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일상의 예술가로 살아가기
삶의 아름다움이란
대단한 사건이 아닌 소소한 것들에 있다.
- 짐 자무쉬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은 반복되는 일상에서 예술적 영감을 놓치지 않고, 매일 시를 쓰는 평범한 버스 기사의 아름다운 일상을 보여준다. 예술이라는 것이 선택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비범한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일상을 사는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자신감을 안겨주는 영화다.
어린 시절에는 발레 공연 포스터를 보며 발레리나를 꿈꾸었고, 일기장에 동시를 흉내 내며 작가가 되기를 바라기도 했고, 색칠놀이를 하다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적 또한 있었다. 여러 차례 장래희망은 바뀌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창조하고 나만의 양식을 가꾸어 가는 것이 내가 공통적으로 바란 직업상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쩌다 보니 그간 바랐던 꿈들의 대척점에 가까운 경제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행정적인 문서와 길게 나열된 숫자들을 대하는 삶을 살고 있다. 창조와 아름다움을 구상하는 일과는 이토록 거리가 먼. 가끔은 이런 나의 일상이 따분하고 무료해질 때가 있고, 내가 꿈꾸었던 미래는 어디로 간 것인지 회의가 일기도 한다.
모노톤의 칙칙한 일상에 조금씩 색채를 더하게 된 것은 어릴 적 꿈이었던 발레를 시작하게 되면서부터다. 일주일 중 두 번. 야근과 회식을 피해서 겨우 겨우 듣게 된 성인 발레 수업에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날의 꿈을 조금씩 상기하게 되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들어선 발레 클래스에서 차분한 클래식 음악에 맞추어 스트레칭과 동작들을 반복하다 보니, 어릴 적 발레리나를 꿈꾸었던 소녀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놀랍게도 발레가 그간 굳은 몸만 일깨운 것이 아니라, 식어버린 마음마저 풀어낸 것이다.
엄격하고도 어려운 발레 동작에 늘 고전 분투하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약간의 감정이 담긴 손끝, 파르르 떨리는 어색한 표정 속에서 나만이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담아내어 본다. 마치 예술가가 된 것처럼.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인 패터슨은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관객들은 안다. 매일 시를 쓰는 그의 일상이 패터슨의 예술가적 정체성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음을. 패터슨과 같이 평범한 일상에서 시적 감수성을 발휘하는 사람으로부터 오히려 짙은 진정성을 느끼는 것처럼,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은 '직업'으로 한계 지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진실 어린 마음으로 임한다면, 성인이 되어 발레를 배우는 사람도, 취미로 발레를 시작한 사람도 예술가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발레리나는 아니다. 결코 발레리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패터슨과 같은 삶은 살 수 있지 않을까? 소박한 일상을 변주하며 예술을 실천하는, 삶 자체가 예술이 되는, 단순하고도 진실된 삶을. 발레는 이런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작은 길이 되어주고 있다. 우린 모두 예술가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각자의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