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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는 순간 보이는 것들

태도에 관하여

by 조일연

친구도, 연인도, 회사도. 끝나는 순간 보이는 것들이 있다.

비벼대고 부대끼며 함께 있는 순간에는 너무 가까이에 있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끝을 향해 가는 순간에는 서로의 사이에 한 숨 바람이 불어오며 한 발짝 떨어져 상대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순간에 본 모습이 내가 알던 이의 모습과 달라 실망하는 마음도, 예상치도 못했던 이의 마음에 대한 고마움도, 그 마음을 더 빨리 알아보지 못해 못내 미안한 마음까지 복잡하게 뒤얽힌다.


또 한 번 회사를 떠나왔다. 아침부터 밤까지 부대끼며 일이라는 이름으로 얽혀 있을 때에는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 누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상한 이 기분은 뭐지 라며 불쑥불쑥 올라오는 감정들에게 '아니야, 들어가 있어.'라고 다그치기만 했다. 하지만 일을 정리하고 떠나오기로 한 순간 몰아닥치며 정점을 향해 내달리던 감정들은 탁. 감정의 선이 끊어지면서 한 겹 차분해져 저 멀리서 사람들을 바라보게 해 주었다. 아 저 사람이 나에게 보여준 태도는 무례함이었구나, 저건 무관심이었구나. 이름표를 붙이지 못해 자꾸만 이게 뭘까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던 껄끄러운 감정들은 그제야 어디에서 온 감정이었는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제야 '아 나도 참 꽤나 힘들었구나. 버틴 거였구나'라는 생각에 잔뜩 미간에 힘을 준 채 영문을 알지 못해 갸우뚱거리던 모습 대신 씁쓸한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그렇게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떠날 준비를 하려던 순간 주위에 있는 줄조차 몰랐던 따뜻한 손길들도 함께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퇴사를 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밥을 먹자는 사람들의 연락이 이어졌다. 머무는 동안 더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연신 그동안 많이 도와주어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고마울 일이 아닌데. 정작 이 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있는 순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서서 못내 아쉬운 마음을 전하고 인사를 건네어온다. 이 마음은 뭘까. 떠나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미는 그 사람들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떠나는 사람은 이제 이 조직에서 나에게 당장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잘 보여야 하는 상사도 아니고, 나의 인사고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동료도 아니다. 그러니 떠나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호의는 대가를 바라거나 이해득실을 따져서는 베풀기 어려운 아니 베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건네오는 따뜻한 한 마디, 마음을 담은 인사, 그리고 앞날을 축복하는 응원까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건네주는 그 마음 앞에서 나는 과연 이런 사람이었나 돌아보다가 이내 자신이 없어져 조금 움츠러들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때 나의 이해득실을 따지지는 않았던가, 이 관계가 나에게 언젠가 도움이 될지 헤아려보지는 않았었나, 그리하여 관계조차 최적의 방법과 가장 높은 효율로 그 관계를 이어가려 하지는 않았었나. 수단이나 대상이 아닌 존재로 사람을 바라보고 대하자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러지 못했던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 솔직히 말하기 어려운 기억들이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이 고마운 마음을 내도록 기억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대가를 따지지 않고 내어준 따뜻한 마음을 잊어버리지 말고 내 안에 차곡차곡 담아두었다가 이 마음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흘려보내자고. 그렇게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주고받으며 대가 없이 주고받아 흘려보내기를 계속하다 보면 삭막한 사회생활 속에서도 따수움이 어딘가에는 계속해서 흐르지 않을까.


본디 사람은 준 것을 기억하기 쉽고 받은 것은 잊기 쉬운 법이라, 나도 내가 받은 이 대가 없는 사랑을 잊을까 두려워 사랑의 부채를 메모장에 기록해 두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라도 흘려보내라고 대가 없이 쥐어준 사랑들 앞에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잊어버리지 않고 꼭 기억하기로 다짐하면서. 혹여 살면서 차가운 마음들을 마주했을 때, 일이 바쁘다며 내 마음이 굳어져 자꾸만 마음이 쪼그라들 때면 내가 빚진 마음들을 꺼내보아야지. 세상에 빚진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앞으로 만날 누군가들에게 계속해서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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