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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Jan 28. 2022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조지 거슈윈 Summertime

피아노를 다시 배운 뒤 나는 쭉 클래식 외길을 걸었다. 취미 피아노를 치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가요나 뉴에이지, 영화나 애니메이션 OST 등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곡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클래식 곡들이 좋다. 몇 백 년 동안 길이 남아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면 그게 무엇이든 대단한 거다. 사진 한 장 없는 오래전 작곡가가 남긴 악보를 보며, 끊임없이 연구하며 자신만의 해석을 더하는 거장들의 연주가 더해지면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뉴에이지처럼 듣기 편한 음악도 좋아한다. 유키 구라모토의 'Romance'는 평소에도 즐겨 치는 곡이고, 이루마의 'Indigo'는 처음 들었을 때 이렇게 좋은 곡이 있냐며 놀라기도 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단 한번, 5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를 배운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나는 클래식에 집중하기로 했다. 평생 들어도 다 듣지 못할 정도로 방대한 아카이빙이 되어 있고,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수많은 명곡들, 오래되고 아름다운 그런 음악을 내 손으로도 만들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마음속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이 울려 퍼졌다.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조지 거슈윈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동명의 자장가를 편곡한 피아노 곡 'Summertime'(이하 썸머타임)을 다음 레슨곡 후보로 올린 순간이었다. 


조지 거슈윈의 이름이 낯선 사람이라면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반짝이는 파란색 옷을 입고 빙판 위에서 우아하고 클린하게 연기를 보여주었던 프리 프로그램을 떠올리면 된다. 그때 배경음악이었던 '피아노 협주곡 F장조'의 작곡가가 바로 거슈윈이다.


거슈윈은 클래식 작곡가지만, 'Rhapsody in Blue'처럼 원래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한 작품들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내가 치고 싶은 피아노 솔로 버전은 조금 더 재즈풍으로 편곡이 되었기 때문에 '클래식으로 볼 수 있나?' 긴가민가했다. 물론 이전 편의 에릭 사티의 곡처럼 작품 번호가 없는 클래식 곡도 있긴 하지만, 썸머타임은 누가 들어도 이건 재즈 음악이다.


하지만 클래식이 아니라서 치지 않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이 곡은 언제 들어도 좋았다. 내가 들은 버전은 유튜브에 악보와 함께 편집한 영상의 연주였는데,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한 영상을 찾으려 해도 나오질 않았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같은 곡을 치긴 했는데 다르게 편곡한 버전이었다.) 참고할 수 있는 영상이 적어서 아쉽긴 하지만 일단 처음 본 영상을 돌려 보며 이 곡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내 심장을 저격하는 대부분의 곡이 단조 곡이었는데 이 곡 역시 플랫이 3개 붙어있는 걸 보니 단조가 맞다. 초반 템포는 느리지만 중반부터는 속도가 꽤 붙는데, 어차피 다른 곡들도 원 템포로는 못 친다. 너무 느리지는 않게,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는 속도를 내서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곡은 자주 나오는 박자부터 일반적인 클래식 곡과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4/4 박자의 다른 곡이라면 왼손 반주가 4분음표로 쿵짝쿵짝 하고 이어지거나 8분음표로 쪼개져 쿵짝짝짝 쿵짝짝짝 하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이 곡은 쿵 짝쿵 쿵 짝쿵 악보에 적힌 음표를 정확하게 보지 않고 연주한다면 박자가 헷갈릴 것 같았다. 그리고 왼손 도약이 계속 이어져서 옥타브 저 아래 근음을 치고 다시 올라와 화음을 쳐야 하기 때문에 손이 민첩하게 이동해야 했다.

