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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Lee Jul 16. 2019

Travel Photo Essay_떠나야 보이는 것들

9. <동유럽>과 블라디보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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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린이였던 시절의 어린이들은 전집과 함께 자랐다. ‘시절’을 한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직간접적으로 겪지 않은 시절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인전, 전래동화, 창작동화, 학습만화, 어린이 성경… 종류도 다양하고 품질도 다양한 그 수많은 책은 집집마다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했던 PC와 (한때)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나와 내 동생이 함께 쓰던 방도 다르지 않았다. 금성출판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 스무 권짜리 학습만화, 한국과 해외의 위인들이 각각 40명씩 소개되었던 어떤 위인전, 논술에 도움이 된다며 나름대로 선정된 고전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던 삼성출판사의 전집 등이 그렇게 방을 거쳐 갔다. 한편 이런 책도 있었다. 분명 전집인데, 시리즈로 기획된 것이 분명한데, 전 권이 아니라 낱권으로 꽂혀 있던 책. 왜 우리 집에 오게 된 건지도 알 수 없는 책. 문제의 책은 세계 곳곳을 대륙과 세부 지역으로 쪼개어 설명해놓은 시리즈 중 한 권임이 확실했다. 제목이 <동유럽>이었으니까. 보나마나 서유럽, 남유럽,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등등이 있었겠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서유럽이나 남유럽이나 남아메리카와 같은 책들은 우리 집에 없었고, 오직 <동유럽>만이 외로이 책장 한켠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외로운 것들에 마음이 동했다. 그 책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았다.


가지고 있던 다른 책보다는 크기 자체도 컸고 양장이었다. 당연히 무거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책은 딱 봐도 재미없을 것이 분명한 백과사전식 설명글과 상대적으로 재미와 흥미를 쉽게 유발하는 큼직큼직한 컬러 사진들로 채워져 있었다. 설명글은 한 줄 기억나는 게 없다. 아마 (당연히) 사진 위주로 훑어보았을 것이다. 몇 장의 사진들은 비교적 선명히, 뇌 어딘가로 떠내려가지 않고 남았다. 평범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주거지, 한 치의 빈틈도 놓치지 않고 얽혀 있는 무수한 빨랫줄들, 그 위에 아무렇게나 얹어진 덜 마른 옷들, 딱딱한 표정의 등 굽은 무대 뒤 광대들. 책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런 풍경을 찍은 사진에 자꾸 눈이 갔다. 뒷골목, 뒷모습, 낡은 건물, 지친 사람들, 내가 사는 곳과는 너무 다른 거리의 모습들. 돌이켜보니 그 사진들을 본 게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막연히 ‘유럽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일곱 살에 유럽대륙을 처음 밟기 전까지 끊임없이.



공교롭게도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킨 ‘1989년 혁명’이 막 일어나고 있을 때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동유럽>의 사진들을 다시 떠올려보니, 거기에는 쇠락한 사회주의의 기운이 스며 있었다. 조화롭고 유기적인 하나의 ‘전체’가 되고 싶었던,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는 과분한 욕심이었음을 깨달아 알게 된 국가 일원으로서의 피로가 묻어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을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어디 사회주의뿐이겠는가.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 <피로사회>가 어떠한 사회 속에서 저술된 책인지를 새삼 상기해본다. 어쩌면 내가 보았던 그 책의 제작자들은 자본주의의 피로를 덮기 위해, 실패한 사회주의 국가의, 더 피로해 보이는 사진들을 골라 사용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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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여혱업계와 매스컴은 합심하여 러시아의 작은 도시 블라디보스톡을 추천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나는 그 사이 이미 ‘유럽을 한 번은 다녀온 자’가 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유.럽. 두 글자에 매혹되곤 했다. 유명한 건축물이나 미술작품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 낯선 거리의 일원이 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블라디보스톡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될 것이었다. 유럽이고, 저렴하며, 낯설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 블라디보스톡 항공권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6월, 혼자서 떠날 수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랜 친구와 ‘함께여서 좋았던’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마주한 풍경은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유년기를 지배했던 동유럽의 사진들이 도착하자마자 떠올랐던 것이다. 딱딱한 사람들의 표정, 자본주의를 한껏 받아들였지만 아직은 어딘가 어색한 광고들, 겉은 큰데 안은 별 것이 없는 공항. 입국 심사대를 지나자 경직된 얼굴의 군인들이 여럿 서있었고, 공항 입구에 별도의 검색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유심칩 구매를 안내해준 현지 직원은 유창하게 한국말을 구사하고 친절하기까지 했지만, 교체 초반 데이터 사용이 원활하지 않아 친구와 한참을 헤맸다(핸드폰을 다시 켜니 괜찮아졌다). 그 면면들은 모두 어린 시절 처음 사랑했던 유럽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분명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날씨마저 좋지 않았다면 아마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이 묵직했을 것이다. 다행히 공항을 나서는 순간 눈부신 햇살이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주었다.


어렵지 않게 우리가 타야 할 버스의 정류소를 찾을 수 있었다. 숫자가 프린팅 된 종이가 붙어있지 않았다면 도무지 벤인지 버스인지 알아볼 수 없는 흰색 107번 버스를 타고 블라디보스톡 공항을 떠나 시내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의 코스였다. 내내 창밖을 보았다. 길가에 낡은 차들이 아무렇지 않게 ‘버려져’ 있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 열기가 가득 찬 차안에서 두통의 전조증상을 느꼈다. 그렇게, 아주 두렵지도 들뜨지도 않게 블라디보스톡 시내에 들어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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