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잡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는 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닌 시대에, 한 권의 잡지가 묵묵히 99년 9개월, 1,197개월을 채우고 통권 900호에 도달했다. 1926년 4월 1일 창간된 월간 『신인간』이 그 주인공이다. 천도교 유일의 기관지이자, 한국 근현대사 100년, 격동의 세월을 통과해 온 이 잡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역사·신앙 아카이브”다.
이번 포덕 166(2025)년 12월호, 통권 900호는 단순한 ‘기념호’가 아니라, “다시 신인간,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 새 만물”을 선언하고 다시 출발하는 기념호다. 권두언에서 오암(박길수 주간)은 1926년 4월, 창간호 권두언의 문장, “우리가 바라는 바는 오직 ‘신인간’의 창조이다”를 다시 불러내 오늘의 우리(천도교인, 동학하는 사람들)을 비춘다. 이로써 지난 99년 9개월의 시간을 ‘자축’이 아니라 ‘자기성찰과 재천명’의 시간으로 삼자고 제안한다. 인류세의 기후위기, 디지털·AI 혁명, 지구 질서의 격변 속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새로워지는 때”를 후천개벽의 시대로 읽어내고, 여기에 응답하는 새 하늘(한울), 새 땅(문명), 새 사람(신인간), 새 만물(사물의 주체성)을 하나의 비전으로 제시한다.
이번 900호의 중심에는 두 개의 굵은 축이 있다. 첫째 축은 “신인간의 시대입니다, 천도교의 시간입니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되는 준암 박인준 교령 인터뷰 기사다다. 교령 취임 200일과 『신인간』 900호를 기념해 마련된 긴 대담은, 한 개인의 신앙 이력에서 출발해, 교단의 현황과 과제,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 준비, 인류세·AI 시대의 문명 전환, 남북 평화와 민족통일, 탈종교 시대의 영성과 수도, K-사상으로서 동학·천도교의 가능성까지 폭넓게 다룬다. “천도교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동학·천도교 사상은 K-철학, K-사상이 될 수 있다”는 언급은, 동학-천도교가 더 이상 과거의 종교가 아니라 미래 문명을 설계하는 사상 자원임을 분명히 한다.
둘째 축은 「신인간 통권 900호–창간 100주년 특집: 축하와 제언」이다. 종법사·전직 교령·교단 각 기관 대표·동학민족통일회·여성회·청년회 등 교단과 시민사회 각 부문의 필자들이 총출동해, 100년을 건너온 『신인간』에 대한 축하와 함께 냉정한 제언을 보낸다. “후천개벽의 등불로 우뚝 서라”, “잡지의 미래를 개척하는 선구자가 되라”, “청년들의 손을 잡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가자”, “한울 공동체의 잡지가 되라”는 메시지들은, 신인간이 더 이상 ‘총부의 잡지’에 머물 수 없으며, 교단 전체와 동학 시민사회,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의 공적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연원회 의장 김성환, 종무원장 강병로, 종의원 의장 정정숙, 감사원장 대행 박돈서, 종학대학원장 김혁태, 동학민족통일회 상임의장 주선원, 천도교여성회본부 김명덕 회장, 천도교청년회 이상미 회장, 영등포교구 조광걸 교구장 등 교단 각 영역의 책임자들이 한데 모여 한 권의 잡지를 두고 각자의 축하와 당부를 건넨다는 것은, 『신인간』이 단지 “사보”가 아니라 교단의 정신적 지형을 형성해 온 공적 매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인간』의 역사는 곧 천도교의 역사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변천사다.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민주화와 세계화, 그리고 오늘의 인류세·AI 시대까지, 잡지의 지령(誌齡)은 곧 시대의 상처와 희망의 연대기를 의미한다. 900호라는 숫자는 국내 잡지 가운데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장구한 지령이며, 그 사이 수만 명의 필자들이 이 지면을 거쳐 갔다.
이번 호의 특별기획 「『신인간』 발행사를 통해 본 한국 근현대사」는, 이 오랜 역사를 한 번 더 조명한다. 잡지가 매달 써 내려간 발행사의 기록을 따라가며, ‘신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가 겪어 온 고난과 역경, 도전과 재기를 함께 되짚는다. 신인간의 100년은 곧 “다시개벽”을 향한 한국 근현대사의 또 다른 얼굴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인간 명품 30선’ 연재의 일곱 번째 글로 실린 신언준의 「자중·분투·창조」는, 20세기 초 신인간 창간기의 사상적 긴장을 다시 불러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새것이란 무엇인가, 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새 사람, 새 생활, 새 문명’이라는 신인간의 원초적 문제의식을 지금 여기의 독자에게 되묻는다.
