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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평화 Oct 14. 2023

미라클모닝은 '유난'이 아니었다

겪고나서야 깨닭게 된 시간거지의 삶


미라클모닝 바람이 불었던 적이 있다. 아침형인간이라는 말은 더 일찍부터 있었지만 '기적'이라는 섹시한 표현 때문인지, 몇 년 사이 더 팍팍해진 경제 상황때문인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자기개발을 한다는 이 개념은 몇 년 사아에 '보통명사'처럼 자리 잡을만큼 큰 유행이었다


'얼리어답터'는 아니나 또 시류에 (많이) 뒤쳐지는건 싫어하는 나는 미라클모닝이 서점 베스트셀러에서 내려오기 시작할때 쯤 이 책을 읽었다. 당시의 소감은...


밥 먹으면 배부르다는 소리네.
잠 덜 자고 자기개발하면
좋은거 누가 몰라?
저런 책 백권도 쓰겠네


이후에 미라클모닝 실천서, 간증서(?) 등등이 많이 나왔지만 지갑을 열게 만들지 못했다. 태생이 저녁형인간이고 주말에 깨우지 않으면 1-2시까지 거뜬하게(?) 자는 '잠만보'인 내게 미라클모닝, 아침형인간 찬양서, 간증서 류의 책은 지갑을 열기보다 "출근시간 맞춰서 일어나는 것도 졸도 수준인데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라니 자기개발이고 나발이고 골로 가겠다"는 볼멘소리를 먼저 나오게 만들었다.


그.런.데.


천지가 개벽했나 강산이 바뀌었나, '미라클 모닝'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어제 퇴근 후 잠자리에 들기까지 의자에 앉은, 다리를 움직이지 않은 시간은 30분 남짓이다. 집에선 제 손으로 통  밥을 안 먹는 우리집 '최고존엄'의 입으로 끼니를 넣어드리기 위해 그 옆에 앉아있었던 30분이 내가 앉아있었던 시간이 전부다. 내 밥은?최고존엄께서 남긴 밥과 반찬이 담긴 그릇을 설겆이하기 위해 싱크대로 이동하는 중 서서(더 정확히는 걸어가며) 먹었다.


퇴근부터 취침까지 나는 무엇을 했나, 돌아보면 친정엄마집에서 놀고있던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손을 씻기고(내 손도 씻고) 옷을 실내복으로 갈아입힌 뒤 낮잠이불과 막 벗은 아이옷을 세탁기에 넣은후 빨래를 돌리고 바로 밥을 먼저 떠서 식히고 고기를 구었다. 고기가 잠시 익는 사이 아침먹고 쌓여있는 아침 식디 설겆이를 했다. 익은 고기와 반찬, 밥을 그릇에 담고 어질러져 있는 거실을 치우니 밥과 반찬이 어느 정도 식었네. 아이를 앉혀서 밥을 먹였다. 밥을 먹고 잠시 아이가 혼자 노는 사이에 진즉 다 된 아이 빨래를 널고 저녁과 아이가 기관에서 사용했던 점심 식판을 씼었다.


헉...내일 남편 생일인데 준비 0. 다행히 내겐 ㅋㅍ이 있지. 새벽배송되는 아이템 중 적당한 것을 골라서 주문했는데 집에 미역도 고기도 마늘도 아무것도 없네. 망했...


아이 옷을 갈아입혀사 마트로 고고. 미역국 재료만 빠르게 사야하는데 오랫만에 마트에 간 아이는 뽀로로주스도 산대고 마이쮸도 산대고 꼬깔콘도 산대고. 하...그래 빨리 사서 가자. 계산대 앞에서 케이크가 없는걸 인지했지만...베이커리까지 갈 시간이 없어서 마트 베이커리에서 적당한 케이크를  카트에 담고 집으로 고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킨다. 쪼꼬미가 혼자 목욕할리 없지ㅎ애만 씻기려고 했지만 욕조에서 철인삼종급 바다수영하시는 최고존엄덕에 물에 빠진 생쥐꼴. 하지만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이성부모는 아이와 함께 목욕하지 말란 말을 본것같은 느낌적 느낌이어서 애만 적당히 씻겨서 나온다.


아이가 거실에서 뒹굴뒹굴하는 사이에 미역국을 하는데 시계를 보니 10시. 그때 걸려온 남편 전화 "전철역에서 나왔어요" 아직까지 저녁도 못 먹고 들어온 불쌍한 우리집 가장이 좋아하는 비빔면 급히 준비!(그 사이 준비할 시간이ㅜㅜ) 물 끓이고 오이, 사과, 양파, 양배추, 크래미 조물조물 섞는 사이에 면 다 익어서 냉수마찰하고 소스 넣어서 쉐킷쉬킷하니 "띵동"


남편 밥 차려주고 애랑 쫌 놀다가 남편이랑 보육 바톤터치하고 설겆이...정신차리니 11시! 빨리자자!!!



아침형인간 우리집 최고존엄은 오늘도 7시면 눈 번쩍ㅎ새벽이 아니면 직장인 아무개, 가사노동자 A, 누구 엄마 말고 온전히 나로써 살기 위해 확보되는 시간이 0분인 현실. 미라클모닝은 유난이 아니라 온전히 나로써 존재하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무용론자였던 내가 미라클모닝을 검토하는 요즘 한 친구가 말한다.


너...여기서 미라클모닝까지하면 요절한다


아...그럴지도...어쩌지ㅜㅜ 이러다 정신차리면 호호할머니일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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