연주의 미스터치가 줄고 페달을 붙이고 속도를 어느 정도 높이자, 이제 피아노 연주에 생기를 더하는 '음악'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물, 김치, 돼지고기만 넣고 보글보글 끓여도 맛있지만 적절한(?) 조미료를 더했을 때 김치찌개가 맛깔나게 되는 것처럼 피아노 연주에도 조미료가 필요하다. 가령 주 선율(위 악보 사진에서 노란색 표시)은 더 명료하게 소리를 내주고 곁가지에 해당하는 음표(초록색 표시)들은 덜 들리게 다이내믹을 조정하는 식으로. 전체적으로 연주를 들었을 때 물 흐르듯 음악이 들릴 수 있도록 해주는 식이다.


피아노를 배우며 어렵다고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추상적인 표현이 등장할 때다. 피아노는 수학이나 과학처럼 답이 정해진 분야가 아니라서 간혹 선생님이 '느낌적인 느낌' 같은 걸 설명할 때가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반은 알아듣지 못하고 나머지 반은 알아들어도 내 실력으로는 구현을 하지 못한다. 그럴 때는 일단 선생님이 설명하는 걸 들은 후, 내가 이해한 바를 쳐서 들려드리면 선생님이 맞다 아니다를 알려준다. 그러면 맞았다고 했을 때 쳤던 느낌을 잘 기억했다가 그대로 연습하는 식으로 배운 걸 체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곡의 경우 처음 꾸밈음부터 그런 표현들이 시작되었는데, 직전에 배운 베토벤 소나타처럼 또로롱 빠르게 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도로롱 하고 재즈 느낌을 내줘야 한다고 했다. 원체 성격이 급해 고질병인 '건반 위 과속'을 겪는 데다 고지식하기까지 한 나는 악보 위에 작게 표시된 꾸밈음을 보면 본능적으로 냅다 건반을 휘갈기는데 이 곡에서 원하는 우아하게 건반을 쓰다듬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첫마디 도로롱만 몇 번씩 반복해서 치다가 겨우 연주를 시작하는 때도 꽤 많았다.


또한, 20-33마디 구간에서 음이 상행하며 올라가는 부분을 하늘에 별이 멀리서 반짝이며 사라지듯 연주하라고 하셨는데, 예쁜 표현이지만 나의 둔탁한 손가락이 못 따라가는 게 문제였다. '별들아, 안녕.....!' 하는 느낌으로 상행하는 음표들을 이어 치다가 운이 좋은 날은 프레이즈의 마지막 음이 예쁘게 울리며 끝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느낌 없이 그냥 '피아노를 치고 있구나' 소리만 날 뿐이다.

어느 곡이든 유난히 미스터치가 계속되는 마디들도 있는데 이런 마디들은 보통 반복연습을 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Up Tempo' 표기가 되어 있어 속도를 높여야 하는 구간 중에서 왼손은 도약의 연속 오른손은 조표와 임시표의 연속으로 매번 헷갈리던 47-48마디, 63-64마디도 그랬고,

후반부 'Medium Tempo'로 돌아오는 75마디에서도 3화음과 2화음을 계속 연달아 쳐야 해서 손가락이 가야 할 곳을 못 찾고 헤맬 때가 많았다. 게다가 앞부분을 연습하느라 마지막 마디는 몇 번 연습하지 못해 연주를 실컷 잘해놓고 마지막에서 미스터치를 내서 산통을 깬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동안 배웠던 다른 곡들에 비해 길게 연습하기도 했고, 마지막 녹음을 한 지 오래되기도 해서 이 곡은 꼭 영상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두 번째 페이지도 못 넘기고 계속 미스터치가 이어져서 결국 녹음을 하지 않고 곡을 마무리하기로 해서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다른 레슨곡으로 넘어가서 이제는 이 곡을 자주 치지 않게 되자 절대 틀리면 안 된다는 압박이 사라져 오히려 손가락이 날아다니는 아이러니함이 나를 슬프게 했지만 다시 여름이 온다면 후텁지근하고 조용한 밤, 스탠드 등 하나만 켜놓고 천천히 연주하고 싶다. 이렇게 시절의 흐름과 함께 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하나씩 늘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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