또 한 편, 박길수의 연재 「다시개벽의 이론과 역사」는 이번 호에서 7회, 그리고 연재의 마지막 회를 맞으며, 천도교 경전에 나타난 시대인식과 개벽론을 정리한다. 창도시대–은도시대–현도시대를 거쳐 오늘의 후천개벽기로 이어지는 사상적 지형이 정리되면서, 900호는 자연스럽게 ‘100년 뒤 다시개벽’을 사유하는 좌표가 된다.
연구논단에서는 라명재의 「해월신사 통문 연구(3·끝)」, 이동초의 「천도교 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관리(4)」가 실려, 신인간이 단지 감성적인 잡지가 아니라, 교단 사상과 유산을 학문적으로 축적하는 플랫폼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해월신사의 통문을 통해 19세기 동학운동의 정신을 복원하고, 전국에 산재한 천도교 문화유산의 현황과 보존 과제를 짚어내는 작업은, 2027년 해월신사 탄신 200주년을 준비하는 교단 전체의 과제와도 직결된다.
통권 900호는 과거만을 회고하지 않는다. AI·디지털 시대를 통과하는 청년 세대의 고민과 감각을, 지면의 중요한 축으로 배치한다.
「내가 생각하는 신인간」 코너에서는, 정의필이 「AI시대의 신인간상」을 통해 생성형 AI와 인간, 영성과 도덕성의 문제를 사유하고, 명승철은 「다시 100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에서 신인간 2세대·3세대 독자의 시선으로 다음 100년을 상상한다. 윤철현은 「영성을 회복하여 도덕 사회를 이루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영성’과 ‘도덕 사회’라는 키워드를 통해 신인간 독자의 삶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청년·학생 지면도 풍성하다. 「학생마당」의 김상휘는 “사람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야의 확장”을, 「청년마당」의 박현빈은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기록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신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은 에세이를 들려준다. 이것은 단지 청년·학생의 ‘코너’가 아니라, 100년 잡지가 다음 세대와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다.
천도교여성회본부 회장 김명덕의 축하 글과 더불어, ‘마음편지’ 코너에서 임남희가 들려주는 “부모님의 신앙은 살아 있는 경전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은, 세대 간 신앙의 전승이 어떻게 한 가정과 한 교단의 생명을 이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다.
오늘 우리는 “종이 잡지가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대형 서점의 잡지 코너는 해마다 줄어들고, 무가(무료잡지)와 SNS 숏폼이 사람들의 시간을 가져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100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온 한 권의 월간지는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이번 호 신인간 칼럼 「AI와 숏폼 콘텐츠의 진화, 문화 전파의 새로운 지평」은, AI와 숏폼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문화 환경 속에서 신인간 같은 ‘롱폼’(장문의, 천천히 읽는 글쓰기)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AI가 요약하고 숏폼이 주목도를 끄는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깊이 읽고, 오래 생각하고, 함께 질문하는 매체”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인간』은, “사라지는 종이”가 아니라 “거꾸로 시대를 비추는 종이 등잔”이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통권 900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내 마음 열리는 곳에 세상 또한 열리고 – 『신인간』 통권 900호, 새로운 시작입니다」에서 발행인 윤태원은, 신인간을 단지 한 권의 잡지가 아니라, 천도교와 동학, 그리고 넓게는 생명평화의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공동 플랫폼’으로 재정의한다. 종이·웹·영상·강좌·좌담회를 아우르는 종합 미디어로서, 다시 100년을 준비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신인간』 통권 900호는, “다시개벽의 과거를 안고, 현재를 밟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한 걸음이다.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간을 통과해 온 이 잡지는, 이제 인류세·AI 시대 이후의 인류 사회, 곧 생명평화·대동·지상천국을 향한 문명 전환의 비전을 묻고 있다.
900호의 여러 글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같은 것을 말한다.
인간은 다시 “한울을 모시고, 사람을 하늘로 섬기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종교는 교권이 아니라 영성과 삶의 실천으로 다시 서야 한다는 것,
AI와 디지털 기술은 인간과 만물의 존엄을 살리는 방향으로만 쓰여야 한다는 것,
청년과 여성, 지역과 농촌, 돌봄과 생태가 새 문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
99년 9개월의 시간을 지나 통권 900호에 이른 지금, 『신인간』은 묻는다.
“다음 100년, 우리는 어떤 신인간으로 살 것인가?”
이 질문에 응답하고 싶은 이라면, 이번 900호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시라. 지난 100년의 겹겹의 기록 위에, 지금 여기의 우리의 얼굴과, AI 이후를 살아갈 미래 세대의 얼굴이 함께 겹쳐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겹침 속에서, ‘다시개벽’의 시대를 여는 작은 길잡이 불빛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