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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Jan 06. 2022

퇴사의 이유

회사인간, 회사를 떠나다

대책 없이 퇴사한 지 벌써 4개월 차에 접어든다.


40대가 되기 전까지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퇴사는 없을 거라 호언장담했지만,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대사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는 말처럼 사람의 앞날은 알 수가 없었다.


월요일이면 "회사 가기 싫어"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사실 나는 회사가 좋았다. 정확히는 내가 좋아하는 업무를 하며 마음이 잘 통하는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업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데 돈까지 주다니! 물론 매일 정해진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지겹고 때로는 사람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잔안개를 걷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회사는 좋은 곳이라고 여기는 나는 부정할 수 없는 '회사인간'이다.


특히 퇴사 직전까지 다녔던 그 회사가 나는 정말 좋았다. 그 회사는 나에게는 꿈의 회사였다.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아주 작은 사회적 기업을 거쳐 이 회사에 입사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돌아와야 했던가. 입사 초반에는 친구들을 만나도 맨날 회사에서 업무가 더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열변을 토해서, 너네 회사 일을 왜 나까지 걱정해야 되냐며 핀잔을 받을 정도였다.


회사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나는 동료들에게 이 회사는 좋은 회사라며 오래 다니라는 덕담 아닌 덕담을 남기며 떠났다. 마지막 인사 메일을 보내는데 다시는 이 자리에 앉지 못하고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울컥하고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런데 왜 나는 이토록 좋아하던 회사를 떠났을까?



첫 번째 퇴사: 꿈을 찾아서


퇴사가 처음은 아니다. 6개월의 인턴십을 거쳐 힘들게 들어간 첫 회사에서 2년 넘게 일하다 퇴사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대책 없는 퇴사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회사는 유통 대기업이었다. 전국에 100개가 넘는 오프라인 매장이 있었고 온라인 사업도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20대에게 적지 않은 월급과 때가 되면 나오는 상여금, 성과급과 각종 직원 복지 혜택까지. 더불어 시내 한복판 지은 지 얼마 안 된 고층 빌딩에 있는 폼나는 사무실까지 포기할 정도로 꼭 퇴사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퇴사를 하던 해에는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나의 삶이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자, 진지하게 내가 내일 당장 죽는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확실한 건, 고민을 하던 그 시간에도 회사에서 반복해서 하던 그 업무는 아니었다. 대학교 때부터 나는 NGO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는 것보다 누군가의 삶이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나아진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두 번째 이유는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만들고 싶었다. '갑'의 대명사로 불리던 회사에 다녔기에 나이가 어린 나에게도 협력사 담당자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깍듯했다. 어느 정도는 그런 대우에 취해있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우연히 다른 곳에서 알게 된 사람이어도 저 사람들이 나를 똑같이 대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답은 NO 였다. 회사 명함이 없다면 나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었다. 신입사원 때부터 많게는 하루 17시간까지. 바쁜 시기에는 휴일까지 반납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기에 그 회사의 시스템이나 유통업에 대한 이해는 있었다. 하지만 온전히 나 자신만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나만의 강점이 없었다. 그래서 이 회사가 아닌 어느 곳에 가더라도 인정받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퇴사 고민을 시작하고 2달 동안 여러 번 다시 생각했다. 백화점에서 새 옷을 사고 매일 바꿔 입는 걸 좋아하는 내가 적은 월급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용기가 마음속에서 솟구쳤다. 괜찮을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미래가 불확실한데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마지막 출근일에 부서 사람들과 회식을 하고 주말에 조용히 나와 큰 폴리백에 주섬주섬 짐을 정리했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타이밍 좋게 걸려온 그 전화를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다가오는 월요일부터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게 퇴사를 했다.



 번째 퇴사: 더 큰 세상으로


엄밀히 말하면 두 번째 퇴사는 온전한 의미의 '퇴사'라고 하기는 힘들다. 이직을 하게 되어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하고 대학원을 준비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입사한 두 번째 회사는 직원 수가 10명도 채 되지 않는 소규모 사회적 기업이었다. 비즈니스로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는 사회적 기업의 모토가 마음에 들었고, 이전 회사에서 유통업을 경험했기에 이제 사회 초년생을 갓 벗어난 나라도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았다.


이 회사에서는 홍반장급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돈도 사람도 시스템도 없는 회사에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니 정말 힘들었다. 선한 목표와 강한 의지를 가졌지만 비즈니스를 하기에는 경험과 역량이 부족한 회사였기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알아서 배우고 익혀야 했다. 다행히 좋은 팀장님을 만나 큰 그림은 잘 잡아주었지만 내가 일하는 온라인 영역의 경험이 없어서 결국 실무는 사수 없이 해야 했다. 이 시기에 잡기술이 엄청 늘었는데 나중에 그 잡기술들을 제법 사용했으니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는 듯하다.


 온라인이 들어간 모든 업무가 주어지다 보니 깊이가 없이 여기저기 손만 대는 느낌이 들었고, 회사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규모가 작다 보니 열심히 인풋을 넣어도 아웃풋이 늘 작아 성과를 만들고 싶은 목마름이 심해졌다. 커리어를 위해서 큰 규모의 사업을 할 수 있는 회사로 이직을 준비한 지 6개월 만에 내가 제일가고 싶었던 꿈의 회사에 커리어를 쌓고 싶은 업무 담당자로, 심지어 직급도 높여서 입사할 수 있었다.


