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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shformation Feb 20. 2019

글래스

샤말란 감독의 이름값에 걸맞은, 19년 만에 완성된 이야기


23 아이덴티티가 한동안 화제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던 샤말란 감독이 다시 인싸로 편입하는 신호탄이었다면, 글래스는 어쨌거나 그의 복귀가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언브레이커블 때와는 달리 코믹북 속에서 뛰쳐나온 슈퍼히어로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 그런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접근으로 히어로를 이야기하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그렇지만 글래스는 단독으로 놓고 이야기하기엔 어려운 구석이 많은 영화입니다.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전작 언브레이커블과 23 아이덴티티(스플릿)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거든요. 글래스는 이 두 편의 이야기를 관객들이 모두 알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앞부분에는 유난히 전작에서 벌어졌던 사건이나 소소한 상황들에 대한 떡밥과 전개들이 많기도 하고, 이래저래 관객들에게 그리 친절한 영화는 아니죠.




샤말란 감독은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식스 센스의 영향 덕분에 반전이 쩌는 영화의 제작자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온 작품들이 대부분 그런 성향을 띄고 있었죠. 언브레이커블, 사인, 빌리지까지. 


그런데 이 표현은 조금 다르게 고쳐 쓰고 싶어요. 그는 반전이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감독이 아니라, 실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서사 구조를 선호하는 이야기꾼이라고요. 과거 그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독특한 세계관 혹은 설정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다가, 마지막 부분에 영화 내용 전체를 새로 되짚게 만드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면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것들이 그 관점 하나로 모두 새롭게 보이는 경험. 그중에서도 호평을 받았던 작품들은 그 경험을 통해 어떤 철학이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곱씹어 볼 만한 화두를 제시하기도 했죠. 그의 이야기에는 그런 매력이 있었습니다.


언브레이커블, 23 아이덴티티 모두 개별적으로 이런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글래스는 더 큰 그림을 그립니다. 이 삼연작을 아울러 전하고 싶은 화두가 있고, 마찬가지로 그 이야기 역시 글래스의 결말에 이르러 또다시 새롭게 완성되죠. 처음 언브레이커블의 각본을 쓸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건지, 혹은 속편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에서 점차 발전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어코 이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뚝심은 정말 인정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공든 탑까지 거리낌 없이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선택까지도요. 이 영화는 주인공이 세 명이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상 주인공이 없는 영화이기도 하거든요. 이게 장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지만요.




단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아무래도 이 영화를 독립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게 발목을 잡긴 합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앞 두 편에서 이미 어느 정도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글래스는 그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그렇지만 적당한 텐션을 유지하며 뒤집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다 보니 영화의 템포가 썩 훌륭하지는 못합니다. 아주 루즈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흥미진진하지도 않죠. 


그리고 이 작품에서 새로 등장하는 정신과 의사 캐릭터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 사실 이 캐릭터의 존재가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기초 뼈대가 되거든요 - 어딘가 붕 떠있는 느낌입니다. 설정을 보면 철두철미해야 하는 인물인데 납득하기 어려운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말의 새로운 시각이 주는 반전의 설득력이 다소 약해지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세 명이지만, 주인공이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는 것. 어쩌면 이 부분이 호불호가 갈리는 중요한 포인트일지도 모르겠어요. 주인공, 그중에서도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데이빗 던에게 감정 이입하는 형태로 감상한다면 이게 뭐야? 싶은 전개일 수도 있어요. 처음부터 큰 그림을 조망하는 형태로 영화를 감상한다면 글래스는 짜임새 있는 영화겠지만,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모르는데 미리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보기 전 기대했던 것과는 살짝 결이 다른 영화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과거의 향수가 강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 샤말란 영화가 이런 식이었지, 하고 말이죠.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들고 나와서 우리의 뒤통수를 치려고 할지 기대되면서 어딘가 불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암튼 다음에 또 만나요, 샤말란 감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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