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범죄자 변호하기

by 조일연

정의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 영화 <변호인>이나 <재심>을 보면서, 변호사는 진실을 찾고 공익을 위해 발 벗고 뛰는 정의의 사도인 줄 알았다.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공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고 다니던 나도 로스쿨 자기소개서에 내가 가진 역량으로 정의를 바로잡는데 기여하겠다고 했다. 정의를 위해 싸우고, 진실을 찾아 헤매고, 공익을 위해 싸우는 변호사. 진실을 바로잡고 부조리를 폭로하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발 벗고 뛰어다니는 정의로운 사람. 하지만 과연 그런 변호사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범죄자인 걸 알면서도 변호해 본 적 있어요?” 형사사건을 주로 맡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걸 가장 궁금해한다. 의뢰인이 유죄라는 걸 알면서도 변호를 해본 적이 있는지. 그때의 기분은 어땠는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뢰인은 성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자신은 억울하다며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자신을 꼭 좀 믿어달라며. 피해자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의뢰인의 말을 믿고 무죄를 주장하기로 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금 꺼림칙한 느낌은 있었지만 수임료를 받았고 사건을 배당받았으니 담당 변호사로서는 의뢰인의 바람대로 주장을 펼쳐갈 수밖에 없었다. “피고인은 이 사건 공소사실 일체를 부인합니다.” 형사사건 첫 기일. 나는 무죄 주장 의지를 밝히고 피고인이 성폭행을 했다는 피해자의 진술 증거의 효력을 모두 부인했다. 의뢰인은 당당했고 나는 의뢰인을 믿어버렸다.


피해자를 증인으로 부르는 증인신문 기일이 잡혔다. 어느 증인신문보다 떨리는 시간이다. 보통의 증인신문이라면 우리 측 증인이니 우리에게 유리한 질문을 가볍게 던지거나, 상대방 측 증인이면 대체로 이상한 말만 할 테니 희박한 확률로 허를 찌를 질문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할 뿐이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정말 피해를 입은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런 피해자를 법정에 불러 성폭행을 당했던 순간에 대해 물어보아야 한다. 심지어 당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당신의 진술과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고,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유독 긴장을 하고서 증인신문 준비를 하던 어느 날. 피해자가 뒤늦게 의뢰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옷을 증거로 제출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자신만만하던 의뢰인은 부끄러움 하나 없이 이것 참 짜증 나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들어선다. 이미 한참 무죄를 주장했는데 증거가 제출되자마자 이제야 자백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이제와 자백을 해봐야 자백의 가장 큰 효과인 선처를 구할 수도 없고 이미 괘씸죄로 낙인찍힐 테니. 의뢰인은 이 상황에도 끝내 무죄를 주장해야겠다며 그 흔적이 왜 거기에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의뢰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니, 그리고 나는 이 사건을 사임할 권한이 없으니 그저 그렇게 해야 했다. 나는 그다음 날 증인신문을 유독 짧고 건조하게 끝냈다. 증인신문사항에는 피해자를 몰아붙이는 질문들이 빼곡했지만 하나, 둘, 그렇게 질문들을 넘겨버렸다. 질문들을 넘기는 사이 재판장에는 피해자를 다그치며 심리적이 압박을 가해 몰아붙여야 할 강한 목소리 대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과연 정의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가 된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전혀 다른 현실 앞에 나는 무력했고,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럼에도, 결국 현실은 결코 내가 원하는 사건만 맡을 수 없었다. 때로는 도무지 왜 이러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 클라이언트의 주장을 들어줘야 했고, 나조차도 납득이 되지 않는 클라이언트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온갖 법률 지식으로 버무려서 마치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원하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주장을 펼쳤다. 변호사로서 내가 하는 일은 때로 내가 꿈꾸던 정의로운 삶과는 다리 하나를 두고 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성추행 사실이 명백한 의뢰인의 탄원서 초안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가요? 이걸요? 왜요?” 당황한 나머지 머릿속에 떠오른 물음표를 필터링도 없이 육성으로 뱉어 버렸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끝내 본인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지 밝히고 용서를 구한다는 탄원서를 받아오지 못해, 의뢰인의 부인 버전, 지인 버전, 친구 버전, 직장동료 버전의 다채로운 탄원서 초안을 쓰면서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 뭐 하지’ 유독 내가 작게 느껴졌다. 땅 투기꾼을 대리해 소송을 진행해서 승소했던 날, ‘나는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오랜 시간 생각했지만 끝내 답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피고로 나온 사람을 보며 '오죽하면 돈을 못 갚았겠나.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직업인 변호사와 한 명의 개인 사이에서 나는 자주 혼란스러웠고 이런 내가 연약하다며 더 자주 움츠러들었다. 그러다 범죄 혐의가 있는 의뢰인을 변호할 때에는 나를 갈아 넣던 것을 멈추어 몸에 힘을 조금 빼고 느슨하게 일을 했다. 이게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이상하게 자꾸만 내가 작아졌다.


로펌을 운영하려면, 월급을 받으려면. 결국 돈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꺼림칙한 마음으로도 사건을 수임하고 범죄자라는 걸 알면서도 변호를 하고, 약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를 얻어낸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는 영화 속에나 존재했고, 나는 그저 현실 앞에서 평범하고 나약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약자의 편에서 싸우고 있는 변호사님들을 보며 미안하다는 부채의식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뿐이다. 부디 이런 분들이 현실에 지지 않기를. 그리고 그런 분들이 더 늘어날 수 있기를.


범죄 혐의가 있어 보이는 의뢰인의 변호를 맡은 날,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유독 쪼그라들어버린 날 변호사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는 이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며. “의뢰인들 중에 정말 죄를 지은 사람도 있지. 그런데 설령 그렇더라도 그 사람들이 자신이 지은 죄만큼, 딱 그만큼만 벌을 받게 하는 거, 그것도 우리의 일이지 않을까?” 맞아. 거창한 정의가 아니더라도 죄를 지은 만큼만 벌을 받게 하는 것도, 모든 인간이 인간이기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돕는 역할도 필요하니까. 친구의 말이 위로가 되어 이런 내가 조금은 덜 부끄러워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딱 그만큼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계속해야지. 혹여 그러다 정말 누명을 벗고 진실을 찾기 위해 목소리가 필요한 이들을 만나면 그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어야지. 대단한 정의를 쫓아 살 수는 없을지라도 그래도 종종 내가 하는 일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지. 부끄러울 때에는 적어도 부끄럽다는 감각은 무뎌지게 만들지 말아야지. 현실에 익숙해져 방향 감각조차 잃어버리지는 말아야지. 이 마음만큼은 끝내 지키고 싶다.


keyword
이전 07화일상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