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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변호사 Sep 07. 2021

피고인은 본인의 죄를 인정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형사사건 변호를 맡게 되면, 누가 보아도 공소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음주운전 죄로 기소되었는데, 혈중 알코올 농도가 처벌 기준 수치인 0.03%를 훌쩍 뛰어넘는 0.1%에 해당하고, 대리운전을 부른 내역도 없는 데다가, 운전 중에 차로 사람까지 치었을 경우. 납작 엎드려 모든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싹싹 비는 수밖에 없다.


혹은 프로포폴 투약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진료 기록이 모두 증거자료로 제출되어 있는 경우, 보이스피싱 사건으로 기소되었는데 빠져나갈 구멍 없이 현금 수거책으로 일 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때, 그 외에도 무죄를 다퉈볼 여지가 있지만 이미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또는 검찰 조사를 받던 중 본인이 다 잘못했다며 범죄를 자백하고 뒤늦게 변호사를 찾아온 경우. 손을 써볼 방도가 없다.


이런 사건들은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무죄를 다투다가는 오히려 괘씸죄로 더 중한 형이 나올 수 있어서, 의뢰인에게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대신 선처를 구하며 정상참작 사유를 주장해보거나, 항소심이라면 양형부당을 주장해보자고 어르고 달랠 수밖에 없다. 피고인 입장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 한다고 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겠지만,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못 하게 명백한 증거가 도처에 깔린 상황에서 괜히 무죄를 주장하다가는 반성의 기미마저 없다는 이유로 더 중한 형이 나올 수 있으니, 최악을 피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렇게 무죄를 주장하고 정상참작 사유를 기재하는 변호인 의견서를 써 내려간다.
몇 차례 이런 변호인 의견서를 써보면, 빈 한글파일 새문서만 열어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단숨에 써 내려갈 수 있을 만큼 비교적 덜 어렵게 의견서를 쓸 수 있다. 치열하게 무죄를 다투며 증인신문을 하거나 온갖 증거를 탄핵해야 하는 사건에 비하면 담당 변호사의 품이 훨씬 적게 들고, 좀 더 수월하게 변호인 의견서를 쓸 수 있는 데다가 의뢰인에게도 괘씸죄로 더 높은 형이 나올 위험을 방지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윈윈인 셈이다.





정상참작을 다투는 변호인 의견서를 쓰려고 하노라면, 의뢰인들은 온갖 자료를 보내온다. 불구속 피고인은 물론이거니와 구속 피고인도 가족을 통하여 또는 옥중 서신으로 자신의 선처를 구하는 각종 자료를 하루가 멀다 하고 우편으로 보내온다.


보통 피고인들이 보내오는 자료는 반성문과 가족 및 지인들의 탄원서. 수십 개의 탄원서를 우편으로 보내올 때면, 이렇게 무더기로 제출해봤자 담당 판사님을 다 읽지도 않으실 텐데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혹시 전해 듣지 못한 사실관계 중 의견서에 쓸만한 내용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여 탄원서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문득. 이 탄원서를 요청하고 받기까지의 과정이 떠오른다.


이 피고인은 이 몇십 개의 탄원서를 받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지인들에게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며,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했을까. 그나마도 불구속 피고인이라면 본인이 직접 주위에 읍소를 했겠지만, 구속 피고인이라면.


구속상태 피고인이 수십 개의 탄원서를 보내왔다는 것은, 갇혀있는 피고인을 대신해 그의 가족들이 주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상황을 설명하고, 어려운 부탁을 좀 하자며 양해를 구하여, 한 장 한 장마다 그렇게 어렵게 탄원서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탄원서는 통상 컴퓨터로 작성하여 출력한 후 서명 날인을 하기도 하지만, 좀 더 진정성을 담기 위해 자필로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짧게는 A4용지 한 페이지 가득에서 길게는 3-4페이지 분량의 탄원서를 써오는 사람들도 있다. 문득, 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탄원서 작성을 요청한 것일까 탄원서의 맨 앞부분 도입부에 피고인과 자신의 관계를 밝히는 부분을 찾아 읽어본다. 가족, 직장 동료, 과거 직장동료, 오랜 친구, 학창 시절 동창, 거래서 지인, 가족의 지인.


피고인과 일면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동원이 된다. 한편 문득 떠올려 보는 것은 피고인의 가족이 이 탄원서를 받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이 바쁜 세상에 무려 자필로 쓴 탄원서를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아쉬운 부탁을 해야 했을까. 탄원서에 쓸 내용을 일러주기 위해 자신의 자녀 또는 배우자가 저지른 범죄를 설명하고, 본인이 잘못한 것이 아님에도 분명 잘못했다 사죄를 했을 것이고, 시간을 내어 탄원서를 써주어 감사하다며 사죄와 감사의 인사를 몇 번이고 전했을 것이다.


의견서에 첨부된 탄원서는 통상 그 내용이 유사하여, 특별히 부모님이나 배우자의 탄원서가 아닌 이상 정상참작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는 어렵고, 다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탄원서를 작성하여 줄 만큼 피고인이 평소 성실하게 사회생활을 하였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되곤 한다.


이렇게, 누군가는 또 탄원서가 들어왔군 이라며 흘려보낼 수 있는 수많은 서류더미들 뒤에 그 피고인의 가족들의 노력이 묻어있다는 떠올리면 그저 그런 서류더미라고 흘려보내기 어렵다.




