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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Dec 09. 2021

노잼이어도 설레는 초견의 순간

  피아노를 배우며 가장 즐겁게 몰입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피아노요? 완전 재밌죠!


근황을 묻는 지인들에게 요즘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고 하면 대부분은 '그렇구나'하고 다른 얘기로 넘어가지만, 몇몇은 피아노 배우는  어떻냐고 되물어본다. 그럴 때면 자신 있게 너무 재밌다고 말하지만, 사실 레슨을 받고 연습하는 과정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노잼' 연속이다. 쇼팽 발라드 3번도 초견으로 바로 쳐내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같은 실력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취미생들은 처음 보는 악보를 기어가듯  음씩 더듬거리며 친다. 쉬운 구간이 나오면 내리막길 내려가듯 신나서 치다가, 막히는 구간이 나오면 오르막길 올라가듯 굼벵이처럼 느릿느릿.  와중에  취한 사람이 헛발질하듯 미스터치의 연속까지, 총체적 난국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초견 콘텐츠

  한 곡을 큰 실수 없이 치려면 끊임없이 연습해야 한다. 특히 악보에서 손에 익지 않는 어려운 구간을 손에 익도록 무한 되풀이하는 반복 연습은 지루하다. 손에 익지 않는다는 건 평소에 약점이었던 테크닉일 확률이 높다. 나 같은 경우는 3화음씩 연속해서 쳐야 하는 멜로디가 나오면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왼손 아르페지오에 약하다. 이런 부분들은 다른 방법이 없다. 그냥 계속해서 연습하는 수 밖에는... 잘 못하는 걸 많이 해야 하니 괴롭다.


  하지만 괴로워도 해야만 한다. 예전에 기타를 잠깐 배운 적이 있는데, 동생 친구였던 기타 선생님은 악기 연주가 재밌어지려면 일단 잘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연주하는 곡을 충분히 연습하지 못해 한 음을 치고 다음 음을 찾기까지 한참 후 다시 연주를 이어가고... 이런 식으로는 음악의 즐거움을 느끼기 힘들다. 무슨 얘기냐면 즐거우려면 잘해야 하고, 잘하려면 못하는 걸 많이 해서 완성도를 높혀야 하니 그 과정이 노잼의 연속이라는 의미다.


   그래도 나는 레슨 시간에 이제 새로운 곡을 시작하자며 처음 보는 악보를 받은 직후가 가장 즐겁고 피아노에 몰입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한다. 새끼 강아지가 꼬리를 팔랑팔랑 흔들며 신기한 세상 구경하듯 악보를 천천히 읽고, 곡이 쓰인 배경에 대해서도 찾아본다. 유튜브에서 같은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찾아서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연주를 간택(?)해 보기도 한다. 이렇게 간택한 연주를 곡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들으며 곡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익히고 거장들의 해석을 커닝하려고 애쓴다.

  



 잘 읽지도 못하는 악보를 받아서 치는 초견의 순간이 즐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피아노가 즐거운 이유가 각자 다르듯 초견에 대해 품는 생각도 각양각색일 듯싶다. 나의 경우, 보통은 한 곡을 완성하고 새로 배울 곡을 정할 때는 지금 내가 칠 수 있는 수준보다 120% 정도 어려운 곡을 선택한다. 피아노를 다시 배웠던 초반에는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곡을 치기도 했는데, 지금은 한 곡을 익히는 동안 쳐보고 싶은 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선생님이 "이제 이 곡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데 다음 곡은 어떤 걸 쳐볼까요?"라고 물어보는 순간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어 그동안 적어두었던 레슨 희망곡들을 쭉 펼쳐놓는다.


  피아노를 다시 배운 지 2년 정도 지났으니 그동안 레슨곡 선택의 시간이 수 없이 지나갔는데, 간혹 이전에는 쳐볼 엄두조차 못 냈던 곡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자주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 사계 6월 '뱃노래'가 그랬고, 요즘 치고 있는 쇼팽 녹턴이 그렇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 중 가장 벅찼던 순간은 드디어 베토벤 소나타 중 한 곡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다.




  클래식 피아노 테크트리를 잠깐 설명하자면, 바이엘-체르니100으로 이어지는 초급 과정을 거치고 나면 보통은 체르니30과 소나티네를 병행한다. 이후 체르니40에 들어갈 즈음 모차르트 소나타와 바흐 인벤션을 병행하는데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드디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인 베토벤의 소나타를 만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체르니30과 소나티네만 몇 년씩 쳤던지라 모차르트 소나타를 막 입문했을 즈음 피아노를 아예 그만두게 되었다. 모차르트 소나타도 소나티네 수준의 1~2곡 정도만 쳤었기에 베(토벤)선생님을 영접하는 건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접하게 된 것이다.


  보통 2개의 곡을 연습하면서 레슨 받기 때문에 새로운 곡을 선택해야 되는 순간은 생각보다 자주 온다. 평소와 달리 쳐보고 싶은 곡이 딱히 없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베선생님을 모셔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때 받은 베토벤 소나타는 완곡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 다른 곡 연습과 레슨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자연스럽게 접었다. 그래도 베토벤 소나타를 (비록 간만 살짝 봤지만) 쳤다는 성취감은 꽤 만족스러워서, 이후 다른 소나타에 도전하는 마중물이 되었다.


  피아노와 클래식 음악을 사랑한다. 피아노 연주는 언제나 즐겁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 취미생이다. 매일 해가 떠 있는 동안 성실하게 일하고 받은 월급과 개인 시간의 일부를 본업이 아닌 '피아노'에 투자하고 있기에 본전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속물이라는 뜻이다. 투자한 만큼 산출물(=피아노 실력 향상)이 나오지 않는 것 같으면 '피아노에 재능이 없나보다' '계속 배우는 게 맞나?' 싶을 수 있는데, 마치 게임에서 레벨업하는 것 처럼 서서히 배우는 곡의 난이도를 높여가며 이러한 불안을 누르곤 한다.

 



  30대 중반 10년차 직장인으로써 지금은 회사에서 일을 잘해야 되는 건 기본이고 못하면 자격미달이다. 그런데 피아노를 배울 때 만큼은 못해도 된다. 악보를 틀리지 않고 치는 것만으로 선생님으로부터 잘했다는 칭찬도 들을 수 있다. 또한, 한 곡씩 완성할 때마다 드는 성취감이 크다. 특히 예전에는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곡들이 하나씩 내 레퍼토리 안으로 들어온다는 게 참 좋다.


  피아노를 다시 배우기 시작한 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명곡들을 다 배우려면 아마 평생동안 피아노를 쳐도 시간이 모자를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곡을 익히는 초견의 시간은 지난하지만, 평생의 취미가 될 피아노의 긴 여정을 한발자국씩 걸어갈 수 있기에 언제나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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