라는 것은 지나가다 간판만 봤을 뿐, 정확히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한 과외는 종합학원의 차갑고 낡은 교실의 배경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른바 스터디 카페라는 곳은 오히려 잘 꾸며진 도서관 로비에 가까웠다.
체리목으로 마감된 인테리어들은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었고, 테이블마다 배치된 사각형의 스탠드는 아늑했다. 이런 공간은 대학생들이나 두꺼운 전공 서적과 노트북을 뒤적이며 공부하는 줄만 알았는데. 예주는 그런 애였다. 열람실보다 스터디 카페가 더 잘 어울리는 애.
그.. 정수빈? 오랜만이네. 그 날 잘 들어갔어?
승민이었다. 그동안 키가 조금 더 자란 듯했고 그때보다 피부가 조금 뒤집어져 있었다. 꿈속에서 온갖 상상을 하며 그리던 승민이었기에 상상 속 미화된 모습과의 차이에 잠깐 당황했으나 그가 먼저 아는 척을 했다는 사실에 다시 기분이 화사해졌다.
응. 잘 들어갔지.
너는? 그날 왜 예주를 따라 차를 타고 가지 않았어? 들를 곳이라는 데는 어디였어? 아니면 혹시 나 버스 기다려 주고 싶어서였어? 궁금한 게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내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며. 우리 하는 거 보고 답답하면 어떡하지.
승민이 일부러 다른 스터디원들 앞에 수빈을 치켜세우려 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기분은 우쭐해졌다. 그녀가 지금껏 가꿔온 성적이 진심으로 보답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수빈의 성적이 상위권인 것은 사실이었음에도 그 영어 스터디가 답답해 보일 리는 전혀 없었다. 예주와 승민의 영어 스터디는 학교에서처럼 문법 구조 따위를 배우지 않았다. 다만 권위 있는 미국 매거진에서 발췌한 아티클을 읽었고, 내용에 담겨있는 최신 시사 문제는 덤이었다. 그들은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영영 사전을 통해 찾아보았고 그것을 태블릿 pc에 기록해놓았다. 수빈에게도 언니가 쓰던 낡은 pmp가 있었으나 꺼내지 않았다. 영어 스터디는 2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수빈에게는 당황과 부러움과 배움의 즐거움이 폭죽처럼 번갈아 가며 터졌다. 그리고 시계를 보는 척하며 던진 시야 속에 걸리는 승민을 바라보는 떨림까지.
그 이후 두 번의 허가된 청강을 복잡한 마음으로 참여한 후, 수빈은 기어이 그녀의 부모에게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그러한 과외가 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삼 남매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빠듯한 살림에 키우는 그녀의 부모는 수빈이 과외 청강 후 조금 늦게 귀가해도 큰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다만 성실하고 일찍이 철든 그들의 둘째 딸을 신뢰할 뿐이었다.
짧은 스터디 참여 기간 동안 그녀가 승민에 대해 알아낸 것은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축구를 할 땐 주로 미드필더를 담당한다는 것, 위로 누나가 한 명 있다는 것, 맥도널드보다 버거킹을 좋아한다는 것, 탄이라는 반려견을 키운다는 것, 누나에게 물려받은 삼성 MP3를 쓴다는 것, 산소방이 있다는 제일 독서실을 애용한다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부모님께 고액의 스터디 비용을 요구하기보다는 학교 자습실의 분위기가 별로라는 이유로 주말만이라도 시내의 독서실을 이용하고 싶다고 설득했다.
계절은 관념이지만 그 계절의 경계선을 정확히 그릴 수 있는 날이었다. 분명 봄이었는데 여름이 어제 갑자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