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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Mar 01. 2020

다시 만난 <원스>로 처음 깨달은 것

2020년 2월 29일의 글


2020년 2월 29일 토요일



영화 <원스>(2006)를 다시 보았다. 한 때는 많이 보았다. dvd를 볼 수 있던 학교 도서관 멀티미디어실에서 좋아하는 장면을 원하는 만큼 다시 보며 공강시간을 보냈다. 다시 본 <원스>는 그대로였다. 좋아했던 영화를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면 대부분은 전혀 다른 감상을 자아내거나, 조금은 실망스러운 장면을 발견하게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는 게 반가웠다. 악기점에서 ‘Falling slowly’를 합주하는 장면의 감동, ‘When your mind's made up’을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장면의 뜨거움이 여전했다. 다만 한 가지, 만족스러운 녹음을 끝내고 남자와 여자가 헤어질 때 나누는 대화는 유난히 새롭게 다가왔다.


이제 못 볼 텐데 마지막으로 차 한 잔, 아니면 저녁 한 끼 함께 하고 헤어지자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남자(사실 그는 시종일관 그랬다)에게 여자는 묻는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 하루를 함께 보낸다면 이들은 지금과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어차피 나도, 당신도 호감이 있지만, 각자의 행선지가 끝내 다르리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 ‘불장난’밖에 더 하겠는가.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는 남자에게 여자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하지만, 해가 지고 약속시간이 지나도 끝내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여자는 남자의 삶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처음 홀연히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흔히 우리가 어떤 관계 속에 있을 때는 그 관계를 유지하고 더 발전시켜 나가는 것만이 선(善)으로 보인다. 반대의 경우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그렇지 않았을 때, 즉 가야 할 길이 다름을 긍정하고 아쉬움 가득한 마음으로 서로를 보내주었을 때 지켜진다. 여자는 마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러닝타임 내내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결을 보여주던 영화는 그 장면에서 분명한 선을 긋고 영화, 허구의 영역에 안착하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의 삶에서 그와 같은 ‘적정선’을 인지하고 기분 좋게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말이다. 우리가 <원스>와 같은 영화를 보는 이유, 내가 굳이 이 영화를 여러 번 보았던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감히 우리는 할 수 없는, 영화 속 주인공이기에 가능했던 어떤 결정들과 거기에 담긴 달콤쌉싸름한 감정의 조각들을 음미하기 위하여.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삶, 그 두 세계의 궤도가 잠깐의 시간 동안 겹쳐 빚어낸 하모니. 그것이 ‘Falling slowly’이며, ‘When your mind's made up’이며, ‘If you want me’이다. 관계는 사라졌지만 노래는 남았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들이, 언제나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오늘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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