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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는 통역을 한다.

사람과 삶을 해석하는 변호사

by 조일연

나는 지금 통역을 하고 있다.


늦은 밤 온갖 자료들과 씨름하며 서면을 쓰고 있으면 떠오르는 생각이다. 로스쿨에 다닐 때에는 모든 것이 정돈된 상태로 주어졌다. 마치 당근도 양파도 다듬어지고 씻겨서 보기 좋게 깍둑썰기 되어 들어있는 밀키트처럼. 매일 읽는 기본서도, 판례도 명쾌한 논리로 정해진 답을 알려 주었고, 하루에도 수 차례 풀어나가는 기출문제는 완벽한 모범답안처럼 쟁점만 쏙쏙 담은 간추려진 자료들로 가득했다. 주어진 문제를 받아 들면 “어이, 나 함정 여기 있는데, 못 보고 지나칠 텐가?” 라며 잘 정돈된 자료 사이에 함정마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시간 순서로 잘 짜인 사실관계, 모든 사실관계를 적절하게 입증하는 증거들, 어쩜 그렇게 민 형법상 기본서에 나오는 개념과 주요 판례들의 판시사항을 그대로 녹여내기 딱 좋은 상황들까지. 그렇게 나는 정제된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 마치 그것이 실제 세상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뭐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뭔 소리야?" 야근을 하면서 가장 많이 심지어 육성으로 뿜어내는 말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이메일이 후두두둑, 카톡이 다다다다. "카톡"도 아닌 "카가가가가 카톡"을 외치며 도대체 이 것이 다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자료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미션은 소장, 준비서면, 변호인 의견서 쓰기.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고, 아니 일단 당신은 누구이며,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니터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의뢰인을 눈앞에 앉혀놓고 소상히 하나하나 말해보라며 묻고 싶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국지성 호우처럼 눈앞에 쏟아진 이 자료들로 그럴싸한 서면을 써내는 일이다.

마치 물만 끓이고 재료를 몽땅 넣은 채 팔팔 끓이면 기가 막힌 손맛이 우러나는 된장찌개가 뚝딱 완성되는 밀키트로만 요리를 하다가 눈앞에 콩을 주며 "자네 이제 어디 한 번 메주를 쑤어 볼 텐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인 거지. 잘 다듬어져 깍둑썰기 된 재료 대신 흙이 한 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지는 뿌리채소가 앞에 날아든 거다. 그것도 트럭채로. 자료를 읽고, 또 읽고,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어. 쩌. 라. 는. 거. 지!?"를 열 번 즈음 외치고 나면, 신기하게도 조금씩 사실관계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 이런 일이 있었던 후에 이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구나. 이 자료는 이러한 사실관계를 뒷받침한다고 보낸 자료이겠구나. 이 부분은 앞에서 했던 말과 좀 다른데, 증거와 비교해 보니 앞에서 했던 말은 사실을 잘못 기억한 것 같은데? 사실관계와 증거를 정리하고, 우리가 주장해야 할 내용을 찾고, 유사한 사례의 판례들을 검색한다. 그렇게 몇 시간 아니 며칠의 시간을 들이고 나면, 조금씩 날것의 거친 자료들이 “당사자 관계, 계약 체결 경위, 피고의 채무 불이행”과 같은 큼지막한 기둥 아래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아 변호사는 통역을 하는 사람이구나."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와 날것의 자료 뒤에는 ‘내가 이렇게 억울하다고, 이건 지금 아니지 않으냐’는 의뢰인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그리고 변호사는 의뢰인이 정제되지 않은 언어와 다듬어지지 않은 자료들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찾아 법원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률의 언어로 통역하여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한 때 변호사를 떠올리면 그저 싸우는 사람이 떠올랐다. “싸우자. 이기자.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외칠 것 같은 모습. 좀처럼 "쟁취"니 "승리"니 그런 단어에 익숙해지지 않는 나로서는 변호사가 하는 일이란 '쌈박질'이 아닌가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재판에서 하는 일은 나의 주장을 하고, 상대와 논쟁을 하며 상대의 주장이 틀렸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가 하는 일은 단지 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힘든 이들을 대신해 그들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때로 의뢰인들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조차 찾아내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안고 찾아올 때가 있다. “저랑 이혼을 하겠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재산을 부모님 명의로 돌려놓은 것 있죠? 이게 말이 됩니까?” “자주 오던 단골손님이었어요. 이런저런 일을 도와줘서 참 고맙다고만 생각했는데 세상에 저희 가게랑 똑같이 생긴 가게를 바로 옆에 차린 거 있죠?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정말.” 감정이 격해진 의뢰인과 마주 앉아 조심스럽게 하나 둘 질문을 건넨다. “어휴, 많이 놀라셨겠어요. 제가 봐도 답답하고 말이 안 되는걸요. 그런데요 선생님 그러면 그 집을 다시 남편 분 명의로 돌려놓고 절반을 받아야 한다고 말해볼까요?” “세상에 얼마나 속상하셨어요. 혹시 그분이 형사적으로 잘못한 대가를 치르도록 벌을 받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상대방에게 인테리어를 돌려놓으라고 요청만 해보시겠어요?”


물론 때로는 말로 풀어내어 번역할 수 없는 마음도 있다. 아무리 고르고 다듬어도 법의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감정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의뢰인과 마주 앉아 그 마음을 살펴본다. 이 사람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서면을 쓰다 보면 의뢰인들로부터 사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와 자료들을 건네받기도 한다. ‘이런 내용 아무리 써도 이 소송에 하나도 도움 안 돼요. 이 자료도 판사님은 하나도 안 볼 거예요.’라고 말하려다 “제가 이 말을 꼭 좀 판사님한테 하고 싶어서 그래요. 내 이렇게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라고 꼭 좀 말을 좀 해주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나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쑤욱 밀어 넣는다. 이 소송과 조금 관련 없는 말이더라도, 결과에 해가 되지만 않는다면 그 말 또한 전하는 게 나의 몫이 아닐까. 하고 싶은 말을 알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일, 끝내 전하고 싶은 마음을 법의 언어로 전하는 일이 나의 일이니까.


모든 말이 법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완전한 사실, 엉켜 있는 감정, 분명치 않은 기억들. 그 속에서 나는 가능한 최선의 언어를 찾아낸다. 때로는 날것의 재료를 받아 들고 음식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과정이 지난하고 외로워 지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마음을 이해받고 법의 언어로 전해졌다는 사실 만으로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해받는다는 느낌, 그 짧고 강한 순간 하나가 다시 나를 책상 앞으로 불러낸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아주 늦은 새벽까지 누군가 꼭 전하고 싶어 하는 말을 통역하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말들 속에서 간절한 마음 하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의뢰인들의 언어를 법의 언어로 통역하여 그들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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