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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Jul 18. 2023

피아노가 어떻게 재미없을 수 있나요?

1년쯤 인가. 직장인 밴드의 키보디스트가 된 게. 본업이 있는 직장인들이 매주 모여서 합주를 한다는 건 음악에 진심이라는 의미다. 특히 밴드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취미로 악기를 다룬다니. 각자 다루는 악기에 대한 마음은 애정 그 이상일 거다. 


합주를 마치고 어느 때와 같이 카페에서 수다를 떨던 토요일 밤. 멤버들이 처음 악기를 시작한 이유가 궁금했다. 나야 어릴 때 엄마가 보낸 피아노 학원에서 멋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국민 악기'인 피아노와 달리 기타나 드럼을 배울 때는 본인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테니. 멤버들은 각자의 이유를 풀어놨다. 악기를 시작한 계기는 자연스레 악기와 함께한 역사로 이어졌다.


"피아노를 배우는 데 너무 치기 싫은 거야. 이 시간에 기타 연습을 하면 더 잘 연주할 수 있을 텐데 싶고." 기타리스트가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입에서 문장이 튀어나왔다. "그래요?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피아노가 재미없었던 적이 없었는데."


말하고 바로 놀랐다. 정말 그랬네. 피아노는 늘 재밌었는데. 아파서, 이사를 가서, 엄마가 학원 선생님을 마음에 안 들어해서. 갖가지 이유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면서도, 그래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진도를 나가지 못한 채 도돌이표처럼 늘 같은 지점에서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면서도. 즐겁고 재밌었다. 안 치면 치고 싶고, 새로운 곡이 늘 궁금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이제 피아노는 그만 치고 공부해야지' 하는 부모님의 바람에 별 대꾸 없이 놓았으면서도. 수능이 끝나면 바로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리라 마음먹을 정도로 피아노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립고 좋았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다시 시작한 피아노. 이제 4년 차에 접어든다. 버킷리스트 중에서 지금 내 수준에서 칠 수 있는 곡들은 모두 다 쳤다. 연주회도 여러 번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피아노를 생각하면 심장이 뛴다. 일터에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존엄성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버틸 수 있다. 직장인 OOO이 아니라 브람스의 곡을 연주할 수 있는 OOO이 있으니까.


어떤 일이든 몰입하면 마찬가지겠지만, 피아노를 치면서 내 세계는 확장되었다. 쇼팽, 슈베르트만 듣던 내가 이름 모를 작곡가의 악보를 찾아 헤매기도 하고, 혼자 피아니스트들의 리사이틀을 찾아 다니며 다양한 연주를 접한다. 악보를 그대로 보고 치기만 해도 만족하던 내가 지금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을지 반복해서 연습하고 해석을 연구한다. 


언제까지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종종 상상한다. 목표는 50대가 되면 나만의 해석으로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거라고 늘 말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퇴근하면 연습하러 학원에 갈까 고민하다가 집에 와서 침대에 드러눕는다. 레슨 일이 되면 나는 왜 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벼락치기로 미친 듯이 연습을 한다. 레슨실 피아노 앞에 앉아 선생님에게 이번 주는 바빴다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면 곧 나가떨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순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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