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이 생각이 잘못되었고 오만한 착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것을 인정해버리면 내가 괜찮은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근거를 내발로 차 버리는 것 같았으니까.
대학생 시절, 대학 졸업 후 몇 년 동안은 이 생각에서 내 존재가치를 찾으며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의 힘이 다해갈 즈음 로스쿨에 입학해서 이런 생각의 바래가는 빛을 간신히 연장시켜 한 번 더 버텼다.
그런데 로스쿨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부와 성적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해석되지 않는 일들을 하나 둘 맞닥뜨렸다.
지금까지 내 생각이 맞다면 공부를 더 많이, 열심히, 잘 한 사람은 더 잘 살거나 혹은 더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공부를 많이 하고 잘했다고 해서 반드시 더 좋은 근무환경에서 일을 하는 것만도 아니었고, 반드시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받는 급여의 액수가 커 보여도 그 급여를 근무시간으로 나누어 시간당 급여를 계산해보면 더욱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그렇다면 더 좋은 근무환경에서 일을 한다면 더 성공한 것일까? 더 많은 급여를 받으면 더 성공한 것일까? 성공이란 무엇일까? 성공하면 행복할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다 내 MBTI 중 두 번째 알파벳은 확신의 N이다.) 분명 나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도달하기 위해 놀고 싶고, 쉬고 싶고, 자고 싶은 모든 욕구를 꾸역꾸역 억눌러가며 책상머리에 앉아있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행복의 척도가 아니었다니.
분명 내가 믿고 있던 (헛된) 기준에 따르면, 나보다 더 좋은 대학과 로스쿨을 졸업하고, 더 좋은 학점을 받은 사람들은 나보다 더 성공하고 더 행복해야 했다. 아니 이건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없고, 사실 비교하는 시선에서 보면 나보다 충분히 좋아 보이기에 좋은 예가 아니군. 이 예를 제쳐두고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헛된 기준에 따르면, 나보다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덜 할애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 내가 더 행복해야 했다. 그것이 성공이든, 명예든, 돈이든, 무엇으로든 더 행복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밤 9시. 허기진 배를 근처 빵집에서 산 샌드위치로 채우고 다시 야근을 하러 돌아가는 길. 서초동 길목 어딘가에 서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저 일이 고되다고, 집에 언제 가냐고 푸념을 늘어놓으러 전화를 걸었는데 이런 담백한 의도와 달리 친구의 목소리를 듣자 울음이 터졌다. "나 왜 이렇게 공허하지. 내가 원하던 것들을 많이 이룬 것 같은데 왜 행복하지가 않지." 휴대폰 너머로는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무슨 멍멍이 소리니.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렴."이라는 쿨내 진동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다 친구야 나는 네가 이럴 때면 네 북극 시베리아보다 강한 쿨함에 몸서리가 쳐지면서 정신이 번쩍 들어)
그렇게 내가 굳게 믿어왔던 생각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해석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졌고, 나는 인정하지 않고서 무시하고 도망쳤다. 내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위선일 거라 나 스스로를 속여도 보고, 때로는 나도 아니 내가 더 행복하다며 행복에서마저 비교와 줄 세우기를 하면서 어떻게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전까지는 조금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분명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사실 알고 있었다. 나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잘못된 생각에 매달릴수록 나는 더 행복해지기 힘들다는 것을.
그렇게 나의 헛된 생각을 동아줄 삼아 붙잡고 매달려 있다가 점점 더 수렁에 빠져 이 손을 더 이상 붙잡고 있기 어려워졌을 때 즈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 손을 스윽 놓아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매달려있던 그 헛된 생각이 오히려 나를 옥죄어 온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자 이제는 내가 그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살기 위해서.
그렇게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서 아등바등 매달려있던 생각의 끈을 놓고 나자 다른 생각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성적 줄 세우기는 행복을 담보하지 않으며, 공부가 아니더라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삶, 자신의 일에 진심인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정하는 순간 내가 더 이상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진정한 행복이 타인과의 비교나 성적 줄 세우기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내 본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무언가를 잘하고 못하고 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떻게든 이 악물고 버텨서 이루어내는 근성이 있는 나, 영민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꾸역꾸역 해내는 것을 잘하는 나. 이런 내 모습이 나 스스로 멋있다고 느껴질 즈음 그동안 유일하게 살 길이라고 붙들고 있었던 것을 놓아버렸을 때의 허무함과 동시에 무언가 모를 자유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감정은 내가 누군가와의 비교에서 우위에 섰을 때, 누군가들은 이루지 못한 성취를 이루었을 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과는 전혀 무관한 일상 속 작은 순간들에서 온다는 것을 조금씩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저렴한데 맛까지 좋은 커피를 발견했을 때, 지하철에 올라타자마자 내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내려 빈자리가 생겼을 때, 점심시간에 산책을 나왔는데 유독 햇살이 따사롭고 날이 좋을 때, 내일 아침에 내려마실 커피가 기다려지면서 잠자리에 들 때. 그런 작은 순간들을 마주했을 때 "아 좋다!" 한 번 내뱉고 숨 넘어가듯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조금 더 깊이 숨을 쉬며 5초 정도 머물러 "아 지금 참 좋다. 행복하다."라고 천천히 속으로 말해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누군가보다 앞서야 한다고.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고 믿고 버텨온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는 행복할 수 있는 수만은 순간들을 흘려버렸다. 언젠가 올 거라고 믿는 커다란 행복이라는 헛된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 헛된 믿음의 끈을 놓아버리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어쩌면 불안한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그 끈을 다시 끌어당겨 슬며시 잡아당길지도 모른다. 그게 나의 생존본능이었으니까.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정신없이 앞을 보며 달리다가도 잠시 머물러 5초 정도 크게 숨을 쉬고 순간의 작은 행복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런 순간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을 믿으니까. 그리고 이런 순간들이 나를 더 자유로운 곳으로 인도하리라는 것 또한 안다. 부디 내가 살아가는 순간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