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 여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직업인으로서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삶이 양립할 수 있는지는 좀처럼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육아가 시작되어야 일과 가정을 어떻게 양립할 것인가, 아이를 키우면서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와 같은 치열한 논의가 이뤄진다.
나는 미혼 여성이다.
하지만 미혼여성인 나도 일의 영역에서 나의 여성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니 여성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여도 되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여자 변호사.
지금은 로스쿨 진학생 중 상당수가 여성이고, 주위를 보더라도 여성 변호사들이 많기에 변호사라는 직업과 여성이라는 성별은 크게 대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변호사라는 직업이 만들어내는 그 직업인들의 특성을 주욱 적어 내려가 보면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어렴풋이 사회에서 말하는 혹은 소위 여성에게 요구되는 성별의 특성과 묘하게 대립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든 변호사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하는 업무의 특성에서 도출되는 어쩔 수 없는 직업병과 같은 특성들이 있다.
싸운다. 따진다. 논리적이다. 똑 부러지다. 거칠다. 강하다. 세다.
의뢰인들 중 상당수는 압도적으로 중년의 남성 변호사를 선호한다. 일부 의뢰인들 중에는 여성 변호사가 대리인 혹은 변호인으로 재판에 출석했을 때, "아니 나이 든 남자 변호사님들은 다 어디 가고 이 사람이 나왔어요?"라며 파트너 변호사님들에게 따져 묻기도 한다. 아니 이런 말은 좀 귀에 들리지 않게라도 해주시던가.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엇 그럼 제가 필요하지 않으시다는 건가요? 어케이! 재판 잘 한 번 해보십셔!!"라고 외치며 그대로 뒤돌아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온다. 허허 오늘 재판은 내가 와버렸는데,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실 서면은 내가 쓰는 건데 어쩌려고 저러시나 껄껄 속으로 너털웃음을 지어보지만 뒷맛이 씁쓸하다.
대다수의 의뢰인들은 중년의 남성 변호사들에게서 풍겨지는 수많은 경험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세월의 흔적, 압도적인 중후함, 거기에서 느껴지는 신뢰감을 선호한다. 그런 의뢰인들의 니즈를 맞추기 위해 나를 진화시키다 보면, 어느새 칼 정장에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긴 머리는 단발로 싹둑 자르고, 하늘하늘한 재질의 원피스보다 칼 잡은 각처럼 딱 떨어지는 바지 정장을 입고, 상냥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미소를 건네는 것보다 눈으로 상대를 잡아먹을 것처럼 레이저를 쏘아대며 나름의 카리스마를 뿜어보려 애를 써본다.
어쩔 수 없는 일터에서의 모습도 어느새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새벽 1시 이전에 퇴근이 불가능한 업무량과 근무시간 내내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날카로운 신경을 더 날카롭게 갈아내야 하는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어느새 피부와 머릿결은 푸석푸석 해져있고, 운동을 하지 못해 몸에는 군살이 늘어나고, 옷장 속 모나미 볼펜 같은 (작업복이라 부르는) 칼 정장들 외에 어쩌다 주말에라도 입고 나가려고 꺼내보는 옷들은 한껏 유행이 지나있고, 마지막으로 들러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피부과와 미용실은 야근과 주말출근에 저 멀리 밀려나 버린다.
전문가로서 내가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야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은 나의 외모가 어떠한지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 변호사는 보이는 직업이 아니다. 단지 변호사는 보이지 않는 사무실 방 어딘가에 갇혀 논리적인 서면을 써내야 하고, 결과적으로 상대와 싸워 이겨야 한다.
그러니 직업적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할수록, 나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든다. 아니, 나를 돌보려는 노력이라도 할라치면 이 시간과 노력을 좀 더 내 일에 들이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이 올라온다.
그래서인지 종종 자신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 직업적 의무와 연결되는 이들을 보면 부러움이 올라온다.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그것이 곧 자신의 외면을 가꾸는 일과 연결된다니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하며.
직업인으로서의 내 모습과 여성으로서 내 모습은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그 타협점에서는 하루하루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내 일을 잘 해내고 싶고, 일에서 성과를 얻고 싶고, 멋있는 직장인 여성이 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연애도 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고, 내가 가진 여성으로서의 특성을 한껏 가꿔내고 싶다.
좀처럼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를 손에 들고 그때마다 한쪽으로 기울여 그때그때마다에 맞는 나를 꺼내보려 애를 써본다. 퇴근 직전까지 미친 듯이 서면을 쓰고, 눈에서는 불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처럼 모든 공격성과 나의 날카로움을 더 날카롭게 갈아서 상대방 서면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어 반박을 해본다. 시시각각으로 쏟아지는 업무용 핸드폰 카카오톡에 그 누구보다도 사무적으로 나의 색깔은 모두 지운 무채색의 답을 쏟아낸다.
그러다 사람, 여자로 돌아와야 하는 시간이 되면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 사뭇 환자 같은 몰골을 한 얼굴에 생기를 불어넣어 보려 붉은색 립스틱과 살구빛 블러셔를 바르고, 가방에 몰래 숨겨 두었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갈아입고, 무광의 코가 둥근 굽이 없는 전투화 구두를 벗고 시원하게 발등을 드러내 보이는 굽이 얇은 샌들을 신고 사무실을 뛰쳐나가 본다.
그럼에도 조금 전까지 전쟁터에서 내가 죽거나 네가 죽거나 하며 싸우던 자의 열기와 독기는 남아있어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나도 모르게 법정에서 구두변론을 할법한 말투로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보아 넘기지 못한 채 쏘아붙이기도 하고, 상대에게 나름 활짝 웃어 보이는 미소도 어색하여 입가의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그렇게 나름의 치열한 노력을 하면서 일하는 나도 여성으로서의 나도 지켜내 보려고 잔잔한 호수 밑에서 끊임없이 물장구를 쳐본다.
아직도 최선의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저 오늘도 무엇이 최선일까 고민하는 나만 남아있을 뿐.
내 일을 잘 해내고 누구보다 멋있게 직업인으로 인정을 받고 싶지만, 그런 나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혼자 감당하기엔 버거운 순간들이 있다. 내가 선택한 혹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지만, 일을 하면서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과연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인지 나조차 확신이 없는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혹여 내가 기혼자가 되고 아이의 엄마가 되더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 고민의 깊이가 더 깊어지고 결이 더 다양해지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고민의 순간들을 마주하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그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마주하는 근육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겠다고 나를 다독여본다.
그럴싸한 답을 내린 것도, 무릎을 탁 칠만한 통쾌한 해답을 제시한 것도 아니지만, 가끔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자체로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이렇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 가 닿았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듯이, 어떤 문제에도 절대적으로 완벽한 답이란 없고, 결국 남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에 조금 더 유연한 자세,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대처하는 것이리라. 부디 내일은 오늘보다 더 그러한 자세와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