이때 깨달은 게 하나 있다. 꿈의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력서를 넣었고 가고 싶었던 회사의 홈페이지에 수시로 들어가 업데이트되는 채용공고를 확인했다. 그때 썼던 일기를 보면 이직이 결코 쉽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회사에서 서류 통과도 안돼서 좌절했고, 이력서를 보고 먼저 헤드헌팅 제안이 들어왔는데 역시 서류 통과도 안되어 속상했던 적도 있다. 한 번은 대기업 계열사 사회공헌 담당 업무에 지원했는데 연락이 없어 또 서류 탈락했으려니 하고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오전 업무를 하던 중 그 회사 인사팀에서 오늘 면접에 안 오시냐는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 그때는 이직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회사를 입사했다면 꿈의 회사를 들어가지 못했을 테니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



세 번째 퇴사: 관점의 이동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꿈의 회사였던 세 번째 회사에서도 처음에는 적응이 녹록지 않았다. 일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온라인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들을 이해하고 납득하게 만드는 게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 탓에 마음을 터놓을 동료를 만들지 못해 외로웠던 시간도 꽤 길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했던가. 입사 후 처음 6개월까지는 야근이 많았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만들고 유관 부서와의 스케줄을 맞춰야 하는데 입사 초기라 네트워크도 없고 온전히 혼자 해결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나는 남에게 무관심한 편이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회사에서는 신규 입사자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오지랖을 부리는 제2의 자아가 생겼다. 그런데 원래 누군가를 돕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성향이었으니 남을 도와주며 오히려 내가 더 즐거울 때가 많았다.


업무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에 정비례하여 직무 역량도 빠르게 성장했다. 이 때는 쓸만한 직무 관련 교육이나 콘퍼런스가 있다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무조건 갔었다. 나중에는 이렇게 교육에 투자할 바에는 학위라도 받자 싶어 대학원까지 가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대학원까지는 안 가도 괜찮았을 것 같긴 하다.


커리어에 있어 직무를 조금 더 깊게 파는 것과 동시에 이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하나 더 있었다. 그동안 다녔던 회사들은 3년도 못 채우고 퇴사를 했기에 나도 한 회사에서 진득하게 오래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근속 5년은 반드시 채우자는 다짐이었다. 이 회사는 5년 4개월을 일하고 퇴사했으니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운이 좋아 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 승진도 하고 우수 직원상도 받았다. 동료를 넘어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났다.


30살에 입사했던 회사에서 30대 중반을 향해 가다 보니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그동안 정말 다양한 업무를 했지만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었다. 모든 경험은 '온라인'과 관련되어 있었다. 온라인에서 상품을 판매하고 콘텐츠를 만들고 채널을 운영했던 경험들이 쌓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트렌드가 수시로 바뀌고 크리에이티브한 역량을 필요로 하는 온라인 세상은 나이가 어릴수록 유리했다. 경험이 주는 안정감과 능숙함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쌓이는 역량이다. 결국 나이가 들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걸맞은 큰 규모의 프로젝트 경험이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좋은 일'을 하는 회사는 돈(예산)이 없어서 이런 경험을 쌓기는 어렵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이 회사를 들어오기 전까지의 나는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하는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런데 꿈을 이룬 후, 삶이 점점 무기력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내 인생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여줬던 회사의 모든 것들이 점점 무색무취하게 변해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실에 안주해 있는 내가 보였다.


회사에 속해있지 않더라도, 온전한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만들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 만으로 내 꿈을 대리 실현하고 있었다. '좋은 일'을 하는 회사에 다니는 나는 좋은 사람, 그러니까 보람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내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고의 흐름은 더 이상의 발전이 어렵도록 내 앞길을 막고 있었다.


'좋은 일'을 했던 지난날들은 내 인생에 있어 감사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의 가치를 만들고 행복을 찾는 일을 더 하고 싶다는 걸 깨달았다.




두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 처음으로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한 경험을 브런치에 올리고 읽는 독자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었다. 몇 편 연재하던 중 세 번째 회사로 이직을 하게 되며 글을 쓸 시간이 줄어들었고 또 회사 얘기를 온라인에 풀어내는 게 부담이 되기도 하여 5년이 넘게 글을 쓰지 못했다. 너무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그 당시 썼던 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발행 취소를 해서 지금은 남아있지도 않다. (만약 예전 독자 분들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죄송합니다 ㅠ 글이라는 게 제 맘대로 잘 되질 않더라고요...)


그런데 나는 <규칙 없음>이나 <프리워커스> 같은 책을 보면 어떻게 회사에서 적용시킬 수 있을지 설레고 수시로 일잘러가 되기 위한 방법들을 담은 콘텐츠를 뒤적거리는 어쩔 수 없는 회사인간이라 회사랑 일 얘기할 때가 제일 재밌어서, 가끔씩 회사나 일 얘기를 다시 쓸 계획이다. '퇴사해도 괜찮은'게 주제니 구직 에피소드나 백수 생활 같은 에피소드도 넣어보려 한다.


세 번째 퇴사 후 한동안 무기력에 시달렸다. 꿈의 회사를 퇴사한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부터 물음표가 찍히기 시작했다. 일상이 무너지는 게 싫어서 필사적으로 루틴을 만들고 돈을 벌지 않더라도 무언가를 하기 위해 애썼다. 당장 개인 사업이나 프리랜서를 할 생각도 능력도 없고, 회사인간은 어차피 회사가 누울 자리기에 어딘가에 다시 입사해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조직에 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정을 붙이고 일을 할 자신이 없어서 3개월을 미적대기만 했다.


어제는 퇴사 후 처음으로 입사를 위한 이력서를 제출했다. 수시로 나를 필요로 하는 회사가 있을까,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까 불안함이 울컥 밀려온다.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게 미래니 시간이 흐르고 다시 이 글을 꺼내 읽으며 훗 하고 웃는 날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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