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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개 Sep 08. 2019

잊혀가는 것을 향한 영화의 찬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7)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가는 것들을 위한 영화적 찬가다.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심심한 맛의 강냉이처럼 주인공 모금산의 일상도 특별할 것 없이 흐르고, 흑백의 화면은 영화의 배경인 충청도의 소도시 금산을 조용히 담는다. 마을 이발소를 운영하는 모금산은 15년 전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조용한 일상을 흔든 것은 다름 아닌 위암의 발병이다. 그는 암 선고를 받은 후, 앞뒤 설명도 없이 서울에서 영화감독을 준비하는 아들 스데반과 그의 여자 친구 예원을 불러 자신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어줄 것을 부탁한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영화는 12월 25일, 마을 사람들에게 상영된다.


영화는 여러모로 금산의 성격과 비슷하다. 금산은 자주 말을 아낀다. 아들 스데반은 이따금 아버지를 향해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지만, 금산이 말을 아낄 때 영화도 역시 입을 다문다. 카메라는 조용히 그의 행동과 표정, 일상의 배경만을 담을 뿐이다. 그가 왜 자다 말고 베개를 내려치는지, 그의 아내는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아내가 떠나기 전의 삶은 어떠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왜 영화를 찍으려 하는지도 관객은 추측만 할 뿐이다. 영화는 금산의 외로움과 먹먹한 감정을 구태여 부풀리지도 않는다. 금산을 맡은 기주봉 배우의 연기는 이러한 영화의 톤을 일관되게 유지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영화는 금산의 침묵을 파헤치는 대신, 조용히 금산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출근길, 이따금 손님이 찾는 이발소, 퇴근 후 규칙적으로 찾는 동네 수영장,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들리는 치킨집 등 그가 거쳐 가는 장소를 따라가다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이발소, 프랜차이즈가 아닌 동네 가게, 사라져가는 다방이나 극장은 애잔하고도 아름답다. 영화는 밀려나는 오래된 것들을 느릿느릿 애정을 담아 비춘다.


영화의 정서를 구축하는 것은 공간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서 만나는 또 다른 사람들에 있다. 대꾸하지 않는 금산을 굳이 불러 세워 인사하는 영수, 오지랖 넓은 수영장 아주머니, 금산의 몸 개그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자영, 말없이 책만 읽는 치킨집 사장 등 금산이 이들과 마주칠 때면 영화는 은근한 코미디를 선보인다. 암 투병 중인 고독한 남자를 앞세우면서도 영화가 신파적이지도, 마냥 슬프지만도 않은 이유다. 물론 이들이 웃음을 유발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인물은 서사를 위해 소비되지 않으면서도, 조용하면서 다정한 영화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이러한 영화의 화법은 영화 속 인물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여겨진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별)과 불가항력적인 시간의 흐름, 그에 따라 잊혀가는 것들을 심각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만도 않게 그려낸다. 이 영화가 미스터 모(모금산)를 위로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장면에서 병실에 있는 금산이 창밖에 터지는 불꽃을 가만 바라본다. 우리는 그의 배 속 암세포가 불발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불꽃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에서 알 수 없는 위안을 얻는다. 흐르는 시간 속에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들을 향한 영화의 위로는, 미스터 모만이 아니라 관객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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