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가 회고는 꼬박꼬박 쓰는구만
정말 오래간만에 브런치에 글을 남긴다.
그동안 나는 계속 재택을 했다. 사무실은 3번 정도 가본 것 같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익숙해지자 일하기 30분 전에 일어나서 호다닥 준비를 하고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동안 있었던 변화가 많았다.
1. 번아웃을 경험했다.
속도가 빠른 회사이고 그만큼 할 일도 많다. 그리고 재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업무 종료를 해야할지 알기 어려웠다. 더군더나 나는 "아 조금만 더 하면 진짜 끝날 것 같은데"하고 밤 늦게까지 하는 타입이라 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일 끝내는 순간을 좋아하다보니 조금만 더 하면... 을 반복하다가 체력을 많이 손상시켰다. 번아웃과 관련된 도서도 읽었다. 일과 나를 어느 정도 분리해야 롱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취미도 만들었다(장기적 노동을 위한 취미라니 웃기긴 하지만). 아무튼 취미가 생긴 건 나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2. 취미를 만듬
화실을 다니게 되었는데 정말 다양한 연령대를 만난다. IT와 친숙하지 않은 분도 계셔서 종종 함께 커피를 배달해 마실 때 내가 주문을 해드렸다. 앱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주문 화면을 바로 인지하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정규분포의 끝단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종 산업군에 있는 사람들은 사용자가 당연히 UI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단 기본적으로 앱 설치를 아주 쉽게 하고 서비스 제공자의 의도를 잘 이해할 거라고도 생각하는 것 같다.(아니라면 패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보면서 내가 너무 치우친 경우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내가 종사자이니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어야 했는데. 제목은 취미면서 IT업계 일을 훨씬 길게 썼지만 나는 화실에 가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게 정말 재밌다. 아싸인 나에게는 이 정도가 적당한 소셜감인 듯하다.
3.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래도 내 딴에는 자기개발을 열심히 했었는데 어느 순간 뜻이 없어졌다. 번아웃이 오기도 했고 내가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의 절대치가 적어지니까 뭔가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일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한데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정말 많이 생각했다. 앞으로도 공부를 일절 안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심지어 지금도 강의를 두 개 듣고 있다) 이게 의무가 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외부 PR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이 블로그를 하게 된 게 PR이 주 목적은 아니었지만. 본받고 싶고 배우고 싶은 분들 중 재야의 고수분들도 많으셔서 유명세와 능력이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고 '진짜 PR하고 싶다면 프로덕트로 말해야 맞지 않나? 내가 그런 프로덕트가 있는 사람일까?' 자문했다. 결국은 프로덕트 성공 사례가 곧 증명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내 안의 엄격한 재판관은 "야 지금 하는 거나 성공시켜" 라고 말한다. 그래도 또 뭔가 발표할지도 모른다. 나는 발표하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게 좋기 때문이다.
4. 프로덕트 분석가
지금 회사에서 프로덕트 분석가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하고 있다. 이전에도 안 한 건 아니지만 속도가 이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나는 분석이 실제로 반영되는 경우도 많이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주기가 짧아서 속도도 매우 빠르고 반영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프로덕트 분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잦았다(난 왜 이런 걸 생각하는 걸까?)
4.1 프로덕트 분석은 나랑 잘 맞는다.
내가 생각하는 프로덕트 분석은 데이터를 통한 프론트 개선에 가까운데, 내가 UI나 고객 경험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이 부분이 잘 맞다고 느꼈다. "만약 이렇게 하면 고객이 어떻게 반응할까?"에 대한 증명을 하는 것도 좋고, 실험이 잘 되지 않는다면 이게 왜 잘 안 되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어렵지만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탐정과 비슷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UI 개선을 좋아하는 점 + 의심이 많은 점 + 그렇다면 ㅇㅇㅇ이 출동하면 어떨까? 를 좋아하는 나의 특성들이 여기에 잘 맞는다고 느꼈다.
4.2 잘 하려면 어떤 환경이 필요할까
어떤 환경이든 할 수 있겠지만 정말 데이터 드리븐.. 어쩌구가 문화로 "잘" 정착되려면 어떤 게 필요할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왜 생각하는 걸까?)
내가 체감하기로는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 같다.
4.2.1 실험 문화
실험을 통해서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여부가 크다고 느꼈다. 자체 툴을 쓸 수도 있고 3rd party tool을 쓸 수도 있지만 3rd party tool을 쓸 거라면 정말 그 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firebase a/b test만 해도 설정에서 유의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런 부분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잘못된 실험을 하기 쉬운 듯 하다. 혹은 잘못된 실험을 하고도 눈치 채지 못하거나.
4.2.2 데이터에 대한 회사와 동료의 태도
4.2.1은 있다고 치고 그렇다면 결국 로그 설계가 중요한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중요한 것 같다. 로그 개발을 짐이라고 생각하느냐, 제품이 고객 경험에 도움이 되는가 측정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너무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지금 근무하는 환경의 장점은 실험 중심 문화다 보니 데이터가 왜 필요한지, 로그 개발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공감대가 잘 형성 되어 있다. "제품 개발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정말 도움이 되는지 데이터로 확인하는 게 중요해" 라는 공감대. 협업하는 동료들이 로그 개발에도 우호적이고 역으로 더 좋은 방법을 제안해주시는 경우도 많아 감사하게 생각한다.
4.2.3 분석가를 프로덕트에 포함시키는 것
분석가가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느냐 아니냐가 많은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이미 해야 할 것이 다 정해진 상태에서 분석가가 투입되면 대체로 데이터 추출에 그치기 쉬운 듯 하다. 처음부터 포함되면 많은 것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내가 사용자에 대해 궁금한 것도 찾아보고, 이것을 다른 이해 관계자와 이야기 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엄청 좋은 이야기만 썼지만 그렇다고 내가 근무하는 환경이 완벽한 것은 전혀 전혀 아니다.
단점은 굳이 여기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생략.
6. 책은 그럭저럭 읽었다.
작년에도 87권, 올해도 87권 정도 읽었다. 보통 내 페이스가 이 정도인가보다. 지난해도 그렇고 올해에도 주식, 투자와 관련된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투자 관련 책은 <돈의 심리학>이 제일 재밌었다. 나심 탈레브 책도 재밌게 읽었다. 나는 본인에게도 독설을 하는 독설가를 좋아한다. 픽션은 덜 읽었는데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가 정말 재밌었다. 나는 내가 SF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읽으면서 천재란 이런 거군.. 감탄했다. 그런데 옥타비아 버틀러는 자기에 대한 회의가 많았다고 써서 놀랐다. 그럼 대체 누가 천재란 말일까? 그 외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을 재밌게 읽었다. 인공지능과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뻔할 것 같은 소재인데도 정말 재밌었고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찾아서 읽은 인터뷰도 좋았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90063.html
그 외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었는데 나는 이 책이 제일 좋았다. 내년에도 재밌는 책을 많이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7. 영상 시청 시간이 늘어남
반려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대폭 늘면서 나도 반려인이 좋아하는 영상을 함께 시청했다. <모던 패밀리> 같은 시트콤도 올해 처음 봤다. 이제야 다른 사람들이 왜 영상 서사를 좋아하는가에 대해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텍스트가 아니라 사람이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준다. 매력이라고 해야할지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최근에는 <완다비전>과 <로키>를 봤다. 이제 나에게 마블은 충분해요!!
나의 2021년 회고는 이것으로 끝이다.
그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내년에도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