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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Jul 19. 2024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퍼펙트 데이즈>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일이 단조롭다고 느껴질 때,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늘 비슷한 일상을 견뎌가며 꼭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는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정체기에 한 번씩 생각해 보게 되는 물음이었다.



장마가 한창인 평일 오전, 작은 극장 아트나인에서 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그런 단조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이 행복이라는 것, 그 자체로 완벽한 하루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였다.


영화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짙은 새벽, 쓸쓸하지만  힘있는 빗질 소리에서 시작된다. 누구도 보지 않는 새벽길을 굳이 나와 청소하는 노인의 빗질 덕에 히라야마는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는 익숙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불을 개고,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한 후, 화분에 물을 주고 작업복을 갈아입으며 마침내 집을 나설 채비를 마친다. (영화를 본 직후에 쓴 글이니 순서가 틀릴 수도 있다)


문 앞 선반에는 그가 가지고 나가야 할 차키, 동전, 시계 등의 잡동사니들이 각자의 순서와 배열을 지킨 채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는 그것들을 차례로 주머니와 허리춤에 챙겨 넣는다. 집 앞에는 작은 음료수 자판기가 있는데, 그는 매일 아침 거기에서 캔 커피 하나를 사서 차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카세트테이프 중 하나를 골라 플레이한다. 음악과 커피가 함께하는 출근길의 풍경. 무표정하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번진다. 아, 출근길에 웃을 수 있다니. 그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걸까.



그가 도착한 곳은 도쿄 내 공공 화장실이었다. 그는 결코 누가 보지 않는 상황임에도 최선을 다해 변기와 바닥을 닦는데 전념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거의 10분이 지났음에도 주인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혹시 그가 말을 할 수 없는 인물인가 싶기도 했는데, 수다쟁이 후배의 등장으로 그가 그저 과묵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청소일을 그저 돈벌이로 생각하는 후배와 달리 그의 행동과 마음가짐은 남다른 듯하다.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거울로 비춰가며 꼼꼼히 닦는 프로적인 면모, 누군가가 몰래 끼워놓고 간 장난스러운 쪽지 하나까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소중히 다루는 섬세함까지. 그러니까 그는 한결같은, 한결같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늘 일관된.



그런 그에게도 소소한 일상의 낙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을 때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 그리고 그 사이를 비추는 아름다운 빛, 그 빛을 필름카메라로 찍어 간직하기, 일이 끝난 후에는 동네 목욕탕에서 반신욕을 하며 피로 풀어주기, 늘 같은 식당에서 익숙한 주인의 오늘도 수고했다는 인사를 받고 저녁 먹기,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헌책방에서 직접 골라온 문고본 책 읽기, 그 책을 가지고 호감을 가진 선술집 여주인에게 가기, 여주인에게 책 제목을 알려주고 그녀의 노래 듣기....


이 모든 것 역시 반복되는 소소한 일과 중에 하나였지만, 매일이 비슷할 수는 있어도 똑같지는 않았다. 날씨가 궂은날에는 나뭇잎 사이의 빛을 찍을 수 없었고, 선술집은 어느 날 문을 닫는 일도 있었다. 갑자기 불쑥 가출했다며 찾아온 어여쁜 조카는 연락이 소원한 여동생과의 재회를 하게 해 주었지만 마음의 터부를 남겼다.


 

그는 우연히 강가에서 맥주를 마시던 중 다가온 남자에게서 그림자에 대한 물음을 듣게 된다. 남자는 의문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림자 위에 그림자가 있으면 더 짙어지는 건지. 결국 그런 것도 모른 채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이 삶인 건지. 어딘가 철학적인 그의 넋두리에 히라야마는 직접 그의 그림자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겹쳐보며 남자가 가졌던 생의 의문(?)을 해소하는 것을 돕는다.


남자가 보기에는 별 차이 없었지만 히라야마의 주장은 달랐다.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졌는데 더 진해보이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늘 비슷한 일상, 그 반복의 층계가 삶이라고 말이다.


조카는 가고 싶은 바다에 가길 미루며 '다음에 가자'라고 하는 히라야마에게 물었다. 삼촌이 말하는 다음은 대체 언제냐고. 히라야마는 명료하게 말한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고.


명확하게 약속할 수 없는 '다음'보다 함께하는 '지금'에 진심이고 싶었던 그의 말을 어린 조카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영화관을 나오면서 최근 지지부진하다고 느낀 내 일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매일이 똑같다고 느껴진다면 그 역시 내 나름의 루틴, 일상에 충실한 삶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요즘은 계속해서 확인받으려고 한다.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반복되는 일상이 불편해진 것은 아닐까. 내보일 것이 없는 따분한 생활. 누구도 방문하지 않는 텅 빈 SNS.


히라야마가 상자 속에 모아둔 필름 사진, 언제부터일까 모르게 책장에 가득 꽂힌 카세트테이프와 문고본 책들은 그가 공개하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그만의 취향이자 추억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와 직접 닿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음악과 책을 공유했다. 테이프를 처음 접하는 후배와 후배의 여자 친구, 문고본 책 속 주인공에 동화된 조카, 그리고 책의 제목을 늘 궁금해하는 선술집 여주인에게. 정말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렇기에  그의 반복은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답게 보였다.



누가 보던 보지 않던, 내 나름의 법칙으로 쌓아 올린 하루를 온전히 보낸 날이 최근 얼마나 되었을까. 일상의 지지부진함은 어쩌면 반복이 아닌, 불확신성에서 오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체화된 반복에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지키는 건강한 확신.


영화 속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 리스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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