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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주 Feb 06. 2023

흘러가는 것들을 담을 수 있다면

* 이 글에는 영화 <애프터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는 영화 <녹색광선>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

오랜만에 극장까지 가서 조조영화를 봤다.

어젯밤, 우연히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보고 마음이 동해 충동 예매를 했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며 팸플릿 포스터 속의 이미지만으로 영화를 유추해 봤다.


스토리보다는 미장센이 훌륭한 작품일 것 같다.

과거에 부녀가 여행을 떠난 추억을 담았겠구나.

지금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어둠 속 캠코더 작동 소리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스토리 보다는 조각처럼 흩어져 함께 흐르는 미장센을 좇아가는 영화였고, 부녀가 여름 여행을 떠난다는 큰 틀 어느 정도는 맞았다.

그러나 세월을 지나 그들의 사이가 좋든 나쁘든 당연히 함께 하고 있을 거란 나의 예상은 엇나갔다.

그건 어쩌면 그저 나의 바람이었는지도 몰랐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오랜만에 참 느린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살짝 지루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이를 볼 때마다 짓는 젊은 아빠의 공허한 미소.

흔들리는 캠코더 속에서 함께 흔들리는 심경들.

함께 떠났음에도 드문드문 끼어드는 각각의 시간들.

물과 거울, 혹은 탁자 위에 간접적으로 비치는 인물들은

직접적인 말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짧은 휴가 동안, 아이는 스스로 자랐다.

아빠는 갑자기 밤바다로 뛰어들 만큼 슬픔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찰나에

부녀를 하나로 묶어준 건, 떠나기 전날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1장.

아빠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캠코더 속 영상들이었다.


캠코더 속의 영상은 거기서 끝났지만,

남은 이들은 언제고 같은 장면을 반복하여 재생할 것이다.

그러니 그 재래식(?) VLOG는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닌 셈이다.


끝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코끝이 매웠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것이다. (사실 울었다)

그 슬픔이 어디에서 온 건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 붙박혀 슬픔을 실컷 누렸다.


다행히 내 핸드폰 속에도 그런 영상이 몇 개 남아있었다.

그땐 그 역시도 모두 흐르던 찰나들이었던.

추억은 힘이 없다고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를 다시 웃게 하는 건 역시, 좋은 추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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