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겐 기적이며 축복이고 행복이니까
그냥 아무나 돼
JTBC <한끼줍쇼> 촬영 중 한 초등학생을 만난 강호동 씨가 묻는다 "어떤 사람이 될 거예요? 어른이 되면?" 이를 지켜보며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라며 대신 대답하는 이경규 씨를 향해 이효리 씨가 말한다.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 국민요정에서 센 언니, 이제는 힐링의 아이콘이 된 이효리 씨의 여러 어록 중 나는 이 말을 가장 좋아한다. 그냥 아무나 돼.
열렬히 무엇이 되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고3 땐 명문대생이 되고 싶었고, 대학 졸업을 앞두곤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대기업 직장인, 아니 누군가에게 '저 어디 다닙니다'하면 눈빛으로 목소리로 부러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조직에 속하고 싶었다. 직장인이 되어선 친구들에게 '보란 듯이 잘난' 애인을 갖고 싶었고, 결혼을 해선 '자랑거리' 자식을 가진 부모가 되고 싶었다. 서른 해 넘도록 나는 늘 열렬히 무엇이 되고 싶었고, 아니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을 담기엔 부족한 현실의 그릇이 문제였을까. 그릇 끝까지 담아도 거둘 줄 모르고 쏟아대는 욕망이 문제였을까. 넘치진 않았지만 늘 2%가 부족했던 현실에 늘 목말랐고, 행복하기보단 불행한 시간이 많았다. 그때의 노력이, 열정이 부족한 스스로를 자주 책망했고, 늘 정성을 다해준 가족과 친구들이 가끔, 아니 자주 아쉬웠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닿지 않아 늘 목말랐다. 되지 못한 무엇이 늘 고팠다.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됐다. 무엇이 되고 싶음은 '외로움'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눈을 뜨고 거리에 나서면 마주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와도 대체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욕망임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지만 누군가 나의 숨을, 말을, 손짓을 봐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무엇이 되고 싶다는 '목표' 또는 '의지'의 가면을 쓰고 내 앞에 서 있었음을. 스스로를 밟고 찢고 짓이기고 나서 약도 없이 그 상처가 조금씩 아무는 과정에서 '어쩌면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경험하고 싶지 않은 유산 경험이 기쁘지는 않으나 그래도 감사한 것은 나를 더 사랑하는 법을 조금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기 위해(엄마가 되고 싶기도 했지만 병가가 끝나 복직하기 전 임신을 해서 '좀 편한 부서'로 복직하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마음도 함께 있어) 노력했던 반년의 시간 동안 나는 늘 조급했지만, 내 마음과 같지 않아 보이던 남편이 그래서 늘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와서야 나와 네가 그 존재만으로, 함께하고 있음 그 자체로 기쁘고 행복해서 끝까지 함께하기 위해 손잡았음을 다시 깨닫는다. 나는 엄마이지 않아도 네게 사랑스러운 무엇이다.
아프지만 그래도 이 아픔을 감사하자고 마음먹은 것은 이를 통해 너를 사랑하는 법을 조금 배울 수 있어서다. 길지 않지만 엄마 연습을 하는 동안 출퇴근길,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는 길 마주한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 모른다.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기프트콘을 사용하기 위해 들른 카페에서 그 공간을 꽉 채운 사람들의 주문 때문이었는지 지치다 못해 넋이 나간 (아마도) 아르바이트생의 고단한 얼굴을 보며 코끝과 눈으로 차오르는 안쓰러움을 숨기기 위해 볼을 얼마나 때렸을까. 너도 누군가(너의 어머니)가 열 달 동안 소중히 품고, 애지중지 키운 귀한 딸일 텐데. 네 존재가 기쁨인 누군가에게 너의 고단함은 얼마나 큰 아픔이 될까. 그래서 지금 이 시간 숨쉬고 있는 모든 당신은 존재 자체로 의미있다.
그래서 이제야 노래 가사로, 누군가의 SNS 속 글귀로, 머리로 생각하고 펜으로 써 내려갔던 그 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누구나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세상 어떤 행복을 다 주어도 바꾸고 싶지 않은 그 기적 같고 축복 같은 순간을 기억하는 존재가 있기에, 사람은 숨 쉬고 있는 그 존재만으로 특별하다고. 어쩌면 그 순간을 축복하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신은 그 기적을 기억하실 것이기에. 그래서 무엇이 되지 않아도, 아무나 되어도 괜찮다고. 그래서 나도, 너도 무엇이지 않아도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