이렇게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정상참작을 요청하는 형사사건에서는 내가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라는 무기력감이 느껴진다.


분명 피고인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걸린 중대한 일일 것이다. 이미 구속이 되었을 경우 구속상태가 지속되면 가족들의 생계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불구속 피고인이라면 선고기일에 멀쩡하게 옷을 입고 걸어 들어왔다가 그 자리에서 법정 구속되어 잡혀 들어갈까 매일 불안에 떨 것이다.


하지만, 재판부의 입장에서 그 피고인은 공판 기일 하루에만도 보는 수십 명의 피고인들 중 한 명일 뿐이고, 재판부가 가지고 있는 수십 수백 건의 사건 중 한 건일뿐이며, 그 많은 정상참작과 양형부당을 주장하는 피고인들이 똑같이 반복하는 정상참작 사유 중 하나일 뿐이다.


모든 피고인이 자신의 행동을 깊이 반성하고,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연로하고 병약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으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중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것이고, 피고인의 구속상태가 지속될 경우 가족들의 생계가 위험에 처할 지경에 놓여있다. 모든 피고인이 평소 성실하게 사회생활을 해왔고, 많은 지인들이 제출한 탄원서가 이를 입증한다.

이 모두가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특별한 나만의 고유한 사유들 일지 모르나, 이 서면과 증거들을 받아 들 재판부의 입장에서는 그렇고 그런 많은 사건들의 반복되는 똑같은 정상참작 사유일 테니.


이런 의견서를 쓸 때면 나 조차도 평소와 늘 비슷한 목차를 작성하면서도, 이 피고인만큼은 "정말"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고, "정말" 가족들의 생계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정말"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이 사건만큼은 그렇고 그런 흔한 다른 사건들과 다르다고 마음속으로 힘을 주어 말하며 서면을 써보지만, 법률용어로 정제된 의견서는 결국 다른 의견서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견서가 되어 있다.


피고인의 반성문보다 가족들의 탄원서를 읽고 있으면, 정말 이 사건만큼은 적어도 구속은 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 개개인의 간절함과 개별적인 사유들이 충분히 의견서에 녹아들었을까, 피고인에게는 아니 그 가족들에게는 구구절절한 특별한 사유들이 재판부가 보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특별한 사유가 될 수 있을까. 정말 이 사건의 경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그저 그런 이유가 아니니 자세히 보아 달라고 말하는 것이 의견서를 읽는 재판장님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정제된 언어로 다듬어진 변호인 의견서. 그리고 그 안에 쓰여 있는 잘 정돈된 문장, "피고인을 오랜 기간 곁에서 보아온 지인들 및 피고인과 함께 사회생활을 했던 직장 동료들도 피고인이 평소 성실하게 사회생활을 해왔으며, 본인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하나둘씩 모았을 탄원서는 이 몇 글자로 압축된다. "참고자료 1 내지 30 탄원서 각 참조"




그 어떤 글보다도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는 각종 서면과 의견서들. 하지만, 사실 법원에 제출하는 그 서면들은 어떤 글보다도 진한 이야기들을 문장 사이사이에 감추고 있다. 글자 하나, 문장 하나로 압축되어 버리는 차가운 문장들 뒤에는 그 어떤 에세이나 소설로도 담아내기 힘든 간절함이 담겨있고, 차갑게만 느껴지는 서면 뒤에는 그 무엇보다 뜨거운 겹겹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숨어있다. 수십 건의 사건들을 다루다 보면 문장 하나 즈음이야 흘려보내버리는 게 일상이지만, 가끔은 그 문장에 담긴 글자 하나하나의 무게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 글자마다 담긴 이 무게가 읽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그리고 글자마다 실어낼 무게를 감당해온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그 마음에 조금이나마 전달되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으면.




그렇게 마음을 담았던 사건에서 연일 좋은 소식을 들었다. 법정구속이 될까 노심초사했던 피고인이 벌금형을 선고받고, 구속 상태에서 어떻게든 형을 줄여보려고 항소를 했던 피고인에게 집행유예가 나오고,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분명 억울한데 그래도 기소가 될 것 같아 마음을 비우고 있던 사건에서 기소유예가 나왔다.

의뢰인들과 그 가족들은 무어라고 생각할까. 마땅히 그래야 할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할까. 당연한 순리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맞을 수도. 혹은 내가 무게를 담아 눌러쓴 글자들이 아주 조금은 판결을 내리는 사람의 마음에 그 간절함을 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후자처럼 생각하는 편이 좋을 테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 혼자 괜히 뿌듯하다 보면 다음 글에도 좀 더 마음을 실어보려고 더 진득하니 글자를 써 내려갈 수 있을 테니.


오늘도 누군가는 진심을 담은 반성문을 써내려 가고 있을 테고, 누군가의 가족은 지인의 지인을 찾아다니며 탄원서를 써달라고 고개 숙여 부탁을 하고 있을 테고, 누군가는 늦은 밤 사무실에 남아 수십 통씩 쏟아지는 탄원서를 "참고자료 1 내지 30"으로 누르고 눌러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서면을 써낼 테고, 누군가는 그렇게 들어오는 수십 개의 서면을 읽으며 밤을 지새우고 있을 것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을, 아니,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여기에서 저기로, 그 온기가 꺼져버리지 않고 마지막 온기가 남은 채로 가 닿기를. 결과야 어떠하든. 그 마음이 가 닿았다는